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태국 아유타야 (1) 왓 푸카오텅(Wat Phu Khao Thong)

모산재 2011. 1. 31. 18:31

 

치앙마이를 떠난 비행기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수안나품 공항에 도착한다. 택시를 타고 예약되어 있는 호텔 그랜드 머큐어 호텔을 찾으니 10시 40분쯤 되었다.

 

이 선생님이 흡연 가능한 객실을 요구하여 방에 들었더니 '흡연 가능한' 객실이 아니라 아주'흡연실'이다. 현관 문을 여는 순간 퀴퀴하게 찌든 담배 냄새에 숨이 턱 막혀온다. 게다가 창문조차 열리지 않는 밀폐된 방이다. 결국 비흡연실로 바꾼다.

 

맥주 몇 잔 마시고 잠자리에 든다. 아유타야 유적지 일일투어를 위해 새벽같이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21일. 아유타야

 

 

 

5시 40분, 아직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6시 30분에 봉고차를 타고 아유타야 유적지로 출발한다.

 

 

아유타야는 1350년에 건설된 타이의 두 번째 왕조인 아유타야 왕조의 수도로, 방콕의 북서쪽 76km 지점에 있는 아주 작은 도시이다. 2006년 기준으로 인구 5만 명을 겨우 넘는 작은 도시이지만 짜오프라야강, 파삭강 그리고 롭부리강이 해자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며 장엄한 고대유적들이 집중되어 있다.

 

 

 

※ 아유타야 유적지

 

 

 

 

 

※ 아유타야에 대하여

아유타야 지역은 해발 3~5미터의 낮은 평원지대로서, 땅이 매우 비옥하며, 짜오프라야강, 롭부리강, 빠삭강이 만나는 요충지로서 오래 전부터 식량 공급센터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 지역은 낮은 습지였기 때문에 주거환경으로는 적당치 않은 곳이었다. 독립국가를 만들기 이전까지는 앙코르제국의 지역 통치 중심지였던 롭부리에 수익을 가져다 주는 속지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륙과 해상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개발되었다. 짜오프라야강의 해안입구 델타를 기점으로 현 아유타야 지역까지 본격적인 도시화가 전개된 것은 12~13세기에 들어서서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예전의 수도였던 롭부리에 천연두가 창궐하고 앙코르제국의 영향력이 점차 퇴조하자, 1350년 우통을 왕으로 하는 타이족 중심의 아유타야라는 국가가 출범하게 되었다. 우통왕은 앙코르 세력을 쫓아 내고 짜오프라야강 일대를 장악하는 한편 롭부리강, 빠삭강, 짜오프라야강을 운하로 연결하여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1350년 우통(U-Thong)왕이 세운 아유타야 왕조는 태국 역사상 최장기 왕국으로서 1767년까지 417년간 33명의 왕이 통치했다. 아유타야의 인구는 1600년까지 약 30만 명, 1700년 무렵에는 약 1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의 하나였다. 아유타야는 토지가 비옥하여 경제적으로 수코타이를 압도하여 결국 병합하였다. 전성기에는 3개의 왕궁, 375개의 사원, 29개의 요새, 그리고 94개의 대문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과 인도, 유럽을 묶는 중간에 위치하는 지리적인 이점을 살려 무역이 발달하였는데, 400여 척의 바지선을 거느린 왕가를 중심으로 독점 무역을 했다. 시암만에서부터 시작한 차오프라야강이 항로가 되어 외국문명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중국에 쌀을 수출하여 국력을 기르고 일본과 베트남(안남) 등 동남아시아는 물론 아랍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무역을 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부를 바탕으로 당시 번영하고 있던 크메르 문화를 흡수하면서, 중국, 유럽, 페르시아 등의 문화의 영향을 받은 화려한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아유타야에 번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앙코르제국을 밀어내고 신흥강자로 등장한 아유타야는 북서부의 강자인 버마와 충돌하게 되고 1569년에 버마군에 함락되는 사건을 겪는다. 그러나 나레수안 왕(1590~1605)에 의해 이내 독립을 되찾는다. 이후 수많은 무역상들이 아유타야로 몰려 들고 아유타야는 번영과 평화를 구가한다. 하지만 17세기 중엽부터 왕권을 둘러싼 패권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민심이 이반하게 된다. 강력한 베트남의 등장으로 캄보디아에 대한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되고,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아유타야왕조는 역사로부터 사라진다.

이때 아유타야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버마군이 퇴각한 후 새롭게 왕이 된 탁신은 아유타야 재흥을 위해 방콕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짜오프라야 강이 흐르는 톤부리로 천도를 하게 된다.

옛 도시의 유적은 현재 아유타야 역사공원이 되었고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아유타야 시대의 건축적 특징은 이전 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탑의 양식인 쁘랑(Prang)과 늘어난 벽화에 있다. 도시는 동쪽으로 몇 km 떨어진 곳에 재건되었다. 도시는 한 때 '동양의 베니스'로 불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왕궁사원인 왓 프라씨싼펫이 있다. 아유타야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역대 왕의 유골을 안치한 탑 3개가 있다. 또 왓 프라몽콘보핏는 26m의 대형 청동불상이 있는 사원이다. 방파인별궁은 왕족의 여름궁전으로 이탈리아·그리스·중국의 건축양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왓차이왓타나람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모델로 한 사원이다. 그밖에 왓프라남, 왓라차부라나, 왓야이차이몽콘, 수리요타이 쩨디 등의 유적이 있다.

 

 

 

 

9시 무렵에 아유타야에 도착한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아유타야의 북서쪽 외곽에 자리잡은 푸카오텅 쩨디.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거대한 회색빛 쩨디가 눈 앞을 가득 채운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안내한 중년의 태국인 가이드는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식 영어로 마치 녹음테이프를 틀어 놓은 듯 설명하기 시작한다. 모든 문장의 마지막 음운은 '아' 소리로 리듬을 맞추는 묘한 발음.

 

그런 발음에도 백인들은 둘러서서 열심히 듣고 있는데, 듣기가 되지 않는 나는 거대한 네모꼴 기단으로 올라가 탑을 구경하기로 한다.

 

 

 

 

 

 

먼저 안내판을 살펴본다. 영문 안내문에는 이 사원과 쩨디의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라메수안 왕이 1387년(남방 불기 1930년)에 이 사원을 세웠고, 1567년 버마 바윙농 왕이 아유타야를 침공했을 때 기념으로 이 사원에 거대한 몬 양식의 쩨디를 세우게 했다. 그 후 보로마코뜨 왕이 탑을 개조하였고 쩨디의 윗부분을 12개의 들쭉날쭉한 톱니모양의 모서리 형태를 한 태국양식으로 바꾸었다.

 

 

 

 

 

이 쩨디의 높이는 50m, 기단까지 포함하면 80m라고 하는데 불기 2,500년을 맞은 1956년에 탑 꼭대기에 무게 2,500g의 황금 구슬을 만들어 달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탑을 'Golden Mount Pagoda'라 부른다고 한다.

 

 

이 탑과 대칭적인 위치, 아유타야의 남동쪽에는 왓 야이차이몽콘이라는 높은 탑이 있는 사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나레수안(Naresuan)왕이 1592년 버마와 싸울 때 코끼리를 타고서 맨손으로 버마의 왕자를 죽여 승리를 거둔 후 세웠다고 한다. 바로 버마가 승전 기념으로 세운 이 푸카오텅 쩨디와 대비되는 의미로 세운 것이다.

 

 

 

 

아유타야의 독립 영웅 나레수안 왕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는 몇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된 적이 있다. 

 

 

※ 나레수안

 

<나레수안>은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 작품으로 상영되었던 태국의 잔다르크 <수리요타이>를 제작한 태국의 차트리찰레름 유콘 감독이 2007년 제작한 영화다. 총 3부작으로 기획된 이 작품 1, 2부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16세기, 아유타야 왕국 마하 탐마라차 왕의 아들 나레수안은 홍사와디(지금의 버마)에 볼모로 잡혀가 성장한다. 1571년 고향으로 돌아온 나레수안은 뛰어난 지도력으로 아유타야 왕국의 새로운 초석을 닦는다. 하지만 홍사와디의 새로운 왕 난다바인은 호시탐탐 나레수안의 제거를 노린다. 1590년 부왕의 서거에 이어 왕의 자리에 오른 나레수안은 아유타야 왕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홍사와디와의 일전을 맞는다.

나레수안 왕은 포루투갈의 화력을 수입하고 군사력을 정비하여 1593년 1월18일 버마 왕자를 죽이고 버마군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둔다. 버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여 아유타야인들의 한을 풀고 자존심을 회복시킴으로써 나레수안 왕은 태국인의 영웅으로, 태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역대 왕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레수안은 왕자 시절 '흑태자'라 불린 실력자로 아유타야왕조의 20대(1590~1605) 왕으로 등극하여 1594년 캄보디아를 속국으로 삼고, 이듬해에는 버마로부터 치앙마이 왕국에 대한 주권을 빼앗았다. 정치 군사적 안정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200년 가량 지속된 시암 독립의 기초를 세웠다.

 

 

※ 수리요타이

 

수리요타이는 '태국의 잔다르크'로 칭송받는 왕비다. 1548년 버마가 침략했을 때 전쟁터에 나아가 남편인 짜끄라빳 왕을 구하고 목숨을 버린 여걸.

아유타야 서쪽에는 그녀의 유골을 안치한 수리요타이 쩨디가 자리잡고 있다. 2001년에 제작된 영화 '수리요타이'는 당시 태국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고 한다.

 

 

 

 

 

푸카오텅 쩨디 기단에 올라서 내려다본 부근의 작은 불당과  불탑(쩨디)들

 

 

 

 

 

여러 형태의 쩨디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