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라오스, 베트남

태국 치앙마이 (7) 에메랄드 불상의 왓 쩨디루앙, 왓 우몽마하테라짠

모산재 2010. 5. 4. 22:30

 

2010년 1월 20일 목요일, 저녁무렵

 

해는 지고 어둠이 밀려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틀 전 스님의 다비식으로 붐비던 인파로 살필 수 없었던 쩨디루앙 사원을 둘러보기 위해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동문으로 연결되는 큰길로 가는 도중 왓 우몽마하테라짠(Wat Umongmahatherachan)이라는 사원을 잠시 들른다. 이름이 꽤나 길어 그냥 왓 우몽이라 부를까 했는데, 그런 이름의 절이 따로 있다. 따로 있는 정도가 아니라 치앙마이 성곽의 서쪽 교외에 있는 동굴사원으로 여행자들이 즐겨찾는 꽤 유명한 절이다. 

 

2층 지붕이 급하게 얹혀 있는 본당 건물은 기단이 꽤 높아서 상승감이 돋보인다. 본당이 높다보니 밖에서도 부처님의 모습이 환히 들여다 보이는 게 인상적이다.

 

 

 

 

 

본당 내부 불전의 열주는 장식이 없이 붉은색으로 칠해져 소박하면서도 엄숙한 느낌을 주고, 불상은 얼굴이 크고 몸집은 오동통하여 후덕한 인상이다. 불상 뒤로는 보리수로 보이는 벽화로 장식되어 있어 점이 특이한데, 화려한 나가상도 광배도 아닌 보리수를 배경으로 둠으로써 권위적이라기보다는 명상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바쁜 마음에 본당과 부처님만 대강 살펴보고 쩨디루앙을 향해서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큰길 길거리 담벽에 천상의 신 테와다 조각상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다.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지나치는데 나는 꼼짝 않고 한참을 바라본다. 아름답다. 흐뭇한 연애감정까지 생길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머리에는 광배까지 표현되어 있고, 몸매를 보아서는 여성이 아닌 듯하다.

 

 

 

 

 

어째서 저렇게 아름다운 조각상이 길거리 담벼락에 방치되어 있는 걸까.

 

 

이틀만에 또다시 쩨디 루앙 사원으로 들어섰다. 다비식이 있던 날과는 달리 사원은 한산하다. 저녁무렵인 탓도 있겠지만 고즈넉한 분위기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쩨디루앙 사원은 1385년에서 1401년까지 란나를 다스렸던 샌 무앙마(Saen Muang Ma) 왕이 1391년 부왕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쩨디 루앙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원래 지금처럼 사원터가 넓은 것은 아니었는데 쩨디루앙 외에도 왓 호탐(Wat Ho Tham)과 왓 수크민(Wat Sukmin) 등 세 개의 사원이 합쳐져 확장된 것이라고 한다.

 

 

정문 가까이 지어진 대불전(Viharn)은 1928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금색과 유리 장식으로 꾸민 본당 정면은 화려함의 극치이다

 

 

 

 

 

대불전(위한) 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열주 사이로 보이는 불상은 뜻밖에도 서 있는 부처님이다. 본존불을 입상으로 모신 것은  흔치 않은 일일 텐데 무슨 뜻이 숨어 있는 걸까.

 

불전을 향하여 도열한 금빛 찬란한 기둥들은 섬세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화려함과 위엄을 나타내기에 충분하다. 가만 살펴보니 기둥 밑부분은 종 모양으로 만들어 지상을 받치고 윗부분은 연꽃 장식을 새겨 붉은 천장으로 표현된 천상의 세계를 받치고 있다.

 

 

 

 

 

 

본존불인 입상 양쪽으로는 협시 보살이 있고 그 앞에는 수십여 개의 작은 불상들이 놓여 있다. 본존 불상은 허리가 길고 엉덩이와 하체가 빈약하게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부족해 보인다. 양쪽에 협시한 보살상도 균형미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수인은 항마촉지인 비슷하지만 이곳의 불상은 우리나라 사찰의 불상 수인과는 다르니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다만 위앙짠의 파께우 사원의 불상이 의미하는 것을 적용해 본다면, 오른손 손바닥을 앞으로 내민 것은 평화를, 왼손바닥을 펴고 아래로 내린 것은 비를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인타긴 축제가 기우제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 불상은 서 있는 불상이어서 '프라 차오 아타롯(Phra Chao Attarot)'이라 불리는데 놋쇠 합금과 모르타르로 만들었다 한다. 샌 무앙마 왕 시대(1385-1401)에 주조된 것이라고 한다.

 

 

대불전 남동쪽 뜰에는 십자형의 사당이 있다. '사오 인타킨(Sao Inthakin)'이라는 이름의 락 무앙(Lak Mueang), 즉 성곽 돌기둥(city pillar)이 있다. 우리 나라의 당간지주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치앙마이를 지켜주는 수호신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서쪽 오두막에 있는 조각상으로 새겨진 은자(隱者)가 인드라신에게 가서 적으로부터 도시를 지켜달라고 했는데, 인드라신은 적절한 제물을 조건으로 두 쿠마판(kumaphan, 신화적 창조물인 인간-짐승)으로 하여금 인타킨 기둥을 타바팀스(Tavatims, 천상)에서 성곽으로 옮기도록 허락하였다고 한다.

 

차오 카윌라(Chao Kawila) 왕은 1800년에 왓 사도 무앙(Wat Sadoe Muang)으로부터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는 사원의 정문 남쪽과 북쪽 오두막에 쿠마판(kumaphan) 상을 세웠다. 그는 또한 세 그루의 커다란 양(Yang)나무를 심었다. 전설에 따르면 성곽 기둥에 가장 가까운 나무는 베어서 쓰러뜨리지 않는 한 치앙마이를 보호할 것이라고 한다.

 

 

▼ 성곽 돌기둥 사당(City pillar shrine). 돌기둥 이름이 '사오 인타킨'인 것을 보면, 5.19~25일에 열린다는 기우제, 인타킨축제(Intakhin festival)의 유래가 되는 건축물인 듯하다.

 

 

 

 

 

돌기둥 사당 뒤로는 전설 속의 신성한 나무인듯 커다란 양(Yang)나무가 신목(神木)처럼 하늘을 받치고 섰다.

 

치앙마이의 영혼이 깃든 이 신성한 수호목은 수령이 200년이 넘는다는데, 인도차이나 일대에서 자라는 상록수 '딥테로카르푸스 아라투스(Dipterocarpus alatus)'를 가리킨다. 태국에서는 '마이양 또는 '양'이라고 한다.

 

 

 

 

 

대불전 뒤쪽으로 거대한 쩨디루앙이 보인다. 멀리서 보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2층으로 된 기단과 그 위에 올려진 탑의 높이는 60m 정도이니 20층 빌딩보다도 훨씬 높은 건축물이다.

 

쩨디 루앙은 현재 치앙마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일 뿐 아니라,  500년이 넘는 치앙마이 역사 속에 가장 높은 건축물로 남아 있다.

 

 

 

 

 

윗부분이 무너진 현재의 쩨디는 1990년대 초 유네스코와 일본 정부의 재정 부담으로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새로운 요소들이 란나 양식이 아니라 중부 타이 양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쩨디 루앙은 14세기 말에 샌 무앙마(Saen Muang Ma) 왕이 그의 아버지 쿠나(Ku Na)왕의 유골을 안치하기 위해 건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완성을 보지 못했고 샌 무앙마 왕이 죽은 뒤 왕비가 공사를 이어받았지만 자꾸 무너져 내렸던 모양이다. 그러다 15세기 중엽 손자인 틸로카랏(Tilokaraj)왕 때에야 겨우 완공될 수 있었다.

 

 

동쪽 기단부에는 코끼리상이 사라지고 흔적만 남았다.

 

 

 

 

 

가로 세로 각 54m, 2층기단 위에 불탑 높이 82미터 높이, 총 높이 90m로 란나왕국 최대의 건축물은 세워졌고 1468년에는 에메랄드 불상(프라 께오)을 동쪽 벽감(niche)에 안치하였다. 그러나  1545년 지진으로 윗부분이 30m나 무너져 내렸다.

 

그로부터 6년 뒤(1551년) 란나를 다스리던 라오스 세타티랏 왕이 에메랄드 불상을 루앙프라방으로가져 갔고 이를 위앙짠의 프라께오 사원에 모시고 있었는데, 시암의 침공으로 1778년 태국으로 넘어가 방콕의 아론사원에 잠시 머물다가 현재 프라께우 사원에 모셔져 태국 왕실의 상징이 되었다.

 

복구된 동쪽 벽감에는 1995년 쩨디 건립 600주년 기념식에서 검은 옥으로 만든 불상을 안치하였다. 불상의 공식 명칭은 'Phra Phut Chaloem Sirirat'이지만 흔히 옥불상'Phra Yok'으로 알려져 있다.

 

 

▼ 정면 벽감에 모셔진 불상이 에메랄드 불상을 대신해 1995년에 안치된 검은 옥 불상 'Phra Yok'이다.

 

 

 

 

 

에메랄드 불상을 '프라께우(Phra Kaew)'라고도 부르는데, 녹색 옥으로 조각한 불상을 잘못 알고 에메랄드 불상이라 부르게 된 것이 이름이 굳어졌다 한다. 에메랄드 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파란만장한 역사가 얽혀 있다.

 

불상은 인도의 승려 나가세나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난을 피해 스리랑카로 옮겨졌고, 11세기에 버마를 통일한 바간(Bargan)왕국의 아누릇 왕이 소승(테라바다)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며 스리랑카에 요청한 '프라께우'가 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이 불상이 캄보디아의 어느 마을에서 발견되었는데, 1434년 캄보디아 왕이 아유타야 왕국의 왕에게 선물로 바쳐 캄펭펫의 왓 프라께오에서 모셔지다가 버마의 침략으로 불상은 아유타야에서 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한 세기가 흐른 뒤 태국 북부 치앙샌(Chiang Saen)에서 폭풍우로 씻겨 내려간 흙무더기 속에서 '프라께우'는 다시 나타났다. 불상은 란나왕국의 수도 치앙라이로 옯겨졌고 수도가 치앙마이로 옮겨짐에 따라 불상도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불상을 옮기는 코끼리가 목적지인 치앙마이로 가지 않고 람팡으로 가려고 해 이를 부처님의 뜻이라 여기고 람팡의 왓 프라께오 돈타오(Wat Phra Kaew Dontao)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1468년 쩨디 루앙의 불탑을 완성한 틸로카랏 왕은 람팡에 있던 에메랄드불상을 가져와 쩨디 루앙의 동쪽 벽감에 봉안하였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6세기 중엽, 란나 왕국의 공주와 란쌍 왕국의 왕자가 혼인을 하여 1545년에서 1548년까지 두 나라는 연합 상태였는데, 란나 왕국의 켓끌로(Ketklo) 왕이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자 왕국은 라오의 란쌍 왕국 포티싸랏 왕에게 넘어간다. 포티싸랏은 치앙마이를 '세타티랏'왕에게 맡긴다. 버마의 위협을 피해 수도를 루앙프라방에서 위앙짠으로 옮긴 세타티랏왕은 1565년까지 란나를 다스리고 치앙마이를 떠난다.

 

이 때 세타티랏왕은 프라께우를 루앙프라방으로 가져갔고 위앙짠으로 수도를 옮기고 '파케우' 사원을 세우고 그 곳에 불상을 모셨다. 이로부터 에메랄드불상 '프라께우'는 200년이 넘는 기간을 라오스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18세기 말 버마를 내쫒고 아유타야의 옛 땅을 회복한 타이족의 톤부리(Thon Buri)왕국 탁신왕과 짜크리(Chakri)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위앙짠을 공격하고 '파케우' 사원에 보관 중이던 에머럴드 불상을 가지고 톤부리(Thon Buri)로 가져간다. 그리고 탁신왕을 살해하고 짜크리 왕조가 들어서며 불상은 새벽사원 '왓 아룬(Wat Arun)'으로 옮겨졌고, 1784년 왕실사원인 '왓 프라깨우(Wat Phra Kaew)'가 세워지고 에메랄드 불상을 봉안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 남동쪽에서 보면 기단부 2층에는 코끼리상이 사라지고 없고 흔적들만 남았다.

 

 

 

 

 

기단부, 쩨디(불탑)의 4면 벽 감실에 안치된 불상을 향하여 오르는 사방의 계단 입구에는 거대한 나가상(태국어로는 낙)이 지키고 서 있다. 인도 신화에서 대지의 보물을 지키는 반신(半神)으로 남신을 '나가', 여신을 '나기니'라고 한다.

 

이들은 하반신은 뱀, 상반신은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머리 뒤쪽에는 용개(龍蓋)가 붙어 있다. 불교와 힌두교 사원에서 불전과 불탑을 수호하는조각으로 많이 표현된다.

 

 

▼ 나가상 앞에서 여고생으로 보이는 현지 학생들이 서양인 남자를 붙들고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같이 찍으며 놀고 있다.

태국 여성들이 백인 남자에 대해서 로망이 있다고 하던데... 그런 모습인지 과하게 친한 행동을 보인다.

 

 

 

 

 

 

 

힌두교의 우주관에서 세계는 7층의 지하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지하세계의 맨 마지막 층인 파탈라(나가로카)라는 세계에는 수많은 나가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선한 나가도 있고 악한 나가도 있다. 나가는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부족의 왕을 나가라자, 즉 용왕이라 하고 용왕들 중 가장 연장자인 세샤(또는 이난타)가 모든 나가를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앙코르왓 사원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나가인 바수키는 바다 젓기 전설에서 밧줄 대신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악마를 물리칠 힘을 가진 허리띠로 시바가 착용했다. 최고신 비슈누는 휴식을 취할 때 세샤 위에서 잠이 든다. 세샤의 머리는 신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지만, 세샤의 하품은 지진을 일으킨다.

 

불교에서 나가는 불교 경전을 수호하는 물의 신으로 종종 간주된다. 한 전승에 따르면, 나가는 불교 철학자 나가르주나를 자신의 왕국으로 데려갔다. 이곳에서 나가르주나는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바라밀다경>을 재발견했다. 고타마 붓다는 인간이 이 경전을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나가에게 맡겼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서는 용왕 엘라파트라가 인간으로 둔갑하고 붓다의 설법을 들었다. 용왕들은 고타마 붓다의 생애를 묘사한 불전도에서도 볼 수 있다. 용왕 중 하나인 무칠린다는 태풍이 부는 동안 똬리를 틀어 고타마를 에워싸고 목 부분을 넓게 펴서 명상에 든 붓다가 비를 맞지 않도록 보호한다.

 

용왕은 비를 관장하고 강, 호수, 바다를 지킨다고 한다. 또한 번개로 인한 화재에서 지켜준다. 나가는 봄에는 하늘로 오르고 겨울에는 지하 깊은 곳에 산다.<이상 위키 백과사전 참고>

 

 

 

  

 

 

 

 

쩨디 루앙을 보기가 가장 좋은 때는 부처님 오신날 축제의 저녁에 위안 티안(wian tian) 의식을 거행할 때라고 한다. '위안 티안'은 등불을 들고 탑을 도는 의식이다. '위안 티안'이라는 용어는 어감상 아마도 중국어에서 온 듯한데, '원(圓)을 도는 것'을 뜻하고 '티안'은 '등(燈)'을 뜻한다.

 

 

쩨디의 남쪽에 있는 이 불당은 무엇일까. 어두운 색상의 세겹 이층 지붕과 정면의 화려한 장식이 대조적인데 불당 입구 계단에 우람하게 서 있는 나가상이 위엄 있고 아름답다.

 

 

 

 

 

 

쩨디루앙 앞마당에는 엊저녁(2010. 1.18)에 있었던 치앙마이의 최고승 다비식 흔적이 남아있다. 스님의 이름을 비앙이라고 들었는데, 웹페이지에는 찬 쿠살로(Chan Kusalo, 1917~ 2008)라고 밝히고 있는 자료가 떠 있다.

 

몇몇 사람들이 불탄 자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지 쪼그려 앉아서 손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다.

 

 

 

 

 

 

▼ 다비식 장면. 이 스님의 다비식은 아니지만 참고 자료로 인용한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Ubud_Cremation_1.jpg에서 인용

 

 

File:Ubud Cremation 1.jpg

 

 

 

 

사원을 돌아본 지 겨우 30분쯤 지나가고 있을 뿐인데 벌써 하늘이 어두워 온다.

 

이것은 무슨 건물일까. 차근히 살펴볼 여유가 없으니 그냥 지나치고 만다.

 

 

 

 

 

쩨디 루앙의 서쪽 끝에는 열반에 드는 와불(reclining Buddha)상이 모셔진 불당이 있다. 어떤 영문 안내서엔 옆에 모셔진 불상을 Sangkhachai 불상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불전의 맨 오른쪽에는 예전 '금복주'의 상표와 같은 풍만한 석조 불상이 붉은 의상을 하고 앉아 있다. 중국 윈난성 웬양(남사)에서 보았던 관음상 비슷하다.

 

 

 

 

 

와불. 석가모니 열반상이다. 동남아 사원의 와불은 크고 화려한 와불만 있을 뿐, 석가모니의 임종을 맞는 제자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지 않아 보는 재미가 덜하다.

 

 

 

 

 

 

쌍둥이 불상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가리켜Sangkhachai라고 하는 걸까...

 

 

 

 

▼ 어두워 플래시를 터뜨려 본 모습이다.

 

 

 

 

 

 

해가 넘어간 지 오래, 어스름 짙어오는 쩨디 루앙의 하늘엔 초승달이 떴다. 고승의 다비식이 이루어진 다음날 저녁에 바라보는 정월 초엿새 초승달이어선지 묘한 감회가 일어난다.

 

 

 

 

 

조기영, 고민정 부부는 이곳에 더 머물다가 가겠다고 하여 작별을 고한다. 우리는 저녁에 방콕으로 떠나니 다시 또 만나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이렇게 만나고 헤어짐이 있으니 여행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우리는 다시 코리아 하우스로 와서 저녁 식사를 한다. 저마다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먹는다. 나와 이 선생님은 된장찌개, 오선생님은 순두부, 김 선생님은 오징어볶음... 이렇게 각자 다른 메뉴로 식사를 하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한국에서 식재료를 공수한다는 이 집의 음식 솜씨는 꽤 괜찮다.

 

김 선생님이 고민정 씨로부터 들었다며 일제고사 거부 교사들과 시국선언 교사들, 그리고 피디수첩 기자들까지 연이은 무죄판결 소식을 전하니, 검찰을 동원하여 비판세력을 마구잡이로 짓밟는 이명박 정권의 조폭적인 행태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절로 흘러간다. 그런데 우리가 식사를 하는 옆에는 억양 센 경상도 중년 남녀들이 식탁에 앉아 몹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는데, 오 선생님 이야기론 이들이 우리들 이야기를 들으며 못마땅하게 째려보곤 했다 한다. 고소영 권력은 이렇게 뿌리 깊다.

 

 

음식의 맛은 괜찮았지만 이용 전화 요금과 택시 이용 등에 다소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하며 코리아하우스를 떠난다. 7시 30분, 호텔 앞 큰길에서 택시(쌈러 비슷한 봉고형)를 잡아 타고 공항으로 향하였다. 150바트 달라는 것을 100바트로 흥정하고..../span>

 

 

그리고 9시 30분,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2박 3일 일정의 방콕을 향해 치앙마이의 어두운 하늘로 날아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