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5), 석조 감실,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마애석불

모산재 2011. 1. 3. 15:30

 

헌강왕릉을 나와 보리사 석불여래좌상을 향해 걷는다. 남산을 끼고 동쪽의 너른 경주벌판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여유롭고 상쾌하다. 가끔씩 쌩쌩 달려가는 차들이 평화를 깨뜨리기도 하지만...

 

 

그리고 금방 화랑교육원을 지난다. 화랑교육원은 통일전보다 먼저 1973년에 세워진 최초의 학생교육원이니 아마도 국민교육헌장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교육원 내에 불상을 모셔두던 석조 감실(경북 문화재자료 제6호)이 있다고 하는데 모르고 그냥 지나쳤다.

 

자연 면석으로 감실을 만든 것인데 불상을 모셨던 길쭉하고 둥근 대좌가 남아 있다고 한다. 최초의 인공석굴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문화사적 의의가 있다고 한다.

 

 

다음은 문화재청 사진 자료다.

 

 

 

 

 

석조 감실을 지나니 갈은 꺾어져 들판 쪽으로 향한다. 꺾어지는 지점에서 남산 아래로 곧장 이어지는 뚝방 길이 있는데 울타리가 쳐져 있다. 다행히 쪽문이 열려 있어 들어서는데, 이곳은 경북 산림환경연구원 구내이다.

 

넓은 터에 임업시험장을거느리고 있어 수목원 구실을 겸하고 있다. 야생식물원, 화목원, 방향식물원, 습지생태원, 야생동물원, 온실 등이 고루 갖춰져 있어 좋은 계절에 찾는다면 볼거리가 꽤 많을 듯싶다.

 

 

 

다시 반대편 쪽문을 나서니 마을길로 들어선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마을은 갯마을로 옛날에 나룻배가 닿던 곳이라 한다.

 

골목을 나서니 곧장 가는 길과 함께 바로 넓은 대밭을 끼고 남산쪽으로 길이 꺾이며 산속으로 가파른 콘크리트길이 보인다. 보리사임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보이지 않지만 느낌으로 산쪽으로 접어드는 길을 선택한다.

 

느낌이 맞다. 금방 소나무 늘어선 사이로 종각이 올려다 보이고 보리사가 나타난다.

 

 

 

 

 

아담하고 느낌이 좋은 절이다. 정갈한 느낌에 딱 맞게 비구니들이 수도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은 대웅전과 산신각, 종각과 요사채가 모두인데, 다 근래에 새로 세운 이 건물들이다. 그런데 이 절이 지금 남산에 현존하는 가람 중에서 제일 규모가 큰 것이라고 한다. 

 

이 절의 존재는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49대 헌강왕의 능과 50대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 동남쪽에 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 절은 두 왕릉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옛날 신라시대부터 보리사라 불려 왔음을 알 수 있다.(현재의 보리사가 당시의 보리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이 절의 앞마을은 예전에 배가 들어오는 갯마을이었고, 절의 뒤쪽 계곡을 미륵골이라 한다. 그래서 흔히 '보리사 석불좌상'이라고도 불리는 보물의 정식 명칭은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이다.

 

 

석불은 삼성각 남쪽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축대 위로 상체만 보이는 부처님 모습에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엄숙한 듯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가 내밀하게 번지는 듯한 묘한 매력...

 

 

 

 

 

불상은 울창한 소나무 숲과 육중한 바위들이 배경을 이룬 미륵곡에서 기와를 얹은 정감 넘치는 흙돌담에 안겨 높은 연꽃대좌 위에 앉았다. 화강석으로 새겨진 여래상은 둥근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마귀를 누르고 하계를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저절로 합장하게 할 만큼 거룩한 모습이다.

 

바로 이 부처님이 현재 남산에 남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장 온전한 모습의 전신 석불좌상이다.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한 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높게 솟아 위엄을 나타내고 있으며, 삼각을 이룬 코, 그 밑에 조용히 다문 입술의 양가에 자비로운 은은하게 번지고 있다. 포물선으로 약간 치켜 올라간 긴 두 눈썹사이엔 큰 광명을 비추는 백호의 흔적이 패어져 있다. 두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졌는데, 목에는 세 줄로 주름(삼도)이 새겨져서 부드럽게 몸체와 연결되어 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인데, 손길은 부드럽고 자비로워 박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이 불상은 전체적으로 한없는 부드러움과 자비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강한 힘이나 박력같은 것은 찾을 수 없다. 머리에 비해 다소 연약해 보이는 몸체는 그런 느낌을 강화하고 있다. 아마도 이 불상의 조성 시기인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전성기의 예술적 경향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상과는 별도로 마련해 놓은 광배는 매우 화려하고 장식적인데, 광배 안에는 작은 부처와 보상화·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와 형태가 비슷하면서도 장식적인 경향이 좀더 강하다.

 

불상은 사람의 형상을 기본으로 종교적인 이상을 가미하여 사람과 다른 32길상을 표현하는데 , 그 중 부처님의 몸에서는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진다고 하여 '장광상'이라 한다. 불상 뒤의 넓은 광배는 바로 이 장광상을 나타낸 것이다.

 

보리사 여래좌상의 광배는 여섯송이의 연꽃으로 장식된 두 줄기의 주연선을 불상 몸체의 뒤에 타원형으로 돌려 신광을 나타내었고, 또 다섯송이의 연꽃으로 장식된 두 줄기의 주연선을 머리 위에 원형으로 돌려 두광을 나타내었다.

 

신광과 두광에는 구불구불 뻗어 오른 줄기와 잎사귀 사이에 간간이 핀 일곱송이의 연꽃 위에 작은 여래불들이 새겨져 있다. 그 부처들을 화불(化佛)이라고 한다. 주연선 마디 마디에 연꽃을 장식한 것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연꽃처럼 깨끗한 정토가 된다는 뜻이고, 간간이 작은 화불들을 배치한 것은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그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뜻이라 한다.

 

주연선 바깥 둘레에는 타오르는 불길이 새겨져 있는데, 불길은 부처님의 빛과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석불좌상의 광배는 화려함과 정교함에 있어 우리나라 석불광배 중 손꼽히는 것인데, 아깝게도 깨진 윗부분 조각이 없어졌다. 후세에 다른 돌을 다듬어 보수하였으나 옛 모습은 되살리지 못하고 흉한 상처로 남아있다.

 

 

 

 

 

가사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으로 입었는데, 반대편 옷자락이 어깨 뒤로 넘어와서 오른쪽 어깨를 덮고 있다. 잘게 잡은 옷주름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부처님 몸체를 감돌며 잔잔히 물결친다.

 

 

 

 

 

 

 

 

부처님이 앉은 앙련대는 세겹으로 핀 큰 연꽃송이로 되어 있는데, 꽃잎이 백제식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므로 화려한 광배와 부드러운 이 불상이 잘 어울린다.

 

 

팔각 중대석 밑에 처진 열여섯 잎 연꽃송이는 꽃잎마다 두 줄씩 돋을 새김하여 부풀어 오르게끔 변화를 주었다. 3단괴임 위에 여덟 개의 기둥으로 앙련 상대석을 떠 받고 있는 팔각 중대석은 생기와 힘을 보태어 불상 대좌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불상의 조성 연대는 석굴암 시대가 지난 후인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 마애약사여래좌상

 

이 석조여래좌상의 광배 뒷면에 모든 질병을 구제한다는 약사여래불을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 놓았는데, 이러한 형식은 밀양 무봉사나 경북대 광배 등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예이다.

 

약사여래상은 얕은 돋을새김과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얼굴 등의 세부 모습은 마모되어 확인하기 어렵다. 높이는 1.3m로서 연화문이 이중으로 된 앙련 연화 대좌 위에 여래상이 결가부좌하고 있다. 머리에 육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늘어뜨려져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며 얼굴은 둥글다. 얇은 법의는 신체를 드러내 보여주며, 수인은 왼손에 둥근 약합(藥盒)을 들고 있어 약사불임을 알 수 있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있는 설법인이다.

 

 

▼ 깨져 나간 광배 윗부분을 보수하여 붙인 자욱이 선명하다.

 

 

 

 

 

약사여래는 중생을 모든 병고에서 구하고 무명(無明)의 고질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부처이다. 정식으로는 약사유리광여래(藥師瑠璃光如來)라고 하며 병을 고쳐주는 위대한 부처란 뜻으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처는 과거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12가지 서원(誓願)을 세웠는데 그 첫 번째가 '내 몸과 남의 몸에 광명이 비치게 하려는 원'이다.

 

연화대좌 밑에는 피어 오르는 구름이 새겨져 있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광세계를 제도하는데, 그 반대편은 서방 극락세계이므로 반대편으로 앉아 계신 석조여래좌상을 아미타여래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불상의 앉은 방향이 맞지 않은 점은 이러한 추정에 의문점이 아닐까 싶다.

 

또 하나, 어떤 이는 이 여래불이 앉은 위치로 보아 이 불상은 석굴사원과 비슷한 형태로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한다. 석불의 뒤쪽 공간이 넓은 것과 석불상의 뒷면에 약사여래상을 새긴 것도 그 뒤의 공간이 예배공간이었음을 나타내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마애보살입상이 있었다고 한다.

 

 

■ 보리사 마애보살입상

 

이 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석조여래좌상 오른쪽의 큰 바위 주변에 축대석으로 이용되어 세워져 있었으며, 그 전인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이 축대 위에 건물이 들어서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자리에 건물과 축대 모두가 없고 판석들은 다른 석재와 함께 담쪽에 엎어져 있어 확인이 어렵다. 기존 자료에 의하면 판석은 모두 3매로서 폭 70㎝, 높이 120㎝ 크기이며 그 표면에 보살입상들이 각각 조각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마애상들은 본래부터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던 듯하며, 그 일부는 사진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을 뿐 근래에 정비 복원된 현재의 사찰에는 판석(板石)들에 조각된 이 마애보살입상을 볼 수 없다.

 

 

 

보리사에는 또 다른 부처님, 마애석불이 있다고 하는데, 석조여래상의 감동에 빠져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보리사를 나와 버렸다. 안타깝지만 문화재청의 사진 자료를 감상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 보리사 마애석불/ 경북 유형문화재 제193호

 

보리사 앞에서 남쪽 기슭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로 50m쯤 가면 경사가 급한 산허리에 동쪽을 향해 절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이 있다.

 

보리사의 석불좌상보다 후대에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바위는 넓적한 반원형이어서 불상을 새기기에 안성맞춤형으로 보이는데 높이와 너비는 약 2.4m이다. 바위벽을 얕게 파 높이 1.5m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약 0.9m 정도의 작은 부처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양쪽 뺨 가득히 자비 넘치는 미소를 간직하고 앉아 있는 불상은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거친 편이다. 특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수록 선을 그은 것처럼 얕게 새겨 매우 독특한 조각수법을 나타낸다.

 

낮은 육계가 있는 머리는 역시 나발이 표현되었고 두 귀는 옷깃에 닿을 듯 내려왔고 삼도가 있는 목은 짧다. 살이 올라 퍼진 얼굴은 사각에 가깝고 활(弓)형 눈썹에 가는 눈, 넓적한 코와 꽉다문 입술 등의 표정이 보인다.

 

법의는 통견인데 수인은 옷주름이 덮고 있어 알 수 없으며, 결가부좌한 하체 역시 상체에서 내려온 옷주름이 덮여 있고 그 표현도 소홀하여 모습이 뚜렷하지 못하다. 대좌는 3잎의 중판연화가 앙련인 상태로 표현되었다.

 

 

불상의 높이는 1.1m에 지나지 않으나 발 아래에는 급경사로 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볼 때 하늘에 떠 있는 느낌을 갖도록 하고 있다. 멀리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는 낭산이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고, 사천왕사·망덕사·황룡사도 한 눈에 들어온다.

 

 

 

 

다음으로 찾아가야 할 곳은 탑골 마애석불군.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