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산 계곡이 다 그렇지만, 일주문에서 선운사까지 도솔계곡을 따라 걷는 길은 참으로 고즈넉하고 아늑해서 마음이 절로 차분히 가라 앉는다. 왼쪽으로는 거울처럼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오른쪽으로는 부도밭을 품고 있는 숲이 우거져 있다.
호젓한 분위기의 선운사, 특히 5월이 가까워서야 때늦은 붉은 꽃을 피우고 꽃봉오리를 처연하게 떨구는 뒤안의 동백나무 숲은 선운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달콤하면서 아린 상처 같은 사랑의 기억을 일깨우는 낭만적인 공간이 된다. 이곳을 다녀간 시인들은 무딘 사람들의 감성조차 일깨운다.
서정주의 시처럼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별의 애절함을 노래하는 송창식의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불어 설운 날에 말이예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
이어지는 가사에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에게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오"라고 한다.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라고 하는 대목에선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이 절절이 묻어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도 실연의 아픔에 선운사를 찾았던 모양이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 맨발로 건너며 /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 그까짓 사랑 때문에 / 그까짓 여자 때문에 /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하던 그는 결국 "동백꽃 붉게 터지는 / 선운사 뒤안에 가서 / 엉엉 울었다."고 쓰고 있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이영미의 시는 어떻고... 동백꽃이 떨어지듯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라고 이별의 아픔이 빨리 치유되길 바래 보지만 어디 그게 쉬운가. "꽃이 지는 건 쉬워도 / 잊는 건 한참이더군", 결국 이렇게 쓸쓸한 고백을 하고 만다.
이런 노래와 시들을 낳은 선운사, 주차장에서 선운사 천왕문 앞에 이르기까지 개울과 함께 걷는 이 길을 나는 '시와 노래의 길'이라 부르고 싶어진다고 쓴 적이 있다. (인간의 애절한 사랑과 시왕의 너털웃음이 함께하는 선운사)
이런 상념에 젖어 발길이 가는 대로 걷다보면 어느새 아름다운 선운사 흙돌담이 그림처럼 다가선다.
선운산을 배경으로 골짜기의 넓은 평지에 아늑하게 앉은 절집들을 높지도 지도 앉게 두르고 있다. 그냥 고향집을 찾은 듯한 편안함이랄까. 성보박물관 높은 지붕이 보이지 않았으면 그냥 민가로 보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천왕문 앞에 이르러 이 호젓한 평온과 차분한 조화를 깨뜨리며 문득 다가서는 다리. 콘크리트 다리가 있던 자리에 조성한 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육중한 석조물이 자리를 잡았다. 콘크리트 다리를 무지개 돌다리로 바꾼 것이야 뭐랄 수는 없겠지만, 낯설고 부담스런 풍경이다.
외나무다리는 몰라도 징검다리나 섶다리 정도가 어울릴 작은 개울인데, 지나치게 큰 다리가 참 버겁게 느껴진다. 2층 누각인 천왕문조차 기세에 눌린 듯 왜소해 보인다. 천왕문 안에 거하는 네 분의 천왕님도 몹시 부담스러워할 듯하다.
선운사의 천왕문은 2층 누각으로 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청도 운문사도 아마 그랬지. 2층에는 범종과 법고를 두고, 아래층에는 사천왕을 모셨다.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라고 알려져 있는데, 금산사 천왕문의 편액도 같은 글씨로 이 현판을 모각한 것이다.
평지형 절인데도 일곱 계단을 오른 곳에 2층누각을 지어 상승감을 살리고 부처님 세상의 위엄이 강조되었다. 계단을 오르는 중생들은 절로 자신의 차림새를 돌아보며 경건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일주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는 것처럼, 이런 일상의 편의를 위한 쪽문으로 천왕문의 권위는 여지없이 손상 당하는 느낌이다. 보검과 비파와 용과 탑을 든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법당을 지키고 선 네 천왕의 체면 다 구겼다.
천왕이 지키고 있는 공간은 다소 비좁아 답답하게 느껴진다.
사천왕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忉利天)의 우두머리 신인 제석천(힌두교의 인드라)의 명을 받아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동작을 살펴 보고하는 네 신이다. 수미산 중턱을 둘러싸고 사방에 사천왕의 세계가 있다.
사천왕은 원래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귀신들의 왕, 야차(夜叉 Yakṣa)에서 유래되었으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정해진 외모가 없었으나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에서 갑옷을 두른 장군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수미산의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持國天王)은 국토를 수호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이며,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여러 귀신을 지배하고 중생의 이익을 증진시켜 주는 신이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은 항상 깨끗한 눈을 가지고 중생을 살펴서 이익되게 해주는 신이고,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설법을 듣는 신이다.
사천왕이 상징물로 손에 들고 있는 것들은 일정하지는 않은데, 사전마다 그 설명이 다르다. 비파를 지국천왕이 들고 있기도 하고 다문천왕이 들고 있기도 하며, 용과 여의주를 광목천왕이 들고 있기도 하고 증장천왕이 들고 있기도 한다.
※ 사천왕상과 지물(持物)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손에는 보검을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붉은 관을 쓰고 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은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
사천왕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일정하지 않으나 지국천왕은 비파(琵琶)를, 증장천왕은 보검(寶劒)을, 광목천왕은 용·여의주 또는 새끼줄(絹索)을, 다문천왕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이 보편적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사천왕은 나라와 경전에 따라 조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지물(持物)도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칼·창·탑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지국천은 수미산의 동쪽을 지키는 동방천왕으로 국토를 수호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형상은 대개 몸에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드물게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 광목천은 수미산의 서쪽을 지키는 서방천왕으로 항상 깨끗한 눈을 가지고 중생을 살펴서 이익되게 해주는 신(神)이다. 원래 3개의 눈을 가진 힌두교의 시바(Siva) 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고 넓은 눈 또는 진기한 눈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형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 갑옷을 입고 새끼줄[絹索]과 삼차극(三叉戟)을 가지고 있다. 증장천은 수미산의 남쪽을 지키는 남방천왕으로 구반다(鳩槃茶) 등 여러 귀신을 지배하고 항상 중생의 이익을 증진시켜 준다. 그 형상은 갑옷을 입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둔 반면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다문천은 수미산의 북쪽을 지키는 북방천왕으로 항상 부처님의 도량(道場)을 수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인도 고대신화에 나오는 재보신(財寶神)인 구베라(kuvera)에서 유래된 신으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보통 갑옷을 입은 채 오른손에는 창·막대기·보서(寶鼠)를 가지고 있으나 왼손에는 항상 보탑(寶塔)을 들고 있어 사천왕의 명칭을 확인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 천왕은 단독상으로도 숭배되었으며 간혹 그의 비(妃) 길상천(吉祥天)이나 아들인 선이사동자(善爾師童子)를 함께 표현한 예도 있다.
한편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계통의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증장천이 검, 광목천이 새끼줄, 다문천이 보서 또는 보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천왕문을 들어서면 편안한 모습으로 만세루가 나타난다.
이 건물은 "넓은 평면에 비해 높이가 낮은 비규범적인 누樓)의 구조와 불규칙적인 부재(部材) 사용으로 정제된 법식을 따르지 않았으며, 세련되지 못한 건물"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래서 다른 건물을 건립하고 남은 목재로 건립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정면 9칸에 측면 2칸인 긴 단층 누각이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선운사 특유의 절집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듯하다.(청도 운문사도 거의 비슷한 전각 구조와 배치를 보이는 듯하다.) 법당 앞의 루가 2층 구조로 되어 있는 대부분의 절과 달리 단층으로 되어 있어 평지에 세워진 법당의 위엄을 거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길게 늘어서 법당을 감싸는 듯한 모양으로 더욱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절의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건물이라고 하는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으나 아직도 700년이나 된 기둥이 남아 있다고 한다.
만세루를 돌아가면 일자로 길게 늘어선 낮은 석축 위에 대웅전을 중심으로 많은 전각들이 늘어서 있다.;
왼쪽, 오른쪽 어디를 돌아도 좋다. 만세루를 마당 가운데에 두고 탁 트인 넓은 마당에 가람 배치가 되어 있어 선운사는 더욱 평안한 공간이 된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 지붕으로 되어 있다. 맞배지붕에는 대개 기둥 위에 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을 쓰는데, 팔작지붕집처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포가 있는 다포 양식을 사용하였다.
광해군 5년(1613)에 지었으며, 섬세하고 장식적인 건축 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어 보물(제 290호)로 지정되었다.
전면(前面) 5칸에는 모두 빗살 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되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석탑은 5층이나 9층이 아니라 6층으로 되어 있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데, 원래 9층탑이었던 것이 망실된 것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몸돌부터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지붕돌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비례감이 조금 떨어진다.
옛 백제 지역의 탑으로서, 지붕돌 등에서 백제탑 양식이 보이고 있어 지방적인 특색이 잘 담겨진 고려시대 전기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지어졌는데,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가 우뚝 솟은 이 탑을 보고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운사에는 이광사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웅전의 현판은 이 절의 천왕문과 지금은 관음전으로 변한 예전의 요사 '정와(靜窩)' 현판과 함께 원교 이광사의 글씨로 알려지고 있다.
글씨란 자연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서예 철학에 어울리는 해남 대흥사의 대웅전 글씨와는 달리 다소 엄격한 해서로 쓰여져 느낌이 사뭇 다르다.
대웅전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소조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 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선운사 대웅전의 또 하나 볼거리는 천장과 내부 벽의 화려한 벽화이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
▼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한 우물천장
※ 선운사에 대하여
선운산(禪雲山)은 도솔산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선운(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인근의 재력이 확보되었던 배경 등으로 미루어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 선운사 홈페이지에서)
선운사의 창건 설화는 아주 독특하다. 지역적으로 보아서는 백제의 고찰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백제 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단 선사가 자기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합력하여 신라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개창했다고 한다. 또 설화에 의하면 죽도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배가 바다 쪽으로 떠내려가곤 했다 한다. 소문을 듣고 검단선사가 달려가 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와 올라가 본즉,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 옥돌부처, 금옷 입은 사람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 금옷 입은 사람의 품안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는 편지가 있으므로 본래 연못이었던 지금의 절터를 메워서 절을 짓게 되었는데, 이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뒷산의 무성한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자금에 보태게 함으로써 역사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집의 기둥들은 목재를 바닷물에 담갔다가 사용한 것이라 한다. 이 창건설화는 물론 후대에 만들어진 신비화된 내용이다.
검단을 선사라고 했는데 선종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이후의 일이고 보면 그것부터 말이 안된다. 또 인도에서 온 배 이야기는 경주 황룡사의 창건설화를 흉내낸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무릇 설화 속에는 그 설화를 가능케 한 한 가닥의 근거는 있는 법이다. 본래 이 지방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이 와서 해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생업을 삼게 했다는 얘기가 사적기에 나오는데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불교를 포교하던 초기 스님들은 이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중생들에게 베풀면서 포교를 시작했었다.
흔히는 병 고쳐주는 의술을 썼는데 검단의 경우 이 지역의 특수성상 염전법으로 된 것이다. 그것은 소금 만드는 이 고장을 검단리라고 하고, 또 8.15해방때까지만 해도 이곳 염전마을 사람들이 보은염이라고 해서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그런고로 선운사는 검단이 세운 백제의 고찰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검단스님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낼 수가 없다.
<동사열전>의 저자인 각안스님이 이 책의 자서에서 "선운사 도솔암에서 검단선사의 비결을 봉독하였다"고 했으니 그가 큰 스님이었던 것만은 확실히 알겠고, 아직도 우리나라 옛 동리 이름에 '검단리'가 적지 않고 팔당댐 뒷산 이름이 검단산인 것도 분명 이 스님과 관련된 어떤 내력을 지닌 것이겠건만 정작 그분이 어떤 분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내가 정말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검단같은 고승의 삶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밝혀내려는 노력이 스님들의 세계에서는 아직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점은 한국불교의 치명적인 허점이 아닐까.
진흥왕의 설화는 선운사에서 도솔암으로 가는 길가에 있는 진흥굴과 연결된다. 진흥왕은 왕위를 버리고 왕비 도솔과 공주 중애를 데리고 이 천연동굴에서 수도하였는데 어느날 그의 꿈에 미륵삼존이 바위를 가르고 나타났다고 해서 이 굴을 열석굴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선운사 창건설화는 바로 이것을 검단스님 얘기와 연결시켜 만든 것이다. 경주나 개성이 아니라 지방에 세워진 절들을 그 창건설화의 주인공이 의상,원효,자장,진표등 신라의 스님이며, 9세기 이후가 되면 흔히는 도선국사를 창건자로 삼는다. 그러나 백제의 스님을 내세운 예는 호남땅에서도 드물다.
그 이유는 통일신라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시대에조차 백제의 전통을 잇는다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던 시대적 분위기가 있었던 탓이다. 다시 말해서 백제의 고찰이고 검단선사가 창건했다고 해도 좋을 것을 굳이 진흥왕과 연결시켜야 권위를 세울 수 있고 보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남 사람들이 그때도 그렇게 당했던 상흔이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 선운사의 보물들
사적기에 의하면 선운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행호선사가 쑥대밭이 된 폐사지에 9층탑이 외롭게 서 있는 것을 보고 분발하여 다시 일으켰다고 한다. 성종의 작은아버지인 덕원군의 후원으로 대대적으로 중창했다는 것이다. 보물 279,280호로 지정된 금동보살좌상과 금동지장보살은 이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도솔암 내원궁에 모셔놓은 지장보살상은 통일신라, 고려가 아닌 조선시대 불상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경주 석굴암 석가여래상이 통일국가의 이상을 반영하는 근엄과 권위의 화신으로 묘사되고, 도솔암 암각여래상이 지방 호족의 자화상적 이미지라면 이 지장보살은 사대부적 이상미를 반영하듯 학자풍이고 똑똑하게 생겼다. 그래서 나는 이 지장보살을 가리켜 "꼭 경기고등학교 나온 보살님"같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행호가 보았다는 9층석탑은 지금 대웅전 앞에 남아 있는 고려풍의 6층 석탑일 텐데, 이것이 본래 9층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행호가 미술사에 약해 탑의 기단부와 상륜부까지 층수로 세어 9층탑이라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선운사는 1597년 정유재란 때 박살이 났다. 본당을 제외한 당우가 모두 불탔다. 성종17년(1486)임금의 명으로 새긴<석씨원류>가 깡그리 소실됐다. 광해군 5년(1613)에 이곳 현감으로 온 송석조는 원준이라는 후원자를 만나 다시 선운사를 재건하여 3년간의 역사 끝에 오늘의 모습을 세웠다.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이 그때 지어진 건물이다. 불타버린 <석씨원류>도 사명대사가 일본에 건너가 한질 갖고 귀국한 것이 있어 최서룡, 해운법사가 복간하였다. 총 409판으로 된 이 목판<석씨원류>는 조선시대 삽화의 걸작 중 걸작이다.
그런 <석씨원류>목판 원판이 몇 년 전에 세상으로 흘러나와 인사동 골동점에서 볼 수 있었다. 당국에서 급기야 회수하느라 멋모르고 구입한 수장가들이 졸지에 문화재법 위반 현행범이 되고 말았는데, 지금은 다 찾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선운사에서 내 눈길을 끄는 당우는 대웅전 왼쪽에 있는 세 칸짜리 스님방이었다. 그 조촐하고 조용한 아름다움이란 요즘같이 들뜬 세상사람들에게 진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무언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게다가 당호는 원교 이광사가 힘과 기교를 다해 쓴 '정와(조용한 작은 집)'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92년 어느날 선운사는 거찰로의 위용을 갖춘다고 이 아담한 집은 관음전으로 개수되고 저쪽 요사채에 대방이 건립되었다. 나는 그 현판 '정와'가 어디로 갔는가 궁금하여 찾아보았더니 맙소사! 그것은 우람한 대방의 창방 사이에 빠꼼히 끼여 있는 것이아닌가. 그렇게 해놓고도 '조용한 집'이라는 문패를 달 생각은 어떻게 했던고. 이제 우리가 선운사에 가서 그런 조용한 절집의 분위기를 냄새라도 맡고 싶으면, 선운사 위쪽 오른편 산기슭에 있는 여염집 같은 부속건물을 찾아가야 한다.
이 집은 김성수 집안의 개인 원당 사찰로 그 설립 목표는 오직 가세의 번성이니 울산 김씨 아니면 해당사항 없는 집이다. 그러나 이집 주련은 추사의 글씨로 볼 만하고, 주변 운치가 소탈하니 그것을 권해볼 길밖에 없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선운사 전경
※ 선운사에 대한 다른 글 → => 인간의 애절한 사랑과 시왕의 너털웃음이 함께하는 선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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