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1973년 8월 23일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일단의 무장강도들이 도심인 노르말름스토리에 있는 크레디트반켄(Kreditbanken) 은행을 점거하고 은행 직원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8월 28일까지 6일 동안 범인들과 함께 지내게 된 인질들은 범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정서적으로 점차로 가까워졌고, 나중 풀려났을 때에는 인질범들을 옹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말이 생겨 납니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고 심지어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을 오히려 적대시하는 심리적 증후군이지요.
십여 년 전이었던가. 가물가물한 기억이지만, 자신을 강간한 범죄자가 수감되자 면회를 가서 안됐다고 변호하는 어느 여학생이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전형적인 사례로 주목을 받았지요.
mb에게 미운 털이 박혀 쫓겨난 mbc 엄기영 사장이 mb의 품 속에 안겼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엄기영의 행태에 많은 사람들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심정이 되었고 인터넷은 그를 비난하는 글과 댓글들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조차 "사람을 잘못 봤다."고 개탄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엄기영이 mbc사장으로 갈 때 많은 도움을 줬고, mbc 사장 시절 각종 탄압을 겪으며 힘겨워하던 작년 6월 도지사 선거 때에도 강원도 지사 후보와 지역구를 양보하려고까지 할 정도로 많은 배려를 하지 않았던가요.
mbc 노조원들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엄기영.
이 이미지로 엄기영이 이명박 정권에 대한 투사가 될 것으로 기대한 사람이 많았다.
엄기영은 자신을 몰아낸 김재철 사장의 고문 노릇을 수락하여 억대의 보수를 받고 고급 승용차를 지원받더니, 춘천으로 가서 푸른색 점퍼를 입고 평창 동계올림픽 민간단체협의회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친한나라당 행보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광재 전 지사와 민주당의 간곡한 러브콜조차 뿌리치고 한나라당 도지사 후보를 자원합니다.
이쯤되면 스톡홀름의 인질들이나 자신을 강간한 자를 면회간 여학생과 뭐가 다를까 싶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로 보는 견해가 등장합니다. 누가 봐도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행태는 스톡홀름 증후군으로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엄기영이 과연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땅의 정치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엄기영의 행태에 담겨 있는 진실을 금방 알아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 MBC 앵커 엄기영은 김영삼 장학생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거기에 오버랩되는 엄기영씨의 모습... 1992년 대선 개표 방송을 하면서 김영삼의 승리를 확인하는 순간 환하게 변하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뒤 2002년 대선 때 출구조사에서 이회창에 대한 노무현의 승리를 전할 때도 그는 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김영삼이 당선되었을 때 웃던 그로 보면 이회창의 낙선에 상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어서 뜻밖의 표정, 반전이 의아스럽기만 했지요.
그러나, 엄기영의 이 표정이 반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순진한 것이었습니다. 엄기영에게는 전혀 반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엄기영의 행보와 궤적을 보면 그는 일관된 모습을 보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엄기영은 변함없이 강자에 붙어 자신의 입신과 권력을 추구해온 카멜레온일 뿐입니다. 김영삼 당선에 웃고 노무현 당선에도 웃는 그의 반전, 이명박의 핍박을 받다 그의 품에 안기는 또 하나의 반전, 그에게 출마하기를 권유하던 이광재 도지사 자리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서 도전하는 미친 반전, 이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스톡홀름 증후군이 아니라 바로 카멜레온인 것입니다.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피부색을 바꾸어 자신을 보호하는 도마뱀 말입니다.
일제시대와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며 이 땅에서 살아남는 배신의 정치는 자신의 입신을 위해 민중을 이용한 후 배반하고 권력에 줄을 대는 정치모리배들의 정치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엄기영에게 과연 정치적인 신념이 있었을까요. 그는 2002년 1월9일 '광주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보도하여 비난을 받기도 한 는 몰역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앵커 시절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는 극히 단편적인 멘트 외에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적이 없기도 합니다.)
mbc 노조원들 앞에서 불끈 쥔 주먹을 치켜든 그의 모습은 그의 실체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포즈는 있었지만 사장으로서 권력의 개입을 막아내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피디수첩 재조사부터 시작하여 사과 방송에 이르기까지 방문진의 요구는 거의 다 받아들였습니다. 노조로부터는 자기 살려고 후배들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받으며...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엄기영씨에 대한 아주 불편한 진실들>이라는 글에서 엄 전 사장이 참여정부 말기 사장 선임권을 가진 한 mbc 인사에게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준다"고 안타까워했다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특히 엄 전 사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아주 친한 한 원로를 극진히 모셨고, 사장 선임을 앞두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하면서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방송가에 떠돌던 출처불명의 풍문까지 거론하며 다음과 같이 절박하게 매달렸다고 합니다.
"청와대 양정철 비서관이 저를 안 좋게 본다는데, 잘 말씀 좀 해주셔서 방어 좀 해주십시오."
엄기영이 한나라당을 선택한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의 지사직 박탈 가능성이 나오면서 그는 친한나라당 행보에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이광재가 자신의 지역구는 물론 자기 대신 강원도지사 출마 등을 권할 때 돌아보지도 않던 그가 갑자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파란색 점퍼를 입고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짓밟은 정권의 깃발을 들고 도지사 후보로 나섰습니다.
아마도 그는 천안함,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이어지는 남북관계의 흐름과 뚜렷한 대권후보가 없어 정치적 미래가 불투명한 민주당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한나라당(더 좁히면 아마도 박근혜)에서 찾은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정치철학 따위는 없었으니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에게 정치적 투사(投射)를 하고 있었던 순진한 사람들은 배신감을 토로하였지만 그것은 연목구어일 뿐입니다.
당시 어느 하루 트위터 글을 잠시 볼까요.
엄기영과 김재철 이 두 분이 같은 색이며 동지인 것을 모르고 광분했던 그날들이 새삼 부끄러워집니다.. 아.. 난 왜 사람보는 안목 어두울까.. 유신때 김영삼에 속고 이재오에 속고 엄기영에 속고.. <釋개똥이/zero(@artteakorea)>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양심'이 없다. '나' 아니면 안되는 줄 안다.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이명박. 너무 많은데 오늘 한명 추가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파란잠바 입은 엄기영 아저씨. <나는고흐다/이성국(@l_sungkuk)>
엄기영의 변화에 놀랍나요? 하지만, 옛날에 김영삼이란 사람이 있었는데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뭐 이러면서 독재에 저항한. 근데 갑자기 떡 군사정당과 합당을 하는 거예요. 여권지도자로 한큐에 부상. 그거에 비하면 엄기영은 귀엽죠. <남태현(@poliscie)>
딩동댕! 이 분들의 글 속에 진실이 들어 있지요. 엄기영은 바로 김영삼과 같은 기회주의적 마인드를 가진 인간에 불과합니다. 김영삼에게 중요한 것이 역사의식이 아니라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듯이 엄기영에게도 중요한 것은 입신을 위한 권력이었을 뿐입니다. 김영삼이 3당 합당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몹시 자연스러웠듯 엄기영이 한나라당으로 간 것 또한 자신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웠던 일입니다.
문제는 기회주의자인 김영삼과 엄기영을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민중들의 소망을 대변해 줄 사람으로 사람들이 착각한 것이지요. 그들이 진보의 외피를 입었던 것은 권력을 얻기 위한 몸집 불리기에 불과했던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카멜레온 신인 정치인 엄기영은 보기 좋게 낙선했습니다. 누가 '감자 바위'라고 했던가요. '강원도의 힘', 민중의 힘은 배신의 정치학에 철퇴를 내렸습니다. 위대한 강원도민들이 이 땅의 정치에 희망의 빛을 만들었습니다. 진보 보수를 떠나 이 땅의 정치를 위해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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