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13) 선운산 도솔암 나한전 /내원궁 오르는 계단 절벽의 암각서

모산재 2011. 3. 19. 20:23

 

우람하고 씩씩한 도솔암 미륵마애불을 돌아본 다음 이제, 마애불 위쪽에 있는 도솔천내원궁(兜率天內院宮)으로 향한다.

 

 

내원궁으로 오르기 전 잠시 도솔암 나한전(문화재 자료 제110호)을 들여다 본다. 조선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나한전 내부에는 흙으로 빚은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가섭과 아난존자가 협시하고 있다.

 

 

 

 

 

삼존상 주변에는 16나한상을 모시고 있어 나한전이라 불리는데, 1910년 용문암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용문굴과 얽혀진 전설이 전하고 있다.

 

용문굴에 사는 이무기가 주민들을 괴롭히므로 이를 쫓아내기 위해 인도에서 나한상을 모셔오자 이무기가 사라졌다. 그리하여 이무기가 뚫고 간 바위 위에 나한전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용문굴은 낙조대로 오르는 기슭에 있다.

 

 

내원궁 가는 길은 나한전 뒤쪽 가파른 절벽 사이로 나 있다. 도솔천을 상징하는 내원궁이라 격을 맞추기 위해 일주문을 세워 놓았다. 지붕 한쪽이 무너졌는지 '갑바'를 씌워 놓았다.

 

 

 

 

 

일주문 지나며 보니 오른쪽에는 커다란 바위로 쎃은 높은 축대 위에 잡초 우거진 넓은 땅이 있는데, 아마도 예전의 절터였던 곳으로 짐작이 된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오르는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진다.

 

 

 

 

■ 내원궁 오르는 절벽의 암각서

 

그런데 무심코 발견하는 암각서, 절벽 아래쪽에 무슨 한문 글귀가 새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두 줄로 된 글을 유심히 살펴보니 윗줄은 두 글자씩 짝을 이룬 말이 셋인데 아마도 사람 이름을 새긴 듯하다. 쉽게 식별이 되는 글자가 대부분인데 두어 글자가 뭔지 잘 읽히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도 전국 어디서나 산수 좋은 곳을 찾은 선비들이 기념으로 새긴 암각서임에 틀림없는데,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服齊 河西 眉巖 三先生 遊賞○(복제 하서 미암 삼선생 유상○)

     河西 后孫 金佶中○(하서 후손 김길중○)

 

 

뜻을 새겨 보면 아마도 "복제, 하서, 미암 세 선생께서 유람하며 구경하신 곳임을 하서 선생의 후손 김길중이 새겨 놓다." 쯤 될 것 같다. 적어 놓은 호만으로는 낯선 분들이라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러나 '○' 부분의 글씨는 바위면이 고르지 않아 알아볼 수 없다. 위의 글자는 새긴 획의 흐름이 보이지 않아 짐작하기 어려운데 , 아래 글자는 '쇠금(金)' 변과 '새추(隹)'자 형태가 들어 있어 '새기다'는 뜻과 관련된 글자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쓰면서 원본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본 끝에 다행히 글자를 해독했다. '유상(遊賞)'이 '유람하며 구경하다'는 뜻임에는 틀림없으니 ○ 부분은 틀림없이 장소를 나타내는 글자일 터. 그래서 '곳 처(處)'일까 하고 보니 글자 모양이 암각서와 전혀 맞지 않다. 그럼 그냥 평범한 '소(所)'자는 어떨까 하고 보니, 과연 '소(所)'자의 속자 아닌가(붓글씨에서 흔히 쓰는 위 글자)...

 

그리고, '金佶中'이란 이름 뒤에는 '새기다'라는 뜻이 들어가야 맞을 듯싶어 '쇠금(金)' 변과 '새추(隹)'자 형태가 들어가는 글자를 찾다보니 바로 '새기다'는 뜻의 '鐫(전)'자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이 글자는 비교적 또렷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 글자를 잘 몰랐던 내 무지의 소치... 

 

그러니까 맨 처음 내가 추정해 풀이했던 것이 그대로 맞았다.

 

 

    服齊 河西 眉巖 三先生 遊賞所 河西 后孫 金佶中鐫(복제 하서 미암 3선생 유상소, 하서 후손 김길중 전)

    복제, 하서, 미암 세 선생께서 유람하며 구경하신 곳임을 하서 선생의 후손 김길중이 새겨 놓다.

 

 

 

 

그러면 여기서 언급된 세 분의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호를 근거로 검색해 보니 이 분들은 모두 조선 중기 호남 출신의 빼어난 문신들이다. 복제 선생만 20년 가까이 앞선 분이고 하서와 미암 선생은 비슷한 연배이다. 아마도 호남 사림으로서 정치적으로 가까운 분들이 선운사와 도솔암을 유람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 복제 기준(奇遵, 1492~1521)

 

복제 선생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었던 기준(奇遵, 1492~1521)이다. 1519년 응교(應敎)가 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와 함께 하옥되었다가 유배되었고, 1521년 신사무옥으로 서른의 젊은 나이에 유배지에서 교살된 비운의 주인공이다. 1545년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신원되어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에 능하여 <해동시선>과 <대동운부군옥>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 <복재집> <덕양일기(德陽日記) 등이 있다.

허균의  <학산초담>에는 기준의 '절명시(絶命詩)가 전한다.

     日落天如黑(일락천여흑)     해 떨어지니 하늘은 칠흑과 같고 
     山深谷似雲(산심곡사운)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 같구나.
     君臣千載意(군신천재의)     천년을 지키자는 군신의 의는
     惆悵一孤墳(추창일고분)     슬프구나, 외로운 무덤 하나뿐 

 

 

■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style="font-family: Batang,바탕,serif; font-size: 10pt;">하서 선생은 김인후(1510~1560)이다. 중종 때 홍문관 박사로 세자 시절의 인종을 가르쳤으며 인종이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뜻을 잃고 고향인 전남 장성으로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문묘와 여러 서원에서 동방 18현으로 배향된 분이다.

호남의 정자 소쇄원․면앙정․식영정․환벽당 등에서 문사들과 교유하는 등 호남 시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쇄원48영>․<면앙정30영> 등은 누정 미학의 구도를 그려낸 작품으로 그의 자연관이 잘 나타나 있다. 순리적인 인생관을 노래한 시조  "靑山도 절로절로 綠水도 절로절로 / 산 절로 물 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라는 <자연가>는 유명하다. 

허균은 그의 인품과 시격에 대하여 '고광이수(高曠夷粹: 뜻이 높고 탁트이며 온화하고 순수함)'하다고 평하였다.

 

 

■ 미암 류희춘(柳希春, 1513~1577)

미암 선생은 류희춘(1513~1577)으로 여류문인 송덕봉의 남편이다. 집 뒤에 눈썹바위가 있어서 호를 미암이라 하였다 한다. 해남 사람으로 경사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16세기 호남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가 윤임 등의 죄를 물어 숙청하라는 밀지를 내리자 이에 부당함을 논하다가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가 남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보물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1567년(선조1) 10월 1일부터 죽기 전날인 1577년 5월 13일까지 약 10년 동안의 일기로, 명종조에서 선조 초에 일어난 큰 사건과 동서분당기 정계 동향, 중앙과 지방의 관료조직 체계 등에 관한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고, 그밖에 그 자신이 홍문관과 전라도감사 등에 재직하면서 겪었던 일을 비롯하여 당시 정치․경제․사회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원래 14책이었으나 일실되고 현재 11책이 남아 전한다. 부록으로 그의 부인 송씨의 시문과 잡록이 실려있다.이 가운데 일부가 문집인 <미암집(眉巖集)>에 초록되어 있다. 현전하는 개인 일기로는 가장 방대한 분량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일지는 임진왜란 때 선조 25년 이전의 기록이 다 타고 없어져 이이의 <경연일기>와 더불어 <선조실록>을 기록할 때 기본사료가 되었다.

 

 

 

 

더보기
※ 벽서의 옥 = 정미사화(丁未士禍)

 

1546년 윤원로 ·윤원형 형제의 권력 싸움 끝에 윤원로가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데 이어 1547년에는 괴벽서사건(怪壁書事件)으로 다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다. 이 해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 양재역 벽 위에서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의 벽서를 발견했다. 이 벽서는 임금에게 보고되었고 섭정을 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지시하여 윤임 일파를 숙청하게 하였다.

이에 윤원형의 일파인 이기 ·정명순 등이 이러한 사론(邪論)은 을사사화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증거라고 하여 그 잔당으로 지목된 봉성군(중종의 서자 岏) ·송인수 ·이약빙 ·임형수 등을 죽이고 권발 ·이언적 등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이 사건은 ‘'벽서(壁書)의 옥(獄)'’이라고도 부르며 윤원형 일파가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하다 다음 카페 <고창문화관광해설사>에 마침 이 암각서를 다룬 글, '마애불 옆 암각서(巖刻書) 발견'이 있어 반갑게 읽어 보았다. 아마도 이곳의 암각서에 대해서 언급한 거의 유일한 글이 아닌가 싶다.

 

이 글에서는 암각서를 다음과 같이 판독하였다.

 

 

     服齊 河西 眉巖 三先生 遊賞雁(복제 하서 미암 삼선생 유상안)

     河西 后孫 金信中焦(하서후손 김신중초)

 

 

여기서 황색으로 표시한 글자는 잘못 판독하였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여기서 내가 '장소 所'로 보았던 것을 '기러기 雁'으로 판독하고, '유상안(遊賞雁)'을'상춘의 자리를 마련했다.(무장현감이 모시고 상도솔 선녀바위에서 유람한 자리를 마련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에서 '기러기 雁'이 오기에는 자연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러기'를 '봄'으로 해석하고 이로부터 세 분이 찾은 계절이 봄이라고 해석한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래 문장에서도'金信中焦'라 판독한 것도 새겨진 글자의 일부를 잘못 본 것이고, '焦'가 '새기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500 년 세월의 풍상에 마모된 탓으로 빚어진 실수, 바른 정보를 위해 지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