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11) 선운산의 천연기념물, 장사송 / 진흥왕의 전설이 담긴 진흥굴

모산재 2011. 3. 18. 10:56

 

선운사를 나와 도솔암으로 향한다.

 

장사송과 진흥굴, 도솔암과 마애불을 돌아보고 낙조대와 천마바위를 돌아서 내려올 예정이다.

 

 

산 골짜기를 따라 걷는 길 주변은 차나무와 꽃무릇 천지인데, 혹독한 한파를 견디느라 생기를 잃어버린 차나무잎과 골짜기를 파밭처럼 덮고 있는 꽃무릇 푸른 잎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맑고 따스한 기운 풍성히 머금은 햇살이 내리는 일요일이라 무리를 지어 산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볕이 잘 들어 눈과 얼음이 녹아 사라진 개울은 거꾸로 선 나무들 모습을 비추고 있다.

 

 

 

 

 

길을 따라 얼마간 걷다보면 나타나는 아담한 돌부처. 연꽃 대좌 위에 앉은 불상을 깊게 돋을새김하여 자연스럽게 감실 속에 자리잡은 모습이 되었다. 길가에 앉은 부처님을 보며 지나는 산객들은 더러 합장하고 잠시 불심에 젖는다.

 

 

 

 

 

그리고 도솔제라는 저수지로 오르는 왼쪽 골짜기와 도솔암으로 오르는 오른쪽 골짜기가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난다.

 

아래 안내 지도에서 붉은 선으로 표시된 등산로를 따라  가기로 한다.

 

 

 

 

 

그리고 금방 서늘한 눈이 아직도 두껍게 쌓여 있는 골짜기로 접어든다. 양지쪽 길은 눈이 녹아 질퍽거리지만 음지쪽 등산로는 미끄러운 눈길이다.

 

 

 

 

 

 

숲을 가꾸고 보호하고자 한 행위인지는 모르지만, 음지쪽 골짜기 등산로 주변엔 수십 년은 자란 듯한 다래나무 덩굴들이 대부분 밑둥치가 잘린 채로 감아올라간 나무에 매달려 그네를 타고 있다.

 

다래나무도 숲을 이루는 나무 가족이거늘, 숲을 해치는 나무로 인식하고 잘라내는 것이 안타깝다.

 

 

 

 

 

 

선운사에서 2km, 완만한 골짜기를 20여 분쯤 걸었을까. 도솔암이 가까워질 무렵에 길가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장사송과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전설이 있는 진흥굴을 만난다.

 

장사송은 잔디를 입혀 곱게 단장한 언덕에 여덟개의 굵은 가지를 하늘을 향해 펼치고 서 있고, 그 뒤로 보이는 바위절벽에 진흥굴이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다.

 

 

 

 

■ 천연기념물 제354호, 고창 삼인리 장사송

 

고창 사람들이 '장사송' 또는 '진흥송'이라고 부른다고 하는이 나무는 이 지역의 옛 이름이 장사현이아서 장사송이라 하고, 옛날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어서 진흥송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아 왔으며, 오래된 소나무로서 나무의 모양이 아름답고 생육상태가 양호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상 40cm 정도에서 가지가 난 흔적이 있어 반송(盤松)으로 취급한다.

 

 

 

 

나무의 나이는 약 6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23m, 가슴높이의 둘레는 3m 정도이다. 높이 2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셋으로 갈라지고 그 위에서 다시 여러 갈래로 갈라졌는데, 모두 여덟인 가지가 조선 8도를 나타낸다 하여 '팔도나무'라고도 한다.

 

 

 

 

나무 아래에는 검은 표석에 '장사송(長沙松)'이란 이름을 새기고 그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 남역의 고향 고창 땅 한 줄기 외로움 빛을 드리우고 천년을 하루같이 지낸 그 이름 장사송이여 백제 낭만에 그 정서어린 선운산가는 장사녀의 애달픈 사연이어라. 수자리 떠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지쳐 쓰러진 망부한의 숨결이 여기에 쓰였도다. 한 뿌리에서 여덟 가지로 뻗어 낙낙장생한 기품은 공교로이 이 나라 팔도의 지맥을 상징함과 수려한 산마루를 타고 오늘 이어온 그날잡목 속의 고행을 의연히 지켜온 고고청절은 위대한 손 삶의 요람이어라. 1986년 여름

 

 

백제의 노래로 이름만 전해지는 '선운산가'의 전설을 장사송(長沙松)과 관련시켜 놓았다. 하지만, 장사송의 나이가 600여 년 정도라는 걸 생각해 보면 1000년을 훨씬 넘은 '선운산가'와는 전혀 무관한 한낱 전설일 뿐이다.   

 

 

 

 

 

 

■ 진흥굴(眞興窟)

 

진흥굴은 장사송 바로 아래 낮은 바위 절벽에 있는 동굴이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물러난 뒤 중생 구제를 위해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입산·수도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좌변굴(左邊窟)' 또는 '열석굴(熱石窟)'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좌변굴은 진흥왕을 좌변왕이라 불렀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는데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

 

동굴은 길이 10미터, 높이 4미터쯤 되는데, 다듬어진 흔적이 별로 없어 진흥왕이 입산수도했다고 믿기에는 너무 평범하다.

 

 

 

 

 

 

1707년에 기록된 '도솔산 선운사 창수승적기(創修勝蹟記)'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린 첫 날 밤에 좌변굴(左邊窟; 진흥굴)에서 잠을 잤다. 꿈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참당사를 창건한 의운국사로 하여금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게 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는데, 이것이 선운사의 시초라고 한다. 진흥왕은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이 굴 윗 산에 중애암을, 그리고 만월대 밑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백제와 고구려를 압박하며 영토 다툼을 벌이기에 바빴고 심지어 554년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기까지 한 진흥왕이 당시 백제 땅인 이 곳을 찾아 수도하고 절을 창건했다는 전설을 어찌 믿을 것인가. 역시 전설은 전설일 뿐...

 

 

 

 

 

 

동굴 속에는 무속인들이 종종 거쳐 간 듯 그을음과 촛농 등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바위굴이긴 하지만 사람들의 잦은 발길로 흙먼지가 자욱하다. 

 

그래서 이 동굴의 원래 이름이 진흥굴이 아니고 진흙굴이 아니었을까, 조크를 하는 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