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2) 서출지(書出池)와 이요당(二樂堂), 무량사

모산재 2011. 1. 1. 14:36

 

어제 강행군을 한 탓에 좀 늦게 일어났다. 숙소 옆 좀 허름한 식당에서 갈치조림을 시켜서 아침을 먹는데 맛이 그만이다. 경상도 음식맛이 별로라고 하지만 이렇게 괜찮은 집들도 간혹 있다.

 

 

 

오늘은 어제와는 반대편인 남산의 동쪽인 남산리로 가기로 한다. 거기서 서출지(書出池)와 삼층석탑을 구경하고 남산 언저리를 따라 북쪽으로 걸으며 탐방하기로 한다. 헌강왕릉, 보리사 석조여래좌상, 탑골마애불상군, 불곡감실보살좌상을 기본으로 삼고 시간이 허락된다면 거기서 남산신성을 지나 남간사지 당간지주, 창림사 삼층석탑, 포석정 순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시외버스터미널로 나가 버스를 타려다가 택시를 타 버린다. 영하 5도나 내려간 날씨에 기다리기가 싫고 또 삼릉골 가는 것과 택시비가 얼마나 차이가 나랴 싶어서였는데, 남산리에 도착하고 보니 곱절이나 나온다.

 

 

어쨌거나 남산리 남산안내소 옆 주차장에 도착하니, '경주역사유적지구'라고 새긴 비석이 맞아준다.

 

 

 

 

 

주차장을 지나 남쪽 방향에 있는 서출지로 향한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관자놀이와 귓불이 얼얼하고 손은 시려서 곧아온다. 비워두고 온 집 수도 계량기 터지지는 않았을려나...

 

 

그리고 바로 앞에 나타나는 서출지(書出池).

 

 

초등학교 시절 '자유교양협회'라는 단체에서 펴낸 책을 읽는 '고전 읽기'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 때 읽었던 <삼국유사 이야기>라는 책에서 '거문고 갑을 쏘아라'라는 이야기는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바로 그 이야기의 무대를 지금 만나는 것이다.

 

 

 

 

■ 서출지(書出池) / 사적 제138호

 

 

남산의 동쪽 철와골 앞 마을에 포근하게 자리잡은 아담한 크기의 연못, 아침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서출지는 평화롭다. 발을 담근 듯한 남산에 아늑하게 안겨 있는 곳, 동쪽 경주벌판 쪽으로 탁트인 곳은 불어오는 바람을 포근하게 막아줄 듯 둑방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울을 두르고 있다.

 

 

그리고 연못가에는 멋드러진 정자 하나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요당(二樂堂)'이라고 부른단다.

 

 

 

 

 

이곳 서출지에 얽힌 설화로 초등학교 때 읽었던 삼국유사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天泉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주고는 물 속으로사라졌다.

신하가 돌아와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봉투에는,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 보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소지왕이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여 열어 보지 않기로 하자 일관이 한 사람은 임금님을 뜻하고 두 사람은 평민을 가리키는 것이라며 열어 보기를 간청하자 왕은 봉투를 열었다. 거기에는 '사금갑(射琴匣)'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 거문고 갑을 쏘라는 뜻이다.

왕은 급히 대궐로 돌아와서 왕비의 침실에 세워 놓은 거문고가 든 상자를 겨누어 화살을 날렸다. 금갑 속에서 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왕실 내전에서 불공을 보살피던 중이 왕비와 정을 통하고 임금이 나간 뒤에 금갑 속에 숨어 있다가 왕을 해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왕비가 사형 당하니 두 사람은 죽고 왕은 위기를 면해 살게 되었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였다. 이 날이 바로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임금은 이 날을 기념하여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집집마다 오곡밥을 조금씩 떠서 담 위에 얹어 까마귀와 까치를 위하게 했다.

 

 

 

 

 

지금도 경주지방에는 정월 보름날 아이들이 감나무 밑에다 찰밥을 묻는 '까마귀 밥주기' 풍속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부터 우리 나라 사람들은 매달 첫 돼지 날과 첫 쥐날, 첫 말 날에 모든 일을 조심하고 어디로 나가는 것을 삼가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마을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원래 서출지는 이곳에서 약 400m 남쪽에 있는 탑 마을에 있는 양피 못이라 한다. 양피못은 바로 남산리 삼층석탑 동쪽에 있는 연못인데, 서출지와는 달리 황량하여 낚시터로 이용되고 있다.

 

 

▼ "봉투를 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는 편지의 내용을 적어 놓았다.

 

 

 

 

 

 

 

■ 이요당(二樂堂)

 

 

이 건물은 서출지 서북쪽 가장자리 축대 위에 서 있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남산을 배경으로 반은 땅 위에 있고 반은 물위에 있는 정(丁)자 모양 서 있으니,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 이름이 제격이다. '이요(二樂)'라 함은 요산요수(樂山樂水)를 이름이니, 남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서출지 맑은 물에 기둥을 담근 정자의 멋을 표현한 것이다.

 

 

1663년 가뭄이 심하여 마을 임적(任勣)이 사람들의 만류에도 연못 옆에 우물을 팠는데 물이 치솟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664년(현종 5년)에 착공하였으며 임적의 호를 따서 이요당(二樂堂)이라 이름지었다. 이곳에서 임적은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1730년대에 중수하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한다. 당초 정면 3칸, 측면2칸으로 지어졌던 건물의 한쪽 측면에 1칸 폭의 5칸 긴 건물을 달아내고 그 끝은 연못 위에 세워진 누각식으로 꾸몄다. 현재는 ㄱ자형 건물로 주위는 높이 2m의 막돌담을 쌓아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방을 들여 놓은 정자라 이름을 '당(堂)'이라 붙인 듯하다. 살펴보니 남쪽으로는 마루로 개방되어 있는데, 동쪽으로는 문을 열고 들어 올릴 수 있는 분합문(分閤門 )으로 되어 있다. 북쪽은 나무 판자로 벽을 만들어 바람을 막아 놓았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문이 잠긴 상태인데, 내부에는 석등 대좌 2기와 석등 상대석 1기가 정원에 놓여져 있으며, 화형 초석 등 다양한 석조물들이 있다.

 

 

석등 대좌와 상대석이하 사진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자료)

 

 

 

 

 

주춧돌로 쓴 석등 대좌

 

 

 

 

 

꽃 모양 주춧돌

 

 

 

 

 

수조

 

 

 

 

 

 

서출지의 남쪽에서 바라본 풍경. 서출지의 동쪽 둑방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뤄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소나무가 바람을 막아주며 따스한 햇살을 받은 개나리가 영하의 차가운 날씨에도 꽃망울을 터뜨렸다. 이 계절 남도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벼 그루터기가 보이는 빈 논을 배경으로 띠 이삭이 하얀 꽃처럼 피어 있다. 저 하얀 이삭이 피기 전, 연한 꽃으로 포에 싸여 있는 것을 삘기라고 한다. 옛날 아이들이 봄철에 뽑아 먹었던 간식...

 

 

 

 

 

 

 

■ 무량사(無量寺)

 

 

서출지를 바로 옆에 두고 서쪽 남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절이다.

 

 

정문이 일주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고, 양쪽으로 흘돌담을 두른 양식이 특이하다. 왼쪽 담장 너머로 보이는 종각과 함께 이 절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인다.

 

 

 

 

 

맷돌을 징검다리처럼 배열해 놓은 넓은 마당, 햇살 따스하게 받고 있는 ㄷ자형의 절집은 민가처럼 아담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그런데 이 절집은 원래 서출지 이요당의 소유자인 풍천 임씨(임적 선생의 후손)의 종가집이었다고 한다. 법당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400년이 넘은 건물로 40여 년 전에 법당으로 개조한 것이라고 한다.

 

 

삼층탑과 쌍사자 석등, 멀리 용장사터 석조여래좌상을 본뜬 듯한 원반형의 삼층 대좌에 앉은 불상이 눈에 띄는데 모두 최근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산리에 온 가장 큰 목적, 삼층석탑을 찾아 갈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