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12) 선운사 도솔암과 미륵마애불

모산재 2011. 3. 18. 11:11

 

장사송을 지나자마자 길은 오른쪽 산길로 급하게 꺾어지며 도솔암(兜率庵)으로 오른다.

 

 

도솔암은 선운사 남서쪽 약 2.5㎞ 지점, 바위 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소나무가 숲을 이룬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앞산은 험준한 산이 두르고 있고, 멀리 서쪽으로 암자 건너편에는 까마득한 절벽을 이룬 거대한 천마바위가 천공에 걸려 있다.

 

'호남의 내금강'이라더니 가히 미륵불이 거처할 도솔천궁이 자리잡을 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도솔암은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미륵삼존의 현몽으로 신라 진흥왕이 창건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는 하지만, 백제에 대해 공세적이고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기까지 했던 그가 백제 영토 깊숙이 들어와 머물렀다는 것은 어불성설로 보인다.

 

창건에 대해 구체적인 사실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으로 도솔암이 미륵신앙을 배경으로 창건된 절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기에 조성된 마애불을 미륵불로 부르는 데서도 도솔암이 미륵신앙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절마당으로 들어서니, 하얀 회벽이 드러나는 요사채가 먼저 눈에 드는데, 산객 차림이 아닌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조선 후기에 도솔암은 상도솔암 하도솔암 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졌는데,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내원궁이고,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이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암 법당이 있는 자리라고 한다. 원래는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와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도솔암은 극락보전, 나한전, 도솔천내원궁,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단을 올라 법당 마당으로 올라서니 법당 앞에 많은 사람들이 가부좌를 한 채 합장하고 있다. 무슨 법회라도 열리고 있는 것일까...

 

 

도솔암의 본당은 뜻밖에도 극락보전(極樂寶殿)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1703년에 창건되었다는 법당에는 극락을 지키는 내세불인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현세 중심의 미륵사상을 상징하는 도솔암에 내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상징하는 극락전이라니...  중생을 제도하러 하계(현세)에 나타나실 미륵불이 거처하는 도솔천을 상징하는 도솔암에, 극락(내세)을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조성한 것은 모순처럼 보인다.

 

어쨌든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과  절벽에 새긴 미륵마애불의 결합은 도솔암이 미륵신앙과 아미타신앙이 혼동된 형태로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부처님에 의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염원이 반영된 신앙이라는 점에서 모순을 뛰어넘는 공존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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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토신앙 (淨土信仰), 아미타불과 미륵불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의 나라인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신앙이다. 정토란 일체의 부정한 것이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로서 즐거움만이 충만된 세계를 가리킨다. 불교 경전에는 미륵보살의 도솔천정토, 약사여래의 유리광정토 등 여러 가지의 정토가 설하여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승한 곳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라 한다.

 

이 인간 세상은 고통과 고뇌, 그리고 구도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들로 가득 차 있으며, 이에 아미타불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그의 불가사의한 영력으로 다음 세상에서는 극락정토에 태어나서 진정한 구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정토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기원 후 100년경 인도의 북서 지방에서 시작되어 중앙아시아와 중국 등지를 거쳐 우리 나라로 전하여졌는데, 선종(禪宗)과 같은 자력신앙과 비교하여 타력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토신앙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신라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끊임없는 전란과 사회적 불안이 한 요인이 되어 이 신앙이 아주 성행하였는데, 사자(死者)의 왕생, 타력에 의지한 왕생사상은 대승불교의 대중화와 함께 자력왕생, 현생생불설(現生生佛說) 등을 낳았다. 이 시기가 한국 정토사상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데, 법위, 원효, 현일, 의적, 경흥 등의 불교사상가들이 활약하였다.

 

극락왕생을 기구하는 정토신앙은 현세보다는 내세를, 차안보다는 피안을, 이승보다는 저승에 중점을 두는 신앙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윤회사상에 대한 해석도 본래적 해석을 떠나서 전개하고 있다. 원래 인도 불교에서 윤회는 끝없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윤회를 부정하는 측면에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복신앙으로서 윤회를 생각한 중국인들은 이를 긍정적 방향에서 받아들였고 이같이 변용된 불교를 신라 사회는 받아들였다.

 

그러나 귀족층이 현재의 복락이 내세까지 연장되기를 바라고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서민들은 현재의 고통과 불안이 끝나고 극락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층의 사상과 서민층의 사상에는 연장과 단절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력적이고 능동적인 불교가 타력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한 것은 미륵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미륵신앙은 도솔천에서 이승으로 강림(降臨)하는 하생(下生)의 형태인데 반해 정토신앙은 이승에서 극락으로 왕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두 신앙은 서로 상반된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데, 미륵신앙이 현세 지향적이라면 정토신앙은 내세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타력적인 신앙이란 면에서는 꼭 같다.

 

정토신앙은 미륵신앙보다 나중에 일어나 크게 성행하였는데 그 기간은 미륵신앙에 비해 짧았다. 사후의 내세적 극락보다는 재림주가 아무래도 더 강렬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 같으며, 또한 전술한 바와 같이 귀족층과 서민층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혼선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문화원형백과> 발췌

 

 

 

단촐한 세 칸 법당에 일곱 칸이나 되는 요사채가 있어 특이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법당보다는 요사채로 더 눈길이 간다. 이 외에도 요사가 두 채 더 있으니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머문다는 뜻일까.

 

 

 

 

 

연등에 가려진 법당을 보기 위해 올라서니, 법당 가운데에 스님이 앉아 모여든 보살들 앞에서 법회를 열고 있는 중이다. 법당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분위기여서 멀리서 법회를 여는 스님의 모습을 담아본다.

 

 

 

 

 

 

 

 

법당을 지나 서편 언덕 위에 있는 마애불로 향한다.

 

 

▼ 언덕 위 나한전 앞에서 내려다 본 도솔암 전경

 

 

 

 

 

 

서쪽 언덕길을 오르자 다시 절벽 아래에 작은 마당이 나타나고 거기에 나한전이 있다.

 

 

거기서 절벽을 끼고 서쪽 방향으로 돌아서자 다시 작은 마당이 나타난다. 바로 거기 까마득한 붉은 절벽 위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유명한, 보물 제 1200호 도솔암 마애불이다.

 

 

 

 

 

40미터가 넘는 높은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 암각여래상은 높이 13m, 너비 3m에 이르는 마애좌불상으로 위용이 대단하다.

 

하지만 우람한 대신 불상의 조각 기법은 전체적으로 선이 거칠고 투박하다. 유홍준은 이를 "도발적인 인상에다 젊고 능력있는 개성을 보여준다"고 표현하며 하대신라 이래로 "지방 호족들의 자화상적 이미지가 거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였다.

 

 

 

 

 

 

불상은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을 낮은 돋을새김하였다.

 

다소 각지고 납작한 얼굴에 눈은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며 머리의 상투(육계)는 뾰족하다. 도드라지게 높은 코에 일자로 살짝 벌린 입술은 지나칠만큼 두툼하다. 귀는 어깨에 닿을 듯 늘어져 있고, 삼도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목이 짧다.

 

결가부좌한 하체가 큼직해 상체가 다소 빈약해 보인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불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광배는 없고 가슴 가운데에는 복장(腹藏)구멍의 흔적이 있다.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이 여럿 뚫려 있고, 더러는 부러진 목재가 꽂힌 채로 남아 있다. 마애불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닫집 형태의 목조 전실(前室)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인조 26년(1648)에 붕괴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 절 이름이 중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불러온 것으로 미륵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이 조성된 이래 이 불상의 복장 구멍 속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왔는데, 갑오농민전쟁 무렵에는 주도세력들이 미륵이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동락의 후천개벽 사상에 기대어  민심을 모으기 위해 복장 구멍을 열고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마애불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엇갈린다.

 

도솔암 홈페이지에서는 "전설에 의하면 백제 위덕왕(재위 554∼597년)이 검단선사에게 부탁하여 암벽에 불상을 조각하고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는데, 조선 영조 때 무너졌다고 한다."고 하여 조성 시기가 선운사 창건 시기와 일치하는 전설을 전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정설인 듯하다. 그러나, 유홍준은 "충숙왕 때 효정 선사에 의해 선운사가 크게 중수됐다."는 사적기를 근거로 고려말인 충숙왕(1313~1339)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마애불 동쪽에는 좁고 긴 굴이 있어 호기심에 사람들이 줄을 이어 드나들고 있다. 규모만 작을 뿐 장사송 뒤에 있는 진흥굴과 마찬가지로 기도하며 치성을 드리는 장소로 이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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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마애불 복장 비결과 동학군

 

이 암각여래상의 배꼽(정확히는 명치) 부위에는 네모난 서랍이 파여 있다. 이것은 부처님을 봉안할 때 복장하는 감실이다. 여기에는 불경이나 불화  그리고  시주자의 이름 등 조성내력이 기록된 문서가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는 세월이 많이 흘러갔다. 불교가 배척받는 긴 세월 동안 복장을 한  감실의 내력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기괴한 전설이 하나 생겼다. 이 부처님의 배꼽 속에는 신기한 비결이 들어  있어서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른바 갑오농민전쟁의 '석불비결'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에도 나오는데, 그 원전은  이 사건 관련자의 한 사람인 오지영의 <동학사>에 실려 있다.

 

1820년, 이서구가 전라도 관찰사로 도임한 후 며칠 안되어 무슨 조짐을 보고 남쪽으로 내려가 무장현 선운사에 이르러 도솔암에  있는 석불의 배꼽을 떼고  그 비결을 내어 보려는 데, 그때 마침 뇌성벽력이 일어나므로 그 비결책을 못다 보고 도로 봉해두었다고 한다. 그 비결의 첫머리에 씌어 있으되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고 한  글자만 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후에도 어느 사람이 열어보고자 하였으나 벼락이 무서워서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1892년 8월 어느날, 손화중 접중에서는 석불 비결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책을 내어  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벼락이 또 일어날까 걱정이라고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이라고 하는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벼락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듣건대 그런 중대한 것을 봉할 때에는 벼락살이라고 하는 것을 넣어 택일하여 봉하면 훗날 사람들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내 생각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 일이 없으리라본다. (왜냐하면) 이서구가 열어볼 때 이미 벼락이 일어나 벼락살이 없어졌는데 무슨  벼락이 또 있겠는가.  또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는 법이니 여러분은 걱정말고 그 책임은 내가 맡아 하리라."

 

이리하여 청죽 수백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을 구하여 부계를 만들어 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내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절 중들의 방해를 막기 위해 미리 수십  명의 중을 결박하여두었는데, 일이 끝나자 중들이 관청에 이 사실을 고발하였다. 그날로 무장 현감은 각지의 동학군을 모조리 잡아들여 수백명이 잡히었다.

 

그 괴수로는 강경중, 오지영, 고영숙이 지목되었다. 무장 원님은  여러 날을 두고 취조를 하는데 첫 문제가 비결책을 들이라는 것이고, 손화중과 기타 주모자 두령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다. 갖은 악형을 다하면서 묻는다. 태장 질이며, 곤장질이며, 형장질이며, 주뢰질이며, 볼기가 다해지고 앞 정강이가 다 부러졌었다.

 

그러나 소위 비결이라고 하는 것은 손화중이 어디론가 가지고 가고 말았으며 여러 두령들도 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 수 없다. 하여 10여 일동안 형벌을 받다가 전라감사에게 보고되어 주모자 3인은 모두 강도 및 역적죄로 사형에 처하고 남은 100여 명은 엄장을 때리어 방송하였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1년 반 전의 일이다. 망해가는 나라의 쇠운과 일어서는 민중의 힘과 의지가 서려 있는 얘기이다. 그 비결책은 무엇이었을까? 있었다면 불경이 고작일 것인데 왜 이렇게 역적죄에까지 연루되는 사건으로 확대되었을까?  비결책은 분명 석불의 배꼽에서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빼꼽을 연 것은 비결책보다도 그렇게 하면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의 예언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양을 망하게 해야겠다는 동학군의 의지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바람이 있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는 증거가 여기 있다. 세월이 또다시 흘러  이 비결책에는 또 다른 길 없는 전설이 붙었다. 그 비결책이란 다름아닌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운사 암각여래상의 배꼽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서막을 장식할 위대한 전설을 갖게 되었으니 우리는 헛된  수고로움으로 그것을 논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