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태국 아유타야 (3) 왓 마하 탓, 왓 라차부라나

모산재 2011. 2. 7. 09:41

 

왓 야이차이몽콘의 와불상과 쩨디를 돌아본 뒤 다시 빠삭강을 건너 아유타야의 중심에 있는 왓 마하탓으로 향한다. 어떤 자료에는 '왓 프라마하탓(Wat Phra Mahathat)'이라고 표기하고 있기도 한 사원이다.

 

마하탓 사원은 왕궁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왕실사원으로 중앙 탑에는 부처 유물이 봉안되었으니 아유타야의 대표 사원이자 번영기 아유타야의 가장 신성한 사원이었다. 그리고 크메르 양식의 탑인 쁘랑 등 여러 양식이 융합된 아유타야 양식의 선구적인 건축물이다.

 

 

 

 

 

이른 새벽 명상을 하던 왕이 빛을 발하는 부처님의 유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 바로 이 마하탓 사원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유물이 마하탓 탑 속에 봉안되었고 사원에는 한때 최고 스님이 거주하기도 했다.

 

 

마하탓은 프라보롬 라차티랏 1세 때, 라메수안(Ramesuan) 왕이 수도승 시절인 1374년에 짓기 시작하여 라메수안 왕 치세 때 완성되었다. 송탐 왕 때 주 탑이 무너졌으나 1663년 쁘라삿텅 왕 때 복구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사원의 모습은 이 때의 것이다.

 

그러나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사원은 심하게 유린되어 파괴되고 불타 폐허로 남았다. 사원 여기저기에는 몸통만 남은 불상, 나뒹구는 불두 등은 아유타야의 참담한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사원 입구에 들어서면서 넓은 대지 위에 무너진 절터가 시야를 채운다.

 

무화과나무 뿌리에 감겨 있는 머리 없는 불상을 만난다. 아유타야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널리 알려진 모습... 마치 숨뽕나무 뿌리에 감겨 있는시엠립 따프롬 사원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여행자는 역사의 무상함에 절로 젖어들게 되지만, 불상이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불상을 감싸고 있는 나무는 무화과나무인데 50여 년밖에 되지 않은 나무라 한다.

 

 

 

 

 

사원의 입구에도 불두가 사라져버린 불상들이 가득한데, 이 한 부처님만 온전한 모습으로 명상에 잠겨 있다. 다행히 주변엔 비교적 온전한 탑도 푸른 그늘을 드리운 커다란 나무도 둘렀으니 사원다운 분위기에 잠시라도 젖어들게 한다.

 

 

 

 

 

 

 

 

 

불전은 다 사라져 흔적만 남아 있고, 불상은 심하게 파괴되어 몸뚱이만 앉아 있거나 머리만 널려 있다. 그래도 탑(쁘랑)만은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모습이다.

 

이 사원의 쁘랑들은 크메르로부터 받아들인 양식으로, 아유타야에 있는 쁘랑 중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이다.

 

 

 

 

 

 

불상이 사라진 자리와 머리 없는 불상이 도열해 앉은 풍경 너머, 저 멀리 북쪽으로 왓 라차부라나의 탑이 보인다.

 

 

 

 

 

 

1767년 버마군에 함락되면서 철저하게 파괴된 불상들 모습

 

 

 

 

 

 

 

중앙 탑(쁘랑) 마하탓이 나타난다.

 

기단조차도 무너져 버린 모습인데, 화재를 당한 흔적인 듯 붉은 벽돌들은 검게 그을려 있어 250여 년 전 아유타야 최후의 날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한다.

 

 

 

 

 

철저히 파괴된 불상들 속에, 중앙 쁘랑 앞 폐허 위에 이렇게 홀로 명상에 잠긴 비교적 온전한(복구한 흔적이 군데군데 있긴 하지만) 부처님을 만난 느낌은 묘하다.

 

 

 

 

 

부처님의 유물을 안치한 중앙탑 마하탓은 원래 홍토를 쌓아 38m 높이로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7세기 초 송탐 왕 때에 무너져 내려 1633년에 보수하였고 벽돌과 흙을 이용하여 50m 높이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그 후 중앙 쁘랑은 비교적 쫗은 상태로 유지되어 왔는데 1904년 5월 완전히 무너져 내려 그 이후로 방치되어 많은 보물이 도굴되었다 한다.

 

1956년에야 태국 예술부가 유적 재건을 위해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이곳에서 금상자에 보관된 부처님의 유품, 크기가 다른 금불상들 금, 루비, 크리스탈로 만든 장식품들을 발견했다. 유물은 짜오삼프라야 국립박물관에 옮겨 보존 전시되고있다.

 

 

 

 

 

 

 

아유타야는 북부의 수코타이와는 달리 앙코르제국의 지역 통치 중심지였던 롭부리를 계승하여 앙코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옥수수 모양의 탑인 쁘랑은 대표적인 것이다.

 

사원 중앙에 거대한 쁘랑을 세우고 기단부 주위에 작은 탑들을 세워 메루(수미산)의 불교적 우주관을 표현한 것은 초기 아유타야 양식을 이룬다.

 

 

 

 

 

여러 형태의 크고작은 쁘랑들

 

 

 

 

 

 

 

 

 

 

 

 

저 멀리 북쪽으로 왓 라차부라나의 탑이 보인다.

 

투어에 방문 계획이 없는 사원이라 아쉬운 마음에 줌을 최대로 하여 당겨 잡아본다.

 

 

 

 

 

 

 

■ 왓 라차부라나(Wat Ratchaburana)

 

 

아유타야의 7대 왕과 그의 동생의 화장터 위에 만들어진 사원으로 상당한 보물이 묻혀있던 곳이다. 그 중에는 금과 보석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왕관과 보물들도 있다.

 

 

 

 

 

탑의 아랫부분에 힌두교의 흔적인 가루다상이 보인다.

 

왓 라차부라나는 15세기에 건립되었는데, 벽돌로 탑을 가늘고 높게 쌓아올린 프라쁘랑양식의 탑당이 시선을 끈다. 그리고 지하건물 내부에서는 15세기의 채색벽화와 금으로 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왓 라차부라나는 왕권을 둘러싸고 형제가 벌인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비극이 서려 있는 사원이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1424년, 인타라크티랏 왕이 죽자, 수판부리를 지배했던 차오 아웨 프라야(Chao Aye Phraya)와 산부리를 다스렸던 차오 이 프라야(Chao Yi Phraya) 등 인타라크티랏 왕의 두 아들은 왕위를 얻고자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파탄다리 부근에서 일어난 왕권 쟁탈전은 결국 두 아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는 비극으로 끝맺게 된다.

 

어부지리나고나 할까, 왕위는 피차누록에 있던 셋째아들인 차오 삼프라야가 계승하게 되고 그는 프라 보롬 라차티랏(Phra Borom Rachathirat) 2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다. 삼프라야 왕은 그의 아버지와 두 명의 형의 장례식을 치렀다. 후일 그는 형들이 싸우다 죽었던 자리이자 화장터가 된 곳에 왓 라차부라나(Wat Ratchaburana) 건립을 명했고, 죽은 두 형을 추모하기 위해 2개의 쩨디를 세워 납골을 안치했다.

 

사원에는 2개의 사리탑과 하나의 쁘랑, 다른 부속 건물 등이 세워졌다. 쁘랑 안에는 많은 가치있는 유물이 안치되어 있다. 1767년 화재로 사원은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건물의 유적들은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1957년 쁘랑 내부의 2층으로 된 납골당 유물들이 도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태국 정부(예술부)에서는 이곳의 발굴을 시작하였고, 불상과 수많은 순금예술품 등과 더불어 금과 납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봉납 서판을 발굴하였다. 1958년에는 납골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벽화를 일반인에게 공개했다. 발굴된 수많은 불상과 봉납 서판은 차오삼 프라야 국립박물관에 옮겨 보관, 전시하고 있다.

 

일일투어에는 포함되지 않은 코스라 직접 가 보지 못한 이 사원의 모습은 태국관광청의 사진으로 대신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 태국관광청 사진 자료 인용

 

 

 

 

마하탓 사원을 돌아보고 나니 12시쯤. 점심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