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4) 헌강왕릉

모산재 2011. 1. 2. 23:42

 

오전 반나절이 지나가는 시간인데도  바람이 맵다. 바람은 매워도 햇살이 명랑하니 기분도 절로 명랑하다. 남산을 곁에 끼고 걷는 시분은 그야말로 '왔다!'다.

 

 

 

 

남산 안내소에서 안내 팸플릿과 엽서 몇 장을 챙겨 들고 통일전을 지난다. 삼국 통일의 위업을 기리며 통일에의 의지를 다진다는 명목으로 유신 말기인 1977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지은 것이다. 취지와는 반대로 그는 가장 반통일적인 인물이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긴 전두환도 민주화 일정을 밝히기를 요구하는 민중들을 총칼로 무찌르고 '정의사회 구현'을 외치지 않았던가. 이들의 뒤를 이은 정치 세력들은 지금도 남북 대결 정책을 펼치며 전쟁 불사를 외치고 있다.

 

 

 

통일전 지나자마자 정강왕릉이 나와야 되는데 표지를 보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쳤다.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으로 헌강왕을 이어 50대 왕이 되었지만 2년만에 죽고 누이동생인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다. 무덤은 헌강왕과 같은 형식이라고 한다.

 

 

 

 

헌강왕릉을 가리키는 팻말이 나타나 숲길로 들어선다.

 

 

남산의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줄기가 굽은 것이 강원도에서 보는 쭉쭉 벋은 소나무들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 시골 동에 소나무도 이와 같이 굽은 모습이니 더욱 정겹다. 아마도 남도의 소나무들은 대개 이렇게 굽은 모습인가 본다.

 

 

 

 

 

100미터쯤 걸어갔을까. 금방 왕릉의 모습이 나타난다.

 

 

 

 

 

처용 설화가 있었던 시대, 그래서 더욱 신비스러움이 강하게 느껴지던 왕의 무덤이라서 독특한 분위기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덤은 뜻밖에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다. 번영하던 통일신라가 쇠퇴해가는 시기이긴 했지만 헌강왕은 꽤 멋진 왕이었고 치세가 훌륭하지 않았던가.

 

 

 

 

 

신라 제49대 헌강왕!

 

왕위에 있었던 기간은 9세기 후반 10여 년(875∼886)이다. 그는 경문왕의 태자로서 성품이 명민하고 글읽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왕위에 올라 황룡사에 백고좌(큰 법회)를 열고 국학에서 박사로 하여금 강론하게 하는 등 문치에 힘썼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는데, 도로부터 해변에 이르기까지 집이 늘어섰는데 초가집은 없고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신하로부터 헌강왕이 전해들은 형식의 기록으로, 부유함은 신라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金入宅: 신라 전성기의 부호들)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 일길찬 신홍 등의 반란이 일어난 것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헌강왕 때에는 다음과 같은 기이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서라벌 북쪽 금강령에 갔을 때는 북악신과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다. 그 춤에서 '지리다도파(地理多都波)'라 하였는데, 이것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리 알고 도망하여 도읍이 장차 파괴된다는 뜻이라 한다.

 

<삼국사기> : 879년에 왕이 나라 동쪽의 주군(州郡)을 순행할 때 어디서 온지를 모르는 네 사람이 어가를 따르며 춤을 추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 동해안의 개운포(開雲浦)에 놀러갔다가 동해 용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처용을 만나 데리고 왔는데, '처용가'가 만들어지고 나중 처용무가 생기게 되었다.

 

 

이 두 이야기는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처용을 지방세력가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대에 기인제도(其人制度)가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 신라 헌강왕릉 / 사적 187호

 

 

<삼국유사>에 '왕은 12년을 다스리다가 서기 886년에 돌아가시니 보리사 동남쪽에 장사시냈다' 하였다. 일찌기 도굴되었으며 비에 의한 피해로 긴급조사를 하였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능 주위를 돌아보던 김 주사는 눈길을 무덤 꼭대기에 돌리는 순간, 붙어 있던 간이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얼보였나 싶어 눈을 닦고 다시 보았지만, 왕릉 위가 움푹 들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들었던 우산을 던져버리고 손발을 다 써가며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겨우 왕릉 위로 올라가 보니 너비가 한발이나 되게 구멍이 휑뎅그렁하게 뚫려 속이 컴컴하였다.

부리나케 경주시 사적공원 관리사무소에 신고를 하였다. 시에서는 즉각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와 경북도청 문화체육과에 이 사실을 보고하였으니, 1993년 8월 12일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며칠 동안 내린 장마로, 도굴되었던 부분의 봉분이 내려앉은 것이었다. 이 때문에 헌강왕릉을 복원, 보수하기 위해 경주문화재연구소가 유구 조사와 유물 확인을 했고, 유성건설이 복원공사를 맡아했다.
-<경주남산연구소> 자료에서

 

 

높이 4.2m, 지름 15.3m, 밑둘레는 50미터의 둥근 형태로 흙을 쌓았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무덤 밑둘레에 4단으로 돌을 쌓았다. 무덤 보호를 위해 다듬은 돌을 4단으로 쌓은 형태는 신라 왕릉에서는 특이한 형식으로 정강왕(886∼887)릉에서도 보인다.

 

관이 놓여 있는 방은 네모 형태로 천장은 둥글게 모아져 있는 활천장(궁륭상천장)이고, 이 방과 연결된 통로인 널길(연도)은 동쪽에 있어 전체적으로 ‘ㄱ’자형이다. 여러 차례의 도굴로 빗자루로 쓴 듯 남아 있는 게 없었고 나무 부스러기가 조금 있었는데 분석한 결과 소나무, 굴참나무임이 드러났다. 그 밖에 유리 구슬 몇 조각과 아주 가는 금실과 자그마한 금판, 꽃무늬 토기 조각이 남아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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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강왕(재위 875∼886)

신라 49대 헌강왕(憲綱王)은 이름이 정(晸)이며, 경문왕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문의황후이며, 왕비는 의명부인이다. 왕은 성품이 명민하였으며, 글읽기를 좋아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보면 입으로 모두 외웠다. 왕 6년 9월 9일 좌우 신하들과 더불어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니, 서라벌에 민가가 즐비하고, 노래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왕이 시중 민공을 돌아보면서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짚이 아닌 기와로 지붕을 덮고, 나무가 아닌 숯으로 밥을 짓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이어서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음양이 조화를 이루고, 바람과 비가 순조로워서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며, 변경이 안정되어 즐거워하니, 이는 임금님의 어진 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왕이 즐거워하며 "이는 그대들의 도움이지, 나에게 무슨 덕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다음 해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는데, 왕은 취하여 거문고를 타고,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면서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또 왕이 포석정에 나갔는데 남산 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므로 왕이 따라 추였는데 그 춤 이름을 어무산신춤, 무상심춤이라 한다. 또 왕이 서라벌 북쪽 산인 금강령에 갔을 때에 북악 귀신이 춤을 추어 보였는데 춤 이름이 옥도금이었다. <삼국유사>에는 평화스런 어느 때 왕이 개운포에 나가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난 뒤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길을 잃었다. 왕이 괴상하게 여겨 측근에게 까닭을 물으니 천문 맡은 관리가 말하기를 "이는 동해 용의 장난이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만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관원에게 명령하여 용을 위해 근방에 절을 세우라고 했더니, 명령이 떨어지자 말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져버렸다. 이 때문에 이 곳을 개운포(開雲浦)라고 이름 지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곧 아들 일곱을 데리고 임금이 탄 수레 앞에 나타나 왕의 덕행을 찬미하면서 춤과 노래를 연주하였다. 그의 아들 하나가 임금을 따라 서라벌로 들어와서 왕의 정치를 보좌케 되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 하였다. 그 처용이 지은 노래와 춤은 처용가무로서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왕 5년에 '동쪽 지방을 돌아보았는데, 그 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넷이 왕 앞에 와서 노래 부르고 춤추었다. 그들의 모양이 무섭고 차림새가 괴이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이라고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학자들은 2가지를 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경주남산연구소> 자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