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9) 선운사 관음전, 영산전, 팔상전

모산재 2011. 3. 14. 13:41

 

대웅전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관음전(觀音殿)이, 서쪽에는 영산전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영산전 서쪽 ㄱ자로 꺾어진 축대 위에는 명부전이, 영산전 뒤쪽에는 팔상전과 산신각, 그 서쪽으로는 조사전이 있다.

 

 

 

 

■ 한때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셨던 관음전, 그리고 <석씨원류>

 

대웅전의 동쪽에 위치하는 관음전은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으로 된 맞배지붕 건물이다.

 

관음전은 이름처럼 관세음보살을 봉안한 건물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로 민중들에게 가장 친숙한 보살이다. 절에서 중심 법당으로 있으면 원통전이라고 부르고, 절의 부속 전각으로 있으면 관음전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이라고도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원래 이 건물은 스님방이었다. 원교 이광사가 쓴 '고요한 움집'이란 뜻의 '정와(靜窩)'란 현판을 달고 있던 이 집은 20여 년 전 (1992년) 관음전으로 개수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선운사를 처음 찾았던 1989년엔 '정와'라는 승방으로 있다가 얼마 뒤 관음전으로 개수되었는데, 2006년에 찾았을 때는 편액이 없는 채로 있었는데, 이번에 새로 낙성된 뒤엔 관음전이란 편액을 달아 놓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편액이 없이 '관음전'으로 불리던 이 건물에는 관음보살이 아니라 금동 지장보살(보물 279호)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장보살을 주존불로 모시면서 왜 지장전(또는 명부전)이라 하지 않고 관음전이라고 불렀을까? 아직도 선운사 홈페이지에는 관음전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작년 가을 관음전이 새로 낙성되면서 금동지장보살좌상은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지고, 관음전에 걸맞게 천수관세음보살이 주존불로 봉안되었다고 한다.

 

 

 

 

 

관음전에는 흔히 연화좌에 앉아 손에 연꽃이나 감로병을 들고 있는 관음상을 모시는데 선운사에는 천의 손길로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대자대비를 베푸는 천수관음을 모셨다. (관음보살은 오른손에는 버들가지를 쥐고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양류관음, 흰옷을 입고 흰 연꽃 가운데 앉아 있는 백의관음, 머리 위에 열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아수라도의 중생을 구제하는 십일면관음, 바다를 굽어보는 해수관음, >구름 속에서 용을 탄 모습의 용두관음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관음전에서 기억해야 할 문화재가 있다. 바로 <석씨원류>라는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석가모니 이후 서역 및 중국에서 불법이 전파된 사실을 기술한 목판 판책이다.

 

 

 

 

 

병자호란 뒤 인조 26년(1648)에 새긴 가로 39㎝ 세로 29.5㎝의 목판본은 원래 103매였으나 절반 가량이 망실되었다.(한때 유출되어 골동품으로 팔리기도 했다고 한다.) 50매 100판의 원판과 별도의 2매 4판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사라진 부분이 많아서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종 때(1673) 경기도 불암사(佛巖寺)에서 새긴 <석씨원류> 목판(보물 591호)이 온전히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불암사판은 400항에 걸쳐 각 항에 4자 1구로 제목을 붙이고 석가의 사적을 그림으로 그린 다음 그 다음 면에 내용을 서술하였다. 불암사판이 왼쪽 면에 글을 싣고 오른쪽 면에 그림을 둔 것과 달리, 선운사판은 위쪽에 그림을 배치하고 아래쪽에 글을 두어 보기 쉽게 하였다. 선운사판 <석씨원류>는 명나라 헌종의 <어제석씨원류서(御製釋氏源流序)>가 실리고, 이어 하호연(河浩然)이 지은 <석씨원류서>가 실려 있다. 하호연의 서에 의하면, 이 책은 사명대사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구해온 것을 인조 26년(1648)에 최서룡, 해운법사 등이 간행한 것으로, 불암사 판보다 25년이나 앞서 있다. 선운사에는 1486년 성종의 명으로 새긴 <석씨원류>가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1597년) 선운사가 본당만 남기고 모두 불타면서 <석씨원류>도 불타 버렸다고 한다.

 

 

 

 

■ 화려한 벽화로 가득한 영산전靈山殿)

 

큰절에는 대개 보이는 팔상전은 석가모니와 팔상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불상 뒤에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가 걸려 있어 팔상전을 흔히 '영산전'이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명부전이 곧 지장전이듯 팔상전이 곧 영산전인 셈...

 

그런데 선운사에는 특이하게도 팔상전과 영산전이 따로 있다. 대웅전 서쪽 2단 축대 위에 있는 영산전 뒤쪽에 팔상전이 따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1471년 처음 조성될 때는 2층 전각으로 1장 6척이나 되는 거대한 불상을 모시고 있어 이름이 '장륙전(丈六殿')이었는데, 정유재란으로 불타고 1614년에 중건하면서 단층으로 바뀌었다.

 

 

※ '고창군청 홈페이지에서는 <조선 숙종 39년(1713)에 태학, 태산 두 스님이 장육화신불(丈六花神佛)을 모시기 위해 이층으로 지은 각황전(覺皇澱)을 순조 21년(1821)에 고친 것이다.>라고 시기적으로 다른 내용으로 서술하고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설법한 모임을 그린 불화이다. 영취산은 석가모니가 꽃을 드니 가섭존자만이 그 뜻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는 염화미소의 공간이다. 석가모니 왼쪽에, 오른쪽에 제화갈라보살을 두고 그 좌우에는 16나한이 둘러앉아 영산회상의 도상은 <법화경> 신앙이 유행하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흔히 그렸다고 한다.

 

 

영산전에 봉안된 삼존불상은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불 좌상을 주존으로 아난과 가섭이 협시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3m, 협시보살의 높이는 2.4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며, 주존은 16각의 난간을 두른 목각연화대좌에 모셔져 있다. 양 협시보살은 화려하게 장식된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다.

 

 

 

 

 

이 불상에는 재미 있는 일화가 전한다. 단층누각에 원래 2층 누각에 모셨던 거대한 불상이 맞지 않아 한때 청담스님이 옮기려 하였는데, 불상에서 빛이 나와 주민들이 놀라 모여들면서 그대로 두자는 여론에 따라 그대로 모시기로 했다고 한다.

 

 

영산전에는 다양한 벽화들이 가득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촬영하지 못한 내부 벽화는 모두 24개에 달하는데, 달마대사를 비롯 여러 나한과 역사적 인물의 인연 설화를 표현했다.

 

특히 당나라의 전설적인 선승인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을 그린 '한산습득도(寒山拾得圖)'.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왼손으로 하늘의 달을 가리키는 한산과, 바위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습득을 그렸다.

 

한산은 습득과 함께 당나라의 선승 풍간(豊干)의 제자로 함께 절강성 천태산 국청사(國淸寺)에 드나들며 남루한 모습으로 주방에 들어가 다른 스님들이 남긴 밥을 먹었다고 한다. 한산은 ‘한암(寒巖)’과 ‘명암(明巖)’이라는 두 바위틈에서 살아 한산이라고 불렸고, 습득은 풍간선사가 길에서 울고 있는 버려진 아이를 국청사에서 데리고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유분방하고 광적인 기행(奇行)의 무위도인(無爲道人)이었던 이 세 사람을 '삼은사(三隱士)'라 부르고 한산의 시집에는 습득의 시 60수, 풍간의 시 6수를 포함 314수가 들어 있으며, 이들의 시를 '삼은시(三隱詩)'라 일컫는다. 한산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변신으로, 습득은 보현보살(普賢菩薩)의 화신(化身)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이들에 대한 일화만 일부 전해질 뿐 자세한 행장은 전해지지 않는다.

 

선비들의 글에서도 이 두 선승의 행적이나 선시(禪詩)가 즐겨 다루어졌고, 춘향전 등 국문소설에서 기생이나 중인들의 방 치장을 묘사하는 대목에 ‘한산습득도’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전각을 보수하면서 떼어낸 벽화는 영산전 내부에 그대로 소장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도 신축한 성보박물관으로 이관된 것으로 보인다.

 

 

※ 새로 단장한 영산전 외벽의 벽화들

 

 

 

 

 

 

■ 석가모니의 행적을 모신 팔상전(八相殿)

 

영산전 뒷편 또 하나의 석축 위에는 팔상전이 산신각과 나란히 서 있다. 팔상전은 석가모니의 행적 가운데 극적인 여덟 장면을 그림으로 나타낸 팔상도 탱화를 봉안하는 곳이다.

 

 

1706년의 중건 때 함께 봉안한 팔상 탱화가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현재는 1900년에 새로 조성된 팔상 탱화 중 6점이 남아 있다.

 

 

 

 

팔상전에는 석가여래좌상 1위만 모셔져 있는데, 근래에 새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본존 뒤의 후불 벽화 역시 1901년에 조성된 것이다. 후불벽화 양쪽으로 팔상도가 배치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표현하는 데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등이다.

 

 

 

 

 

팔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석가가 이미 보살육도의 행을 마치고 도솔천에서 염부주하생(閻浮洲下生)의 시기가 왔음을 천인중(天人衆)에 고하여 도솔천궁으로부터 흰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부인의 몸에 입태(入胎)하는 내용이 공통 그림 주제로 되어 있다.

<2> 비람강생상(毘籃降生相) : 마야부인이 룸비니공원에 출유(出遊)하여 그곳에서 태자 탄생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마야부인이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쪽 겨드랑이로부터 출생하시는 석가의 모습과 강탄 후 일곱 걸음을 옮겨,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고 왼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외치는 모습이 묘사된다. 또한 부처가 되리라 예언하는 모습이 표현되기도 한다.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태자가 유람을 나갈 때 동문에서는 노인을 만나고 남문에서는 병자를, 서문에서는 죽은자를, 북문에서는 비구를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인간세상의 무상과 출가한 사문의 수도생활의 고귀함을 깨닫는 장면이다.

<4> 유성출가상(瑜城出家相) : 궁을 버리고 출가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태자가 차닉(車匿, Chandaka)과 함께 백마건척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때 제천(諸天), 야차신(夜叉神)등이 와서 사족(四足)을 받들고 신중(神衆)들이 수종(隨從)하는 모습이 표현된다.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출성 후 십년 수행하는 모습의 그림이다. 태자가 말에서 내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칼로 자르고, 제석천이 태자의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받든다. 고행림(苦行林)에서 수행을 마친 다음 목욕하고 공양을 받는 모습도 표현된다.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 결가부좌한 석가 앞에는 각종의 무기를 든 마군과 칼을 든 마왕 파순(波旬)의 모습이, 또 한편에는 마군 퇴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석가가 인간에서 부처가 되는 획기적인 순간으로, 도설(圖說)의 의미가 크다.

<7>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이는 부처 성도(成道) 뒤에 처음으로 녹야원(鹿野苑)에서 설법하게 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설법하는 부처와 그 주위에는 협시보살과 보살중(菩薩衆), 천중(天衆), 외호신중(外護神衆)들의 모습이 묘사된다.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부처가 구시나가라(拘戶那竭羅) 쌍수림(雙樹林) 아래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이다. 주위에는 비탄하고 있는 비구상, 합장한 보살상, 외호(外護)하고 있는 신중상(神衆像)이 묘사된다. 육신은 없어졌으나 남긴 법이 영원함을 나타내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