울릉도 여행

울릉도 (3) 동남동녀의 슬픈 전설이 서린 성하신당

모산재 2011. 5. 11. 01:49

 

태하등대를 둘러보고 난 다음, 다시 발길을 돌려 해안선과 나란히 나 있는 숲길을 따라 태하 마을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온다. 정류장 바로 곁에는 성하신당이 있다. 4년 전에 그 존재를 미처 몰라 지나쳤던 곳이다. 

 

버스 정류장 곁에는 태하천이 흐르는데 제비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고 있다. 어린 시절 농촌마을 집집마다 처마에 둥지를 틀었던 그 흔했던 제비를 외딴 섬에서 만나니 감개무량이다. ....

 

나리분지의 동쪽 901m의 미륵봉과 태하령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내리는 태하천은 복호폭포(伏虎瀑布)라는 폭포를 거쳐 울릉도에서 가장 넓은 계곡을 이루며 태하마을에서 바닷물과 만난다. 복호폭포로부터 해안 마을까지의 태하천 물줄기는 약 4.3㎞에 이른다고 하니 십리천이라 할 수 있겠는데, 상류쪽 화산암의 봉우리와 능선이 이어지는 산세는 험준하면서도 청정한 삼림의 경관이 볼수록 아름답다.

 

 

▼ 서쪽 갯바위 위에서 바라본 태하 마을

 

 

 

버스 정류장 길 건너 아름드리 소나무(해송)가 늘어선 곳에 성하신당(聖霞神堂)이 자리잡고 있다. 

 

작은 신당은 좁은  앞마당에 가득 들어선 아름드리 해송 줄기들에 가려져 있다. 성하신당은 울릉도 최초이자 최고의 해신당(海神堂)으로, 나이 어린 동남동녀(童男童女)를 해신으로 모시고 있다.

 

 

 

 

 

신당 안에 모셔진 해신은 흰 수염 날리는 위엄 가득한 신선이 아니라 단정한 옷차림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소년 소녀의 모습이다.

 

  

 

성하신당은 어업으로 생업을 유지하였던 울릉도 사람들이 배를 새로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에는 반드시 와서 제를 올리고 비는 곳이다.

 

이 동남동녀 해신에게 제를 올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 2월 28일(양력으론 대개 4월 초순)에는 울릉문화원 주관으로 울릉도 유지와 주민들이 함께하는 성하신당제를 지낸다. 울릉군수, 울릉군의회의장, 울릉문화원장 등이 제관으로 참석할 정도로 울릉도에서는 중요한 문화행사이다. 

 

울릉도를 오고가는 여객선들도 제사를 지낸다고 하는데, 올봄(2011.3.4)에 씨스타호가 이곳에서 무사 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동남동녀가 해신당의 해신으로 모셔지게 된 전설이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고, 성하신당 외벽에는 벽화로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 600여 년 전인 조선 태종 때(1417년), 삼척 사람 김인우는 울릉도 안무사(按撫使)란 직책을 받고 울릉도 거주민의 쇄환(刷還-거주민을 본국으로 데리고 오는 일)을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곳 태하동에 도착하여 유숙하며 순찰을 마치고 귀임하기 하루 전날 밤 취침 중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해신(海神)이 현몽하여 일행 중 동남동녀(童男童女) 2명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는 계시를 하였는데, 안무사는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구애됨이 없이 다음날 출항하기로 하고 아짐을 기다리는데 뜻밖의 풍파가 일어나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바람은 멎을 기세 없이 점점 심해 가기만 하였다. 
 

여러 날을 기다리던 중, 안무사는 문득 전일의 현몽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일행 전원을 모아놓고, 동남동녀 2명에게 일행이 유숙하던 곳에 필묵을 잊고 왔으니 찾아올 것을 명하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두 아이가 필묵을 찾으러 숲속으로 사라지자 그렇게 심하던 풍랑은 거짓말처럼 멎어지고 순풍이 불어오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결국 일행을 재촉하여 급히 출항할 것을 명하니 배는 순풍을 받고 일시에 포구를 멀리하게 되었다.

 

 

▼ 오른쪽에서부터 안무사가 꿈을 꾸는 장면과 풍랑이 거치게 이는 바다 장면과 필묵을 찾으러 떠나는 장면이 차례로 그려져 있다.

 

 

 

속은 줄도 모르는 어린 남녀는 아무리 찾아도 필묵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해변으로 돌아와 보니 배는 벌써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한편 안무사는 무사히 본국으로 귀착하여 울릉도 현황을 복명하였으나 당시 연민의 정과 죄의식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날 날이 없었다. 그러다 수년 후 다시 울릉도 안무(按撫)의 명을 받고 들어온 안무사는 전년에 유숙하던 자리에서 꼭 껴안은 형상의 동남동녀 백골(白骨)을 발견하였다.

 

외로이 남아 공포와 추위, 그리고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어갔을 두 어린 혼령을 위해 안무사는 신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고 귀임하였다.

 

 

 

울릉도 주민들은 이곳에서 매년 음력 2월 28일에 제사를 지내며 혼령을 위로하고, 농사나  어업이 잘 되기를 기원하고 그리고 배를 띄우면서 뱃길의 무사 안전을 빌게 되었다고 한다.

 

 

 

 

성하신당을 나와 다시 버스 정류장에서 태하천을 따라 낮게 분주히 날아다니는 제비들을 바라보며 다시 도동으로 나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내일 이곳만큼은 비바람이 피해 갔으면 좋으련만 날씨는 벌써 시야가 흐릿해져가고 있다.

 

 

 주변의 문화재 / 태하리 광서명 각석문(光緖銘 刻石文) 

 

현포로 넘어가는 길에서 태하로 들어서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성하신당에서 걸어서 5분거리) 가까운 곳에 '광서명 각석문' 있다. 보호각을 씌워 놓았다.

 

연석 바위에 음각한 글로, 울릉도 개척 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는데, 1890년 봄 쥐가 끓고 흉년이 들자 울릉도 사정을 안 영의정이 구휼미를 보내 흉년을 넘기게 되었으며 울릉도 개척민들이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당시 도장인 서경수와 오위장을 지낸 손주영이 새긴 것이다.

 

울릉도 개척기의 역사를 더듬고 느낄 수 있는 문화재로 도지정문화재 제411호로 등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