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산하와 문화재

고창 (4) 고창읍성(모양성) 동헌(평근당)· 내아-객사(모양지관)-등양루

by 모산재 2011. 3. 7.

 

 

풍화루(豊和樓)에서 오른쪽(서쪽) 언덕으로 올라서면 읍성의 중심 관아인 동헌과 내아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객사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과 객사가 있는 언덕은 서쪽 응달이라 하얀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다. 솔숲 사이로 오후의 서늘한 산바람이 불어내리고 있는 길을 오르노라니, 언덕길 옆으로 우물이 하나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우물은 아마도 동헌과 내아 전용 우물로 사용되었으리라. 읍성 안에는 모두 네 개의 우물이 있는데, 전시에는 주민들이 성 안으로 들어와 기거하며 싸울 수 있도록 대비해 놓은 것이다.

 

 

 

 

 

우물을 돌아 언덕을 오르자 금방 눈 쌓인 넓은 마당이 나타나고 동헌과 내아가 나타난다. 야트막한 산언덕을 배경으로 전망 시원한 곳에 앉은 뽄새가 아름답다.

 

 

 

 

 

고창읍성 동헌은 1988년, 내아는 1989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정면에는 평근당(平近堂)이라는 당호를 달았는데,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 담겨 있다. 평근당(平近堂)은 조선 중기의 문신 송국사(1612∼1690)가 고창현감으로 있던 1669년 동헌 옆에 별당으로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더보기
※ 송국사(宋國士, 1612∼1690)에 대하여

  

송국사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계담(桂潭), 본관은 은진이다. 군수 송남수의 손자이며 장령 송희진의 장자이다. 7세에 효경을 통독하였고, 9세에는 소학을 밝게 풀어내어 조부의 지극한 사랑을 받기도 하였으며, 15세에 이르러서는 6경을 독실하게 배웠다.

 

그는 일찍이 기상이 출중하고 도량이 활발하였고, 효성과 우애가 뛰어났으며, 대의에 밝아 언행에 실수가 없었다. 장성해서는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송시열·송준길과 교유하였다.

 

1651년(효종3)에 천거로 사산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직첩에 청국의 연호가 씌어 있었으므로 벼슬을 사양하였고, 또 그후 선공감역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그후 그는 송시열·송준길이 관직에 나가기를 특별히 권하므로, 1666년(현종7)에 사포서 별제로 옮겼다가, 다시 사헌부 감찰 겸 전중어사로 전임되었다. 이 때 그는 매사를 명백하고 바르게 잘 처리하였으므로, 조정이 다 그를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위법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종은 "송감찰이 어사가 된 후로는 온 조정이 하나도 영을 위반하고 법을 범하는 자가 없으니 참 어사답구나" 라고 칭찬하면서 친히 그에게 사경을 내리시고 그가 다른 곳으로 전임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하교를 내린 바도 있었다. 그리하여 송국사는 3년 동안이나 다른 관서로 전임되지 않았다.

 

그후 58세가 되던 해(1668)에 이른 바 칠문사건(그는 남인으로서 횡포가 심했던 오시수·김덕원·목내서 등의 대문에 먹칠을 한 사건)으로 인하여, 이들의 모함을 받아 이듬해 고창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그리하여 1671년까지 2년 4개월 동안 고창현감에 재임하였는데 재임 중 정사를 잘 보살펴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라고 송시열이 지은 평근당기에 나타나있다.

 

평근당은 그가 고창 현감으로 부임한지 3개월 만인 1669년(현종10)에 동헌 옆에 세운 별당인데 그 후 훼손되어 없어졌던 것을 1988년 정부에서 이를 복원하고 <평근당>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후손들이 송시열이 지은 기문을 다시 새겨 달았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듬해인 1671년에 감찰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회덕의 계담(대덕구 신일동)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지냈다. 이곳에는 일찍이 그의 외증조 정복시(호는 계담)가 계담대를 세웠던 곳이었으나, 그것이 허물어진 후인데 송시열은 새로 지은 이 정자를 '풍월정' 이라 이름하였다. 송국사는 여기에서 송시열·송준길 등과 더불어 음영의 즐거움을 함께 하였다.

 

송국사는 1675년 봄에 송시열이 귀양가고, 송준길의 관작이 추탈되자, 그의 장자(송규림)로 하여금 송시열을 호종케 하였고, 또한 1677년 여름에는 이들에게 더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송규렴에게 상소를 올리도록 하였다. 1681년, 여름에 이르러서는 동춘의 관작이 회복되고 치제가 하사되었으며, 우암도 풀려나게 되었다. 1689년(숙종15)에는 우암이 세상을 뜨자 송국사는 망극함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고, 아들을 급히 정읍으로 보내어 우암의 상여 길을 호위하도록 한 바 있다.

 

그는 집안 행실이 지극히 갖추어져서 효성과 우애로서 이름이 나 있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 있어서도 뛰어났는데 그가 남긴 시문의 일부는 『계담유고』에 수록되어 현전하고 있다. 송국사는 1690년(숙종16)에 7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대전 동구 이사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조 13년에 통훈대부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기주관에 추증되었다.   <출처 : http://ddcc.or.kr/htm/man-031.htm >

 

 

 

현판 글씨는 석전 황욱의 글씨다.

 

 

 

 

 

동헌(東軒)은 고을 사또가 업무를 보는 곳이다.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조선시대 목 ·부 ·군·현 등 지방 행정 단위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다.

 

예전에 찾았을 때에는 동헌 마당에는 곤장을 치는 형구가 놓여 있어서 사람들이 곤장 맞는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치원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고창읍성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스러운 건물이 내아(內衙)일 것이다. 살림하는 안채에서 ㄱ자로 달아낸 낭만 공간 누마루. 그 곁에 황룡이 꿈틀대는 듯한 아름드리 적송이 호위하듯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다. 그 누마루 위에 올라 앉으면 고창읍성 풍경이 한눈에 시원스레 들어온다. 사대부가의 위엄과 풍류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멋진 공간이다. >

 

이곳을 찾을 때마다 저 누마루에 막걸리 한 상 차려서 잠시 수작을 즐기면 좀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십 수년 전 찾는 이가 뜸하던 시절,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그런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한다.  

 

 

 

 

 

동헌을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누어 수령의 집무처를 외동헌, 수령의 살림집으로 내동헌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외동헌을 동헌, 내동헌을 내아(內衙)라고 불렀다.

 

 

 

 

 

 

동헌에서 다시 남쪽 산 언덕길을 조금 더 오르면 고창객사, 모양지관(牟陽之館)이 나타난다. 1991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객사는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아의 하나이다. 객사의 가운데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다. 그리고 동서 양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객사를 지나 서쪽 능선 위를 올라서면 고창읍성에서 또 하나의 볼거리인 맹종죽이라는 울창한 대숲이 나타난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밀림의 대숲에 들어서면 그 청정한 기운에 온 정신이 세탁이라도 된 듯 맑아진다. 짙은 대숲이 만들어주는 은밀한 분위기에 연인들이 많이 찾는다. 사춘기 아이들의 짓이겠지. 매끈한 대나무 줄기에는 자신과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 사이에 하트를 그린 낙서를 만껏 해 놓았다.

 

맹종죽은 중국 원산으로 지름이 20cm나 되는 가장 크고 굵은 대나무다. 죽순을 먹기 때문에 죽순대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 남부지방에서 재배한다.

 

 

 

 

  

맹종죽 숲을 지나 남쪽 방향으로 오르노라면 가장 높은 곳에 서낭당이 나타난다. 서낭당은 일부가 무너져 안내판까지 끼고서 지지물로 받치고 있는 모습이 험하다.

 

서낭당을 넘어서면 남쪽 산허리를 두르고 있는 성곽이 나타난다.

 

성곽 위의 길을 따라 걷다가, 성벽 바깥을 도는 길에 이정표 비슷한 표석들을 발견한다. 수m쯤 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저 돌들은 무엇인가...?

 

 

 

 

 

돌들에는 고을 이름이 포함된 '무장시茂長始)', '무장종(茂長終)'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알고보니 이곳 산성쌓기에 참여한 고을의 성 쌓기 시작 지점과  끝나는 지점을 표시한 것이라 한다. 일종의 공사 실명제, 그리고 책임 구역제랄까... 성벽에는 축성에 참여했던 고을 이름과 축조 연대(1450년~1453)가 새겨져 있는데, 글씨가 일부 훼손되어 1997년에 표석으로 세운 것이라 한다.

 

 

 

김제, 용안, 정읍, 진안, 장성, 고부, 고창, 용담, 옥구, 영광, 무장, 능주, 태인, 흥덕, 순창 등의 지명이 새겨져 있고, 담양, 함평, 나주, 제주 주민까지 동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참여한 고을은 전라도와 제주를 아우른다.

 

성곽은 야트막한 야산을 이용하여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지고 바깥쪽만 석축으로 쌓은 것이라고 한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이어지는 성곽길로 들어선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끼고 완만히 오르는 벨트와 같은 석성, 동문 등양루(登陽樓)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옹성의 곡선이 조화를 멋진 조화를 이룬 풍경은 고창읍성에서 가장 아름답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꼽힌 길이다.

 

 

 

 

 

동문의 이름은 등양루(登陽樓)

 

 

 

 

 

등양루는 답성놀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곳이다.

 

돌을 머리에 인 여인들이 북문으로부터 동쪽 성곽길을 오르다  등양루 문루에 올라 창문을 세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한다고 한다.

 

성 안이 극락을 상징하는지라 여섯 곳의 치성에서는 백지에 한줌 씩 싸 가지고 온 오곡을 조금씩 퍼놓고 "저승길 노수요." 하고 합장하고 삼배를 올린 뒤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노수(路需)=노자((路資)>

 

 

 

 

 

동문에서 다시 북문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고창읍성 산책길은 끝난다. 성의 북쪽으로는 고창 읍내 풍경이 펼쳐진다.

 

 

 

 

 

산성길에서 내려다본 북문 공북루 주변 풍경. 건너편으로 향청이 보이고, 가까운 곳에 둥근 돌담에 둘러싸인 옥(獄)이 보인다.

 

 

 

 

 

 

북문 바깥으로 펼쳐지는 고창 읍내. 가까운 곳에 동리국악당과 신재효 고택, 그리고 판소리박물관이 보인다.

 

 

 

 

 

고창읍성의 유명한 성밟기놀이(답성놀이)는 이곳 북문에서 시작한다. 북문은 고창사람들에게는 극락문으로 인식되고 있는 문이다.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을 간다는 전설이 있는 답성놀이. 여인들은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을 돈 다음 그 돌은 성곽 입구에 쌓아둔다. 이런 풍속은 겨울을 지나면서 허물어진 성벽을 다지고, 또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 무기로 쓰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다. 지역을 방위하려는 목적이 풍속으로 승화한 셈이다.

 

성밟기는 윤달(특히 윤삼월)이 좋다고 하는데,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등 여섯 수가 든 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밟기를 한다고 한다. 그러나 행사로는 음력 9월 9일에 열리는 모양성제 때에 한다.

 

 

 

 

 

 

더보기

※ 답성놀이에 대하여

윤달의 답성(踏城)놀이는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공통점이며, 부녀자들이 윤달 든 해에 행렬을 지어 산성을 도는 보편화된 세시풍속이다. 윤달에서도 엿셋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초엿세날, 열엿셋날, 스무엿셋날을 답성일로 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1678년에 현감 이항(李恒)은 고창 모양성(牟陽城)을 개축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으며, 순조 3년(1803) 고창읍에 읍치풍수의 석조물을 조성할 때에도 윤3월을 택하였다. 이러한 답성놀이는 개성 천마산성(天魔山城), 전북 고창의 모양성(모양산성 혹은 고창읍성), 남원의 교룡산성(蛟龍山城: 전북 기념물 9호)을 비롯하여 전남 영광 지역에서도 전해오는 풍속이다.

답성놀이가 대표적으로 행해지는 곳으로 전북 고창 지역의 모양성이 있다. 고창 모양성의 답성놀이 풍속은 숙종 4년(1678) 고창 현감 이항이 정유재란 이후 폐성된 모양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함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개축에는 여덟 개 현의 혈기왕성한 남성들을 동원하였는데, 윤3월에 모양성 개축을 완공하면서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돌을 머리에 이고 모양성을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왕생한다는 소문을 퍼트려 모양성 밟기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모양성 답성놀이는 축성설화와 관련이 있다. 모양성에 오뉘힘내기형 성 쌓기 설화가 전해오는데, 다음은 고창 모양성과 아산 서산고성의 성 쌓기 설화이다.

옛날 백제 때 남자와 여자가 두 패로 나뉘어 성 쌓기 내기를 했다. 평지와 산으로 된 모양성은 여자들이 쌓고 아산면 성틀봉의 서산고성은 남자들이 쌓기로 하였다. 남자들은 자신들의 힘이 세니까 여자들이 자기들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여유를 부리며 날마다 여흥을 즐기느라 성 쌓는 것을 게을리 했고, 반면 힘이 약한 여인들은 꾀를 내어 성틀봉이 마주 보이는 북쪽 문은 쌓지 않고 똑같이 마주 보이는 북쪽에서 장구 치며 노는 것처럼 꾸미고 상대 쪽에서 보이지 않는 곳은 부지런히 쌓아갔다. 북쪽을 빼놓고는 거의 완성을 해가는 데 상대편 남자 쪽에서 한밤중에 여자 친구를 만나러 와서 성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되돌아가 자기편에게 여자 쪽 성이 북쪽만 남겨두고 거의 완성되었음을 알리게 되었다. 그제야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고 성 쌓을 돌들을 부랴부랴 실어 나르는데 여자 쪽에서 성을 완성하여 만세를 부르자 한탄을 하며 성 쌓기를 중단하고, 그때 버리고 간 성돌이 쌓여서 고인돌의 무더기가 생겼다.

모양성은 고창읍의 동남쪽에 있으며 서고산성은 고창읍에서 서남쪽으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성틀봉에 있다. 서고산성은 전설처럼 남자들이 성 쌓기를 게을리하여 패한 관계로 실제 성터 흔적만 남아 있다. 성터는 성틀봉의 테두리 산성 형식인데, 석성이 보이지 않고 산성의 틀만 보인다 하여 성틀봉이라는 지명이 붙여졌다. 지금도 고창읍에서 무장 방향으로 가다보면 성틀봉의 성터 흔적을 볼 수 있다. 또한 성 쌓기를 중단하고 버린 돌이 고인돌 무더기로 변해버렸다는 것을 입증하듯이 성틀봉 아래에는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고창 모양성 답성놀이는 윤달에 북망산천의 저승문이 열린다는 속설로 전국 각지에서 소복단장을 한 부녀자들이 성밟기를 하려고 찾아든다. 부녀자들의 소복단장은 생전에 극락왕생을 체험하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모양성의 북문[拱北門]은 저승길에 열리는 극락문이라 할 수 있으며, 그곳으로 들어가면 극락세계가 펼쳐지는 곳이다. 북문으로 들어가 높은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북문으로 돌아오는 방식의 모양성을 현실속의 극락세계로 설정했다고 보고, 나이 많은 부녀자들이 생전에 극락세계를 한 번 다녀오고 싶어 이곳의 답성놀이를 즐겼다고 본다. 손 없는 윤달에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모양성을 밟아야 저승길에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이 답성풍속을 만들어냈으며, 4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윤달 특히, 윤3월에 답성을 하면 더욱 효험이 있다는 속설이 전해온다.

모양성 답성놀이는 정월대보름 세시풍속인 답교놀이와 유사하다. 답교놀이는 다리밟기를 하면서 소원성취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세시풍속인데, 모양성 답성놀이도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의 소원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답성의 순서는 북문으로 들어선 후 손바닥 크기의 성돌을 머리에 이고 동쪽 성곽 위를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동문의 등양루에 오르면 문루의 창문을 세 번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소원하는 치성(雉城)을 올린다. 모양성에는 여섯 곳의 치성이 있는데, 그곳에 이르면 부녀자들은 저승으로 가는 길에도 반드시 노자가 따르는 법으로 알고 손수 가꾼 오곡을 백지에 한줌 씩 싸가지고 와서 조금씩 퍼놓고 “저승길 노수요” 하고 합장하며 삼배(三拜)를 올린 뒤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의 소망을 기원한다. 모양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속신에 따라 머리에 돌을 이고 세 바퀴를 도는 부녀자들의 풍속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창 모양성 답성놀이는 모양성과 서산고성의 성 쌓기 내기에서 부녀자들이 승리하였다는 성곽설화가 답성풍속과 조합된 것으로 본다. 손바닥만한 돌을 들고 도는 답성놀이는 돌을 머리에 이거나 치마폭으로 실어 날라 성 쌓기를 한 여성들의 노동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1678년에 읍성을 개축하는 과정에서 오뉘힘내기형의 성 쌓기 전설을 차용하여 모양성 쌓기 설화의 주체인 부녀자들을 성곽 관리에 동원했다고 본다. 그리하여 모양성의 성곽 구조와 성 쌓기 성곽설화 그리고 윤달 속신이 어우러지면서 무병장수와 극락왕생을 소원하는 부녀자들이 답성 풍속의 주체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본다.

조선 후기 고창 지역에는 사회 혼란과 함께 미륵신앙과 지장신앙이 성행하였는데 탑돌이하는 불교민속과 윤달 속신의 전통이 고창 지역의 나이든 부녀자들 사이에 윤달이 든 해에 모양성에 찾아가 극락왕생을 서원하고 무병장수를 비는 관습을 생기게 하였다. 이런 배경 위에서 이곳의 답성놀이가 1678년 윤3월과 1803년 윤3월에 모양성을 개축하면서 크게 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고창 지역의 부녀자들은 윤달이 든 해에는 모양성을 찾아가 현실 사회에 극락정토를 구현하는 답성놀이를 즐겼던 것이다. 정월 초 다리밟기를 하면서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탑돌이를 하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은 고창 모양성의 산성 형태와 성곽설화가 조합되면서 모양성 답성놀이로 계승되었다.        <네이버 세시풍속 정보 '답성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