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7) 선운사 부도밭 백파율사비, 백파와 추사의 서한 논쟁

모산재 2011. 3. 10. 14:01

 

일주문을 지나면 도솔천 개울을 따라 절집까지 이어지는 호젓한 길로 접어든다. 

 

오른쪽으로는 울창한 전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 숲속에는 꼭 들러보아야 할 부도밭이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도밭'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 년 전에 찾았을 때와는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다. 그냥 넓은 땅에 자연스레 늘어서 있던 부도들이 새롭게 다진 터에 위치가 조정되어 정비되었고, 주위에는 흙돌담에 일각문까지 세워 격을 갖추었다. 그야말로 부도전(田)이 부도전(殿)으로 탈바꿈했다.

 

 

 

 

 

 

 

 

이곳 부도밭은 추사 김정희가 백파선사를 기리는 글을 새긴 백파율사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부도밭이 많이 찾는 것도 바로 이 백파율사비가 있기 때문이다. 

 

 

비석의 주인공인 백파 긍선(白坡 亘璇 : 1767~1852) 스님은 바로 이곳 고창 무장에서 태어나 12세 때 "한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모두 천상에 난다"는 말을 듣고 효심으로 출가하여 이곳 선운사에서 중이 되었다. 그는 조선조의 억불정책 속에서 오랜동안 침체되었던 조선 후기 불교에 참신한 종풍(宗風)을 일으킨 화엄종주라 평가 받는 스님이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밝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추사의 비문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비문의 마지막 부분이 추사 글씨가 아니라는 것과, 백파가 쓴 <선문수경(禪門手鏡)>을 둘러싸고 선운사의 백파와 대흥사의 초의, 그리고 이어지는 백파와 추사의 서한 논쟁은 흥미를 끌고도 남는다.

 

 

 

 

 

그런데 이곳에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이자 조계종 통합종단 2대 종정을 지낸 청담스님의 사리탑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문 듯하다. 청담스님은 입적하며 사리 8과를 남겼는데 그의 사리탑은 만년에 머물렀던 서울 도선사 외에도 옥천사, 문수암, 그리고 이곳 선운사에도 조성되어 봉안되었다.

 

청담스님의 부도는 부도밭의 앞쪽 가운데 있던 백파율사비의 오른쪽에 있었는데, 5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백파율사비는 철거되고 놓여 있던 흔적만 또렷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백파율사비가 있던 자리에는 그 모조품이 세워져 있다. 추사의 글씨가 새겨진 비가 워낙 많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훼손의 우려가 있어서 선운사 경내의 성보박물관으로 옮기고, 대신 그 자리에 약간 작게 축소하여 만든 모조비를 세워 놓은 것이다.

 

나중 진본 백파율사비를 보러 성보박물관을 갔더니, 글쎄 문이 닫혀 있지 않는가.(사람들이 많이 찾는 계절에만 문을 연단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쉽기는 하여도 모조 비석으로나마 추사의 글씨와 문장을 거칠게나마 감상하기로 하자.

 

 

 

 

 

 

추사가 이 비문을 쓴 시기는 그가 타계하기 1년 전이다. 추사체로서 절정의 미적 감각이 나타나던 글씨로서 비석의 앞면에는 엄격함과 방정함이 느껴지는 해서체로 힘차며, 뒷면에는 변화무쌍하고 자유분방한 행서로 활기차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이 비문에서 추사의 글씨가 아닌 것이 있다는 지적을 유홍준이 하면서 세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유홍준이 지적한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비석 뒷면에 새겨진 비문 마지막 줄의 글씨는 앞의 일곱 줄의 글씨와 행간의 간격이나 조형성에서 확연히 다르다. 추사의 글씨는 빽빽한가 하면 시원하게 트이고 자간 간격이 자유자재롭고 운필 또한 힘차면서도 활달하고 변화무쌍한 맛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줄은 어떠한 법첩을 놓고 임서한 것처럼 틀에 짜여진 듯하고 자간의 간격도 빽빽하여 답답하다. ‘不’자와 ‘可’자 등의 가로획을 보아도 추사는 날카로운 골기가 잡혀있는 반면 마지막 줄의 글씨는 부드러우면서도 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추사가 비문을 써놓은 지 3년 뒤에야 비를 세운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이 추사체와 비슷하게 모방하여 썼을 것으로 본다. 비문은 추사가 타계하기 1년 전인 1855년에 썼는데,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858년(무오년)이다. 따라서 비문의 글씨 중 무오년을 나타내는  '숭정기원후4 무오5월 일립(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 日立)'이라는 글씨는 추사가 쓴 것이 아님이 분명하고,  '완당학사 김정희'라는 글씨도 추사체를 흉내내 쓴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 이게 바로 진짜 백파율사비이다. (출처: 문화재청)

 

 

 

 

 

백파율사비의 정식 비명은 추사가 이름 붙인 '화엄종주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波大律師 大機大用之碑)'이다.  '화엄종주 백파대율사'란 말의 뜻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백파 스님은 그야말로 조선 말기 화엄종을 중흥시킨 큰스님이니까. 

 

 

그런데 '대기대용(大機大用)'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 아마도 백파스님의 평생 화두였을 이 어려운 말의 뜻을 수박 겉핥기로나마 알아 보기로 하자.

 

'대기(大機)'는 불교에서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들을 만한 자질이나 그 자질을 갖춘 사람'을, 대용(大用)은 '크게 작용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대기대용'을 '해와 달의 운행, 밤과 낮의 교체, 사시의 변천, 풍운우로상설(風雲雨露霜雪)의 조화 등 우주의 작용과 조화' 또는 이에 비유해서 '대각도인의 심신작용을 대기 대용'이라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유홍준에 따르면 백파는 대기를 '마음의 청정함(佛)'으로 대용을 '마음의 광명(法)'으로 보아, 그 청정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道)을 대기대용으로 생각했다고 본다. 말하자면 깨달음이 원숙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유자재(自由自在)한 경지를 일컫는 말로 보아도 될 것 같다.  

 

 

 

이제 추사가 백파를 추모하고 찬하여 쓴 비문의 내용은 무엇일까 보기로 하자.

 

 

 

 

 

 

비석에 쓰인 내용을 그대로 풀이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는 근래에 율사(律師)로서 일가를 이룬 이가 없었는데 오직 백파만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고로 여기에 율사라고 적은 것이다.

대기대용(大機大用), 이것은 백파가 80평생 가장 힘들인 곳인데 혹자는 기용(機用)과 살활(殺活)을 지리하고 억지스럽다고 하지만 이는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보통사람들을 대치함에 어느 것이나 살활과 기용 아닌 것이 없으니, 비록 8만대장경이라고는 하나 어느 것 하나 살활과 기용에서 벗어나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뜻을 모르고 허망하게 살활과 기용을 갖고 백파가 고집했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하루살이가 느티나무를 흔들려는 격인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백파를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번 왕복서한으로 변증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헛되이 의논하는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하여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백파의 비문을 지으면서 만약 대기대용 이 한 구절을 뚜렷하게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백파로서는 부족하다 할 것이다. 설두, 백암, 등 문도들에게 이것을 써주면서 과로(果老: 과천에 사는 노인이라는 뜻의 추사 별호)는 다음과 같이 부기하노라.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기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랴.

완당학사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이 비석에 얽힌 사연이나, 추사와 백파의 서한 논쟁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전문가의 글을 직접 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파의 저서에 대한 초의선사의 태클에서 추사로 이어지는 논쟁이 흥미진진하다고 느끼면서 두 분의 글 일부를 아래에 <더 보기>로 인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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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와 초의, 백파

 

추사 김정희(1786-1856)와 초의(1786-1866)선사와는 동갑이고 절친한 친구였다. 초의는 불교는 물론 유학과 도교까지 섭렵하였고 그 시대에 정약용, 신위, 등과 교류하고 차 문화를 일으켜 ‘동다송’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추사 또한 초의선사에게 차를 배웠고 초의가 보내주는 차를 가장 좋아했으며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를 자주 하기도 하였다.

추사는 제주도로 귀양 갈 때도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날 정도였으며, 초의 또한 귀양 간 추사를 제주도까지 가서 만나고 왔으니, 가히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 가면서 대흥사에 들렸을 때, 대흥사에는 자연과 조화가 되는 서체를 구사한 원교 이광사 선생의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무량수각(无量壽閣)’ 현판글씨를 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추사는 5천권의 책이 자기의 소매 속에 들어있다는 오만 방자함이 남아있었다. 그리하여 원교가 쓴 두 현판을 “형편없다.”고 떼어버리게 하고, 그 자리에서 자기가 직접 써 주며 달게 하고 제주도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그 뒤 추사는 9년여 동안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그의 모난 성격을 뉘우치고, 인격적인 수양을 쌓으면서, 전에 폄하했던 원교 이광사와 창암 이삼만의 글씨도 인정했을 것이다. 그는 귀양이 풀려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제일 먼저 대흥사의 초의선사에게 들려 원교의 현판부터 찾았다. 다행이 둘 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추사는 자기가 쓴 두 현판을 때어내게 하고 본래대로 원교의 현판을 걸도록 하였다. 대웅보전’ 현판을 걸고 ‘무량수각’ 현판을 때려고 하는 순간, 추사는 초의에게 “신(新) 구(舊)가 후세 사람들에게 비교 되는 것도 무던하지 않는가. 내 것도 하나쯤은 남겨 놓았으면 하네만”이라고 부탁하여, ‘무량수각’은 그대로 남겨 놓았다. 무량수각(无量壽閣)의 무자가 없을 무(无)자다. 없을 무(無)자와 같은 뜻인데, 추사는 无자는 애초부터 없는 것을, 無자는 있다가 없는 것으로 구분하여 썼다.


또한 초의선사와 선운사의 백파선사와 추사 김정희와의 삼각관계에 얽인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백파선사(白波禪師)는 선문수경(禪文手鏡)에서 선(禪)만이 깨달음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유인 즉 ‘세상에서라면 불완전한 스승도 용납될 수 있지만 진리의 세계에 있어서는 용납될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다시 말하면 애초에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지 못하는 스승을 만나면 영영 깨치지 못한다는 얘기다.

이에 초의선사는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며, "깨달으면 교(敎)가 선(禪)이 되고 미흡(未洽)하면 선(禪)이 교(敎)가 된다." 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그게 바로 선(禪)을 넷으로 나누어 구분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다. 이는 위에 말한 서산대사의 말씀에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하는 추론을 해본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 초의와 절친한 벗이자 불교에 박식함이 있는 추사 김정희가 끼어들어 백파(白波)와 불꽃 튀는 논쟁을 벌려 추사와 백파의 여러 번에 걸친 왕복서한(往復書翰) 논쟁은 그 당시 유명하였다. 특히 추사는 백파의 논지(論旨)가 잘못되었다면서 15가지로 일일이 논증(論證)한 ‘백파망증15조(白波妄證 十五條)’에서 오만 방자한 말투로 백파와 그 문도(門徒)들을 힐난하였던 것이다.

추사와 백파의 관계는 이렇게 치열한 논쟁(論爭)을 벌인 관계였으나, 9년간의 귀양살이를 하면서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쳐, 추사가 69세(1855년)에 쓴 백파비문(白波碑文)을 보면 공손함과 스님에 대한 존경이 극에 달해 완연히 다른 감정을 보여주었는데, 그 비문(碑文)은 선운사 성보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다.

-이명철 '대흥사에서 느껴보는 초의선사의 숨결'(http://cafe.daum.net/highculture/)에서

 

 

 

※ 백파와 초의, 추사의 논쟁

 

아무런 예비지식 없이 선운사를 찾는다면 그냥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이 절집의 최대 명물, 그래서 나 같은 사람으로 하여금 몇 번이고 여기를 찾게 하는 것은 추사 김정희가 쓴 백파선사의 비문이다. 매표소 오른쪽 전나무숲 안쪽의 부도밭 한가운데 남포오석으로 된 백파선사의 비가 서 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고 싶어하는 바람에 절에서 콩기름을 매끈매끈하게  발라놓아 멀리서 보아도 반짝이는 것이 조금은 눈에 거슬렸는데 올해(1991) 가 보니 그 콩기름들이 다 떨어져나가 다시 제 모습을 찾았다.

비석의 앞면에는 엄격한 규율을 느끼게 하는 방정한 해서체의 힘찬 필치로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 씌어 있는데, 나는 세상 사람들이 추사체를 일러 '웅혼한 힘'을 보여준다고 표현한 것을 여기서 처음으로 실감하였다. 또 혹자가 말하기를 추사가 글씨를 쓸 때는 마치 "송곳으로 강판을 뚫는 힘"으로 붓끝을 강하게 내리꽂았다고 한 것도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뒷면에는 추사가 이 비문을 지으면서 왜 백파를 화엄종주라고 했고, 대율사라고 불렀으며 '대기대용'이라는 말을 꼭 써야 했는가를 풀이한 비문과 그분의 삶을 기리는 명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다. 울림이 강하고 변화가 많은추사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행서 글씨는 추사 말년의 최고 명작으로 평가되는 금석문이다.

최완수씨는 추사가 타계하기 1년 전인 1855년에 쓴 것으로 고증하고 있는데, 이 비가 세워진 것은 추사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858년이었다. 따라서 비문의 글씨 중 "숭정기원후4무오5월 일입"이라는 글씨는 추사의 글씨가 아닌 것이 분명하고, '완당학사 김정희'라는 글씨도 누군가에 의해 새로 씌어진 것이 분명한데 이 글씨 또한 추사체 비슷하게 되어있다. 그러니까 자세히 보면 추사의 글씨와 추사체를 모방한 글씨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엿볼 수 있으니 그 비교의 시각적 훈련은 우리가 글씨의 안목을 키우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 백파 비문이기에 나는 그것의 탁본을 여러 벌 구하여 내가 귀한 선물 할 때가 있으면 족자로 만들어 보내고, 지금 내 연구실에도 앞뒷면 탁본 족자가 걸려 있어 항시 보고 즐기며  배우는 바가 되었다.

그런데 언젠가 지곡서당의 청명 임창순선생을 찾아 뵙고 밤늦게까지 바둑 서너 판을 둔 다음 이런저런 담소 끝에 백파비문 얘기가 나왔는데 선생님은 내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자네 그 비문 중에 추사글씨 아닌 곳이 있는데 아는가?"
 "그럼요, 완당학사 김정희와 건립일자요."
 "그것말고 또 있네."
 "그래요?전혀 몰랐는데요. 무슨 글씬가요?"
 "가서 잘 보게. 자네면 알 수 있을걸세."
 "탁본을 매일 보면서도 몰랐는데요. 무슨 글씬가요?"
 "지금 생각이 잘 안 나는데, 그건 찢어지거나 무슨 사정이 있어서 우봉 조희룡 같은 이가 대필한 것이 분명해." 

 이튿날 지곡서당을 떠나 나는 곧바로 내 연구실에 와서 탁본을 다시 훑어 보았다. 아뿔사! 비문의 마지막 줄에 쓰인 비명의 글씨들은  추사의 글씨가 아니었다. 추사체로 쓰인 듯싶지만 획의 구성과 붓의 놀림이 과장되고 어지러운 구석이 있다. 행간의 구사도 전혀 아니올시다이고 아닐 '불'자를 본문과 비교해보니 더욱 그렇다. 10년을 보면서도 모른 것을 선생의 가르침 한마디로 알 수 있게 된 것이 부끄러운 것인가. 기쁜 것인가? 세상에 안다는 것, 본다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높이는 것은 "좋은 작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보는 것"이라는 말을 더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올 겨울 선운사에서 나는 시 쓰는 황지우를 만났다. 나는 지우를  데리고 백파비에 대해 내가 아는 바를 설명했더니 저 감수성 예민한 시인은 이리저리 보면서 신기한 듯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우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지우야, 나는 이 비를 볼 때마다 추사보다 더 위대한 것은 석공의 손끝이었다고 생각한단다. 글씨 획의 강약 리듬에 맞추어 힘준 곳은 깊이 파고 흘러내리듯 그은 것은 얕게 새겨 추사체의 울림을 남김없이 입체화 시켰잖니."
지우는 내 말이 떨어지자 비문을 다시 만지면서 음미해보고, 멀찍이 떨어져 느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파비를 떠나 우리가 다시 전나무숲을 걷게 되었을 때 지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엔 고수가 많아요, 잉. 형님, 그래도 나는 추사가 석공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네요. 석공은 입면에 리듬을 새겼지만 추사는 그것을 평면화 했잖아요."

 

 

 

※ 백파와 추사의 선 논쟁

 

 백파(白坡:1767~1852)스님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18세 때 선운사의 중이 되었다. 출가의 동기는 "한 자식이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모두 천상에 난다"는 말을 듣고 그런 효심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한다. 백파는 23세 때 지리산 영원사의 설파(1707~1791)스님을 찾아가 스승에게 구족계를 받아 율종(律宗)의 계맥을 이어가며, 50세 때 <선문수경(禪文手鏡)>을 지어 당시 불교계에 일대 논쟁을 일으키게 된다.

백파의 선 사상은 선종의 제 8대조인 마조(馬祖:709~788)에서 본격적으로 제창되어 제11대조 임제(臨濟:?~867)에 이르러 크게 일어난 조사선(祖師禪) 우위사상에 입각한 정통성의 확립이었다. 백파는 임제선사가 확실한 개념규정 없이 제시한 임제삼구(臨濟三句)에 모든 교(敎). 선(禪)의 요지가 포함되었다고 보면서 임제삼구의 내용에 따라 선을 의리선(義理禪), 여래선(如來禪), 조사선(祖師禪)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백파는 마음의 청정함[佛]을 대기(大機), 마음의 광명[法]을 대용(大用)이라 하고, 그 청정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道]을 기용제시(機用濟施)라 생각했으니, 이 역시 임제선사의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백파스님은 조사선에서는 대기대용이 베풀어지면서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작용하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백파가 <산문수경>을 세상에 내놓자 이에 맞서서 반박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草衣: 1786~1866)선사였다. 초의는 실학(實學)의 불교적 수용자라고 지칭되는바, 그는 교(敎)와 선(禪)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입각처가 선이면 조사선이고, 교면 여래선으로 된다면서 "깨닫으면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이라하여 초의는 선을 넷으로 나누어 조사선과 여래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으로 구분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펴내었다.

이 논쟁의 와중에 초의의 절친한 벗이자, 해동의 유마거사라고 불교의 박식함이 칭송되고 있던 추사 김정희가 끼어들어 백파와 한판의 불꽃 튀는 논쟁을 벌이게 된다. 추사가 백파의 오류를 적어 보낸 편지에 대하여, 백파는 13가지로 논증한 답신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추사는 다시 백파의 논지가 잘못됐음을 15가지로 일일이 논증했으니 이것이 유명한 <백파망증 15조(白坡妄證十五條)>이다. 추사와 백파의 이 왕복서한 논쟁은 금세기초 루카치와 안나 제거스여사의 표현주의 논쟁에세 보이는 바와 같은 박진감이 느껴지는데, 추사의 오만 방자한 말투는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바가 있다.

.....이제 또 스님의 소설(所說)이 이와같은 것을 보니 선문(禪門)의 모든 사람들은 자고 이래로 거개가 다 무식한 무리들뿐이라 더이상 이렇고 저렇고 따질 거리가 못 되니 내가 이들을 상대로 그렇고 저렇고 따지는 것이 철부지 어린애와 떡다툼 하는 것 같아서 도리어 창피하도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妄證) 제1이오.

심지어는 정자(程子) 주자(朱子) 퇴계 율곡의 학설을 원용하여 유불(儒彿) 비유를 일삼으나 무엄하고 기탄없음이 이와 같은 자를 일찍이 보지 못하였노라. 이는 곧 개소리 쇠소리를 가지고 함· 영· 소· 호 (咸英韶濩)의 율음(율음)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격이니 진실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2요.

....또 스님은 육조(六祖)의 구결(口訣)을 여기저기서 닥치는 대로 망증하여 무식한 육조(혜능)를 유식한 육조로 만들어놓았으니 육조인들 그 어찌 마땅히 여기랴?...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5요.

....원효, 보조가 대혜서(大慧書)로 벗을 삼았다고 말했으나 그 어느 책에 이런 말이 써 있던가? ...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 6이오.

선문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경전이 번역된 것만을 다행히 여기고 원본과 대조함이 없이 장님끼리 서로 귀띔하듯이 내려오던 그대로 통째로 받다들여 무조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지만 ...번역이란 이렇듯 무조건 믿을 것이 못 되거늘 스님같이 무식하고 경솔한 무리들은 다만 캄캄한 산 귀신 굴속에 떨어져 다만 입으로만 지저거려내며 사설(邪說) 망증을 일삼지 않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10이오.

스님은 매양 80년 공을 쌓은 나인데 그 누가 나를 넘어설 자가 있느냐고 호언장담하더니 그 공 쌓은 것이 겨우 이것이냐? 내 묻노니 심안상속(心眼相屬)이란 무슨 뜻이뇨? .. 아무런 심증도 없이 이것저것 주워 보태서 입으로만 지껄이는 그 꼴이 점점 볼 만하도다. 이것이 스님의 망증 제12요.

논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인하무인격으로 남을 이렇게 사갈시 할 수 있다는 추사의 뻔뻔스러운 대담성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백파가 추사에게 보낸 편지는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전하는 말로는 망증 15조를 읽은 백파는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고 덤비는 꼴"이라고 가볍게 받아넘겼다고 한다. 확실히 속인보다 스님 중에 고수가 많다. 사실 이쯤 되는 것이 구단(九段)의 경지가 아닐까?
그런데 고형곤(高亨坤)박사는 일찍이 추사의 <백파망증 15조>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추사의 해박한 고증학적 비판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추사가 오히려 망증한 것도 다수 지적하며 결론을 이렇게 맺었다. 고형곤 박사도 고수다웠다.

망증 15조는 무승부.

백파스님은 <산문수경> 이후에도 수많은 저술을 남기고 쇠잔한 불교계에 활력을 넣어주며 지리산 화엄사에서 1852년 세수 86세, 법랍 68년으로 세상을 떠났다.

백파와 초의의 논쟁은 그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초의의 <선문사변만어>는 제자인 우담(優曇)스님의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으로 나왔고, 백파의 제자인 설두(雪竇)스님은 <선원소류(禪源遡流)>를 내어 백파의 설을 보완하니 또다시 초의 쪽에서도 축원(竺源)스님이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펴내었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한국사상사에서 이처럼 빛나는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추사의 백파비문을 보면 그가 56세에 쓴 <백파망증 15조>와는 완연히 다른 자세를 보여준다. 그 글의 공손함과 스님에 대한 존경이 가히 심금을 올리는 내용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죽은 자 앞에서 보여준 겸허 때문이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추사 김정희는 9년에 걸친 제주도 귀양살이의 아픔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위인이었다. 귀양가기 전의 그의 오만함은 그가 원교 이광사의 글씨에 대하여 매몰차게 썼던 <원교서결후(圓嶠書訣候)>에도 여실히 보였었다. 그러나 추사는 해배되어 돌아온 후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게 된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일대 반전(反轉)을 이룬다. 그러니까 추사가 인생과 예술에서 그야말로 달인(達人)이 된 시점, 타계하기 1년 전의 글이기 때문에 이 백파비문은 추사체의 진면목일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에서도 대표적인 글로 꼽히는 것이다. - 이상,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