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0) 최고의 감동, 국보 제312호 칠불암 마애석불

모산재 2010. 12. 29. 14:31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의 감동을 가슴에 간직한 채 칠불암으로 향한다.

 

 

길은 능선을 따라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모래바위라 발이 자꾸 미끄러진다.

 

 

길가에 이층으로 포개진 바위, 그 바위틈에는 불심이 빼곡하게 놓였다. 딱히 바람이랄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도 작은 돌 하나 살며시 얹어 놓는다.

 

 

 

 

 

 

건조하고 딱딱한 모래바위(사암)에 불구하고 생명이 어찌 이리 묘한 모습으로 뿌리를 내렸을까...

 

 

 

 

 

급비탈에 이르러서는 제대로 된 길이 아니다. 잘 자라지 못한 소나무 줄기를 잡으며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가서야 비로소 죽죽 벋은 신이대가 싱그러운 울을 이룬 평탄한 삽작길이 나타난다.

 

언덕의 용틀임하는 나무 뒤로 석축이 보이고, 그 위로 두 개의 커다란 바위의 실루엣이 나타난다. 앞의 바위는 사방불, 뒤의 큰 바위삼존불을 새긴 바위다.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눈앞에 펼쳐지는 불상들의 모습에 정신이 아찔해진다. 좀체로 감동이 없는 체질인데도 나도 몰래 '아~'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정면에 서서 바라보는 일곱부처님 바위.

 

 

맨 앞에는 사면 돌기둥에 새겨진 네 분의 앉은 부처님, 그리고 그 뒤에는 반원형의 바위 면석에 새겨진 세 분의 부처님. 모두 일곱분의 부처님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깎아지른 듯 솟아 있는 암릉 앞에 모셔져 있다. 암릉에는 보리수나무보다도 더 푸르른 소나무들이 부처님을 호위하듯 울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암릉의 맨 꼭대기에는 방금 다녀왔던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이 어렴풋이 보인다.

 

 

 

 

 

 

 

■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 국보 제312호

 

 

칠불암은 봉화대를 향해 오르는 바위 능선 중간에 자리잡고 있다. 칠불암 앞의 계곡을 그래서 봉화골이라 부른다. 신선암에서 칠불암으로 흘러내리는 바위 능선은 주변의 다른 능선을 압도할 정도의 위엄을 가지고 있으며 동쪽의 너른 경주 들판을 시원스레 굽어보는 장소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바위 능선의 아찔한 꼭대기 남향 벽면에는 보살반가상을 새기고, 그 아래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이룬 바위 절벽을 배경으로 석단을 쌓은 다음 부채처럼 펼쳐진 바위를 깎아 석가모니 삼존불을 새기고 그 앞에 서 있는 네모난 바위에는 사방불을 새겼다. 마애삼존불에 사방불을 더하여 일곱 분의 부처를 새겼으니 이름이 칠불암이 되었다.

 

남산의 최고봉 수리산(고위산)을 오르다 하늘을 이고 있는 바위 절벽을 만나니, 바위 절벽 위는 부처님들이 머무는 천상의 셰계였을 것이다. 마침 병풍처럼 둥근 바위와 네모난 돌기둥이 서 있어 불심 가득한 석공은 정을 들고 바위 속에 잔들어 있는 부처님을 깨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석공이 정을 놓고 일어섰을 때 반원형 병풍바위는 세 분의 부처님이, 그 앞의 네모난 바위 기둥에는 네 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 바위 속에 잠들고 있던 부처님이 석공의 인도로 깨어나와 봉화골 아래 하계의 중생들을 굽어보며 자비의 미소를 띠었다.

 

 

 

 

 

 

 

● 삼존불(三尊佛)과 사방불(四方佛) 개요

 

수십여 개나 되는 남산의 석불 중 칠불암 마애석불처럼 위엄 있고 당당한 조각이 있을까. 높이 5m, 넓이 8m로 반원형으로 펼쳐진 바위 면에 입체에 가까운 돋을 새김으로 새긴 삼존불은 남산 불상 중에 으뜸가는 위엄과 숭고미를 갖추고 있다. 세 불상에 각각의 광배가 있지만 바위 전체가 하나의 광배라고 볼 수도 있다.(일광삼본불)

본존불은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로 화려한 연꽃 대좌 위에 앉아 어렴풋한 미소를 띄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항마촉지인이다. 여래상의 높이 2.7m.

좌우 협시보살은 높이 2.1m의 입상으로 크기가 같으며 소탈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본존불과 같은 형태로 법의를 둘렀는데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오른손에 보병(寶甁)을 들었고, 왼쪽 협시보살은 왼손에 연꽃을 어깨까지 들어올리고 있다.

사방불은 연꽃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각각의 높이는 동면상(東面像) 1.18m, 서면상 1.13m, 남면상 1m, 북면상 72㎝이다.

 

 

 

 

 

 

 

● 삼존불(三尊佛)

 

석가모니불로 보이는 본존불은 가부좌한 모습으로 좌우의 서 있는 협시보살을 거느리고 있다. 

 

 

 

 

 

<본존불> 본존불은 앙련과 복련으로 넓게 핀 연꽃 위에 가부좌하고 촉지항마인의 수인으로 세속의 모든 악을 누르고 있으며, 당당한 어깨에 얇은 가사를 왼쪽에 걸친 우견편단을 하고 잔한 물결무늬로 몸을 감싸고 있다. 입은 조용히 다물고 엄격한 눈매에는 종교적인 엄숙함을 깊게 느끼게 한다. 두광(頭光)은 보주형(寶珠形)이며 육계는 상투를 튼 듯 하고 소라머리(螺髮)가 없는 민머리를 하고 있다.

 

 

 

 

 

당당한 자세, 풍만한 얼굴, 위엄과 자비로움을 한몸에 지닌 본존불은 석굴암의 본존불을 닮았다고도 한다.

 

 

 

 

 

 

<협시보살> 두 보살상은 몸을 살짝 틀어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보살상의 발은 빨꿀치를 모두고 발끝을 좌우로 벌린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마애불에서 발을 모둔 모양으로 새기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발끝을 모두게 되면 생기게 되는, 앞으로 쏠리는 듯한 착시 현상을 피하기 위한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뒤집어 놓은 모양의 연꽃(복련) 위에 서서 본존을 향해 서 있다. 보주형 두광에 삼면두식(三面頭飾) 보관을 썼는데, 엄격한 눈매와 굳게 다문 입으로 위엄이 넘치는 얼굴이다. 삼국시대 불상에서 보이던 미소는 없다. 가사는 물결을 이루며 왼쪽어깨에서 오른쪽 허리로 감싸들고, 허리에는 띠를 곱게 매고 있다. 왼손은 본존 쪽으로 들고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인(說法印)을 하고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정병은 목마른 중생에게 물을 주듯 고통에서 구해준다는 약속이다.

 

 

 

 

 

왼쪽 협시보살도 같은 차림과 자세로 본존 쪽을 향해 서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보다 더 넓은 어깨는 본존불 못지 않은 당당한 위엄을 느끼게 한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 가사는 뚜렷한 줄무늬를 이루며 몸을 감싸고 있다. 오른손에는 큼직한 연꽃을 들었는데 하체에 비해 지나치게 굵어 보이는 왼팔은 아래로 내려 가사 깃을 잡고 있으며, 가사는 발목까지 늘어뜨렸다. 허리에는 나비매듭을 곱게 매었다.

 

 

 

 

 

협시보살은 전체적으로는 하체가 짧고 어깨가 넓어 균형이 다소 부족한 모습이다.

 

 

 

● 사방불(四方佛)

 

삼존불 앞에 사방으로 면을 가진 바위에 불상을 새겨 '사방불'이라 한다. 사방불이란 동서남북에 각기 다른 여래 있다는 것인데 온 세상 어디든지 부처가 있다는 의미이다. 현세에 오신 부처인 석가모니와 불국의 모든 부처님이 한자리에 모여 계신 형상을 한 불국토의 표현이다.

 

기원 1세기 무렵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한 시기에 한 부처만 존재한다는 기존 관념이 사라지고,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부처가 존재한다는 관념이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시공을 넘어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들을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는데, 특히 밀교 계통에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개념은 다방불(多方佛)사상과 천불(千佛)사상으로 발전되었고, 결국에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내재불(內在佛) 사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방불은 칠불암 외에도 굴불사지 사방불을 비롯하여 경북 문경 사불산의 사방불, 영주 사면석불, 신안사 사방불, 충남 예산 사면석불 등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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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사불(四方四佛)

 

《금강정명》에서는 동남서북으로 돌아가면서 아촉불·보생불·무량수불·불공성취불이 차례로 배열된다.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구체화된 대일여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대일경》을 비롯한 태장계 밀교에서는 동남서북 사방에 보당불·개부화왕여래·무량수불·천고뇌음왕불을 배열하여 약간 차이가 있다.

이 사상이 신라에 유입된 뒤에는 풍수지리설의 오행사상과 결합되어 독특한 사방불이 나타났다. 8세기 이전부터 오대산을 중심으로 발달한 사방불 신앙에서는 동남서북 사방에 관세음보살·지장보살·아미타불·석가모니불이 배열된다.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자리잡는다.

8세기 이후에는 약사신앙의 발달로 약사불·미륵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로 재편되었고 중앙에는 역시 비로자나불이 자리잡는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의 사방불은 중앙의 비로자나불까지 합하여 오방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 방위개념에서 중앙은 상징적 의미만 지니고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로 형상이 없으므로 사방불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이러한 개념은 다방불(多方佛)사상과 천불(千佛)사상, 삼천불 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며 결국에는 모든 중생이 본래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내재불(內在佛) 사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방불은 경상북도 문경군 사불산의 사방불을 비롯하여, 경상북도 영주시 신안사 사방불, 경상북도 경주시 굴불사지 석불상,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충청남도 예산군 사면석불 등 많다. 이 중 예산의 사면석불은 6세기경에 조성된 삼국시대 최초의 사면석불로 보물 제794호로 지정되었다.

오대산 사방불 사상은 신라 신문왕 때 왕자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 다섯 봉우리에서 5만의 진신을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7세기에 이미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중대에서 비로자나불과 1만의 문수보살을 보았고, 동대에서는 1만의 관세음보살, 남대에서는 8대보살과 지장보살, 서대에서는 아미타불과 1만의 대세지보살, 북대에서는 석가모니불과 오백나한을 보았다고 한다. 오대산에 전해지던 문수신앙에 시방삼세제불 사상이 합쳐진 설화임을 알 수 있다.     -<두산백과사전>에서

 

 

 

<동면 약사여래상> 사실적으로 핀 복련, 앙련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한 약사여래상이다. 큼직한 보주형 두광을 하고 네모난 얼굴에는 살이 풍만한다. 약사여래는 12가지 큰 소원을 들어주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병안락원(除病安樂願)으로 사람의 병을 고쳐 안락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남면여래상> 사실적인 연꽃 자리 위에 결가부좌하고 가사 깃이 주름져 물결치듯 연꽃 자리를 살짝 덮고 있다. 보주형 두광에 둥근 얼굴에는 살이 풍만하고 양손은 설법인을 하고 있다. 이름은 확실하지 않다.

 

 

 

 

 

<북면여래상> 사실적인 연꽃 자리 위에 결가부좌하고 가사 깃이 연꽃잎을 덥고 있다. 큼직한 보주형 광배에 얼굴은 다른 불상에 비해 홀쭉하며 몸집도 작게 새겨져 있다. 북면 바위 왼쪽 면이 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게 새겨져 있다. 양손은 설법인을 취하고 있으며 이름은 확실하지 않다.

 

 

 

 

 

 

<서면 아미타여래상> 선각 연꽃 자리 위에 결가부좌하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들고 있다. 극락세계는 아홉 단계가 있다 상·중·하품(上·中·下品)극락에 각품마다 삼생(三生)이 있어 구품극락(九品極樂)이라고도 한다. 이 아미타여래는 하품극락을 표시하고 있다. 하품극락의 약속은 모든 생명을 극락으로 구원하겠다는 약속이다. 극락의 약속은 48가지 큰 소원인데 특히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을 제일로 친다.

 

 

 

 

 

 

불상의 얼굴을 보면서 불상의 코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에 감탄을 한다. 전국의 어느 곳이든 석불의 코를 떼어 갈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로 코가 성하게 남아 있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문의 번성을 바라는 유교적 남아선호사상은 부처님 코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교묘히 실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코끝의 색깔이 다르고 땜질한 흔적이있음을 발견한다. 둘러보니 불상들마다 코 부분은 모두 복원한 것이다.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 뒤와 사방불 위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어, 목조 지붕을 씌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상군이 반듯한 축대 위에 자리잡고 있을 뿐 아니라 곳곳에 기왓조각들이 산재해 있어서 원래 이 자리에 법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을 씌운 예는 삼릉계곡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63년 '칠불암 마애석불'이란 이름으로 보물 제200호로 지정되었다가 작년인 2009년 9월 '칠불암 마애불상군'이란 이름으로 이름이 바뀌어 국보 제312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이 때 보물이던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도 이름이 바뀌어 국보로 지정했다.

 

 

 

칠불암 마애불상 전경

 

 

 

 

 

 

칠불암 불상은 섬세한 조각 기술과 예술적 감각으로 종교적인 숭고미를 잘 표현했다. 이 불상군은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경주시 동천동의 굴불사지 석불상과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마 가운데 백호(白毫)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중국의 남북조에서 유행했던 고식불상(古式佛像) 양식으로보기도 하는데, 칠불암 불상의 조성시기를 통일 신라 이전 시기로 보는 의견도 있다.

 

 

불상의 균형미에는 다소 아쉬운 점이 있지만 통일 이후 새로운 형식의 불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사방불은 이후의 석탑 사방불의 원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의가 크다.

 

 

 

 

 

 

 

석불상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가 이곳이 칠불암이라는 암자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암자를 돌아본다.

 

 

원래 이 자리에 신라 시대 때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마애불 옆에 칠불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을 뿐이다. 절집이라기보다는 반가의 서재 같은 정갈하고 아담한 분위기의 맞배지붕 한옥 한 채. 작년까지도 비가 새는 초라한 건물이었는데 최근 신축하였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암자에는 불상이 없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 바로 곁에 일곱분의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가. 하여 실내에서도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도록 건물의 측면을 시원하게 터 놓았다. 커다란 촛대까지 놓고서...

 

 

이 암자에는 비구니 세 분이 머무르고 있다. 그 중에는 푸른 눈의 러시아인 (헝가리인이라는 말도 있다.)도 있으니, 아마도 수년 전 어느 날 이곳을 방문했다가 부처님께 사로잡혀 버린 게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들이 석축 아래서 불상을 향해 합장하고 절을 하는 동안에 나는석불의 매력에 넋을 잃고 삼존불과 사방불 주변을 뱅뱅 돌며 바라보고 살피며 사진을 찍어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이제 그만 내려오시죠."라는 저음의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그는 이곳에 붙박이로 근무하는 문화해설사이다. 나만 이렇게 불상 주변에 접근하여 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빠져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차마 말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중 보니 다른 사람들은 접근을 막고 있잖은가.

 

불단을 내려오자 해설사는 좋은 사진 많이 찍었느냐고 묻는다. 오후에는 빛이 좋지 않아 사진이 잘 안 나온다면서...

 

 

 

 

 

 

 

자취눈이 내린 날 아름다운 칠불암 석불

 

(이 이미지는 자료를 공부하던 중 '미지로'라는 분이 올린 글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 분의 글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

 

http://cafe.daum.net/biroam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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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의 기원

 

석가가 입멸한지 500년 동안은 불상이 없었다.이 시기를 무불상 시대라 한다.또 이시기는 인도 불교문화의 고대기로 소승불교가 득세하였는데 소승불교는 창교 당시의 교의교리에 집착하였고 석가를 절대 신봉하고 가기의 성불을 표방하여 함부로 부처의 모습을 만드는 일을 삼가했다. 이 시대의 예배대상은 주로 석가와 인연이 있는 유물들로 이루어졌다.그 대표적인 것이 부처의 사리를 모아둔 "Stupa"즉 탑이었고 석가가 앉았다는 금강좌, 보리수, 족적이고 수레바퀴 모양의 법륜, 법불승의 삼보를 상징하는 삼고등이 있었다.

 

약 5세기 동안의 무 불상 시대가 지나가고 불상이 비로소 제작되기 시직한 때는 인도의 큐산 왕조의 가나슈카왕때인 서기 2세기 초로 추정하고 있다. 이 시기는 큐사나기라고도 하는데 인도의 서북부 간다라(지금은 파키스탄), 인도북부의 마투다 지방, 이 두곳에서 불상이 동시에 발생하였다. 간다라 지방은 알렉산더대왕의 점령지 였으므로 고대 그리이스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 이었다. 이 지방의 소유자 아쇼카왕은 불교의 신봉자였던 까닭에 이 지방에도 불교문화가 꽃피우게 되었다. 그리이스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들의 신을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이스문화의 영향으로 불상이 자연스럽게 제작 될 수 있었다. 마투라 지방은 불교도들이 부처의 형상을 접하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그 일면으로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사념하면 아미타불을 볼수있다는 "반주 삼매경"이 널리 유포되었고 삼매에 빨리 드는 방법으로 "부처의 형상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발생된 부처상은 간다라, 마투라만의 독특한 불상형태를 드러낸다. 간다라 지방은 그리이스의 영향으로-머리카락은 길고 파상형을 이룬다. -콧날은 서고 눈은 들어가고 서양인의 얼굴 -두꺼운 법의는 도리아식의 히마치온의 형태이며 착의법이 그리스 형태이다. -두꺼운 법의로 인체의 표현은 거의 없다.

 

※ 한국 미술 / 불상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는 무덤에 부장하는 토우(土偶)가 제작되었으나 다분히 공예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의 조각은 불상의 제작에서 시작되어 시대에 따라 뚜렷한 특징을 나타내며 발전하였다.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예배상(禮拜像)들은 모두 교리에 나오는 형상에 따라 제작된다.

 

불상은 부처의 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예배 대상이 되는 여러 종류의상을 통칭할 때는 불교상(佛敎像)이라고 부른다.

 

‘불(佛)’이란 ‘buddha’의 약칭으로 진리를 깨달은 각자(覺者)를 뜻하고, 여래(如來)라고도 하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불이란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그러나 부처에는 수많은 불이 존재하여 석가모니 혼자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부처란 석가모니와 같이 인간으로 태어나서 부처가 된 응신불(應身佛)도 있지만 대일여래(大日如來)·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약사여래(藥師如來)등과 같이 인간의 형태로 태어나지 않은 법신불(法身佛)도 존재한다.

 

또한 부처에는 오르지 않았으나 성불(成佛)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보살(菩薩)이 있다. 보살은 진리를 구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자비로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체로 얼굴이 아름답고 온화한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밖에도 불교상에는 불교 교리에 따른 명왕(明王)·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사천왕(四天王)·팔부중(八部衆)·나한(羅漢) 등의 상들이 있다.

 

불상은 석가모니가 열반(涅槃)한 후 5세기란 기간이 지나서야 제작 되었다.소승불교 단계에서는 부처의 모습을 제작하는 일이 부처에 대한 모독이라고 인식하여 불상이 없는 가운데 예배하였다. 이같은 무불상시대에는 그 예배 대상이 석가와 인연이 있는 탑파(塔婆)·금강좌(金剛座)·보리수였다. 탑파는 본래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건조물 이었던 만큼 초기 불교들이 존숭하는 예배 대상이었다.

 

불상은 2세기초인 인도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 때에 간다라와 마투라지방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인도인들은 부처를 보고싶어 하는 염원이 강했으며, 알랙산더의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상을 제작해도 석가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비로서 불상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상은 보통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당연히 인간을 초월하는 특징과 부처의 존엄성을 나타내야 하는 일정한 기준을 가지고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불상은 전신이 미묘한 금색으로 빛난다는 등 32가지의 가장 기본적인 길상(吉相)에 따라 제작된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였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백제는 384년(침류왕 1)에,신라는528년(법흥와 15)에 공인되었으나 그 초전(初傳)은 공인된 시기보다 앞선다.

 

불상은 가장 중요한 예배 대상이므로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경전과 함께 들어오고, 불교에 대한 신앙이 깊어지면서 직접 제작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되었거나 최초로 한국인이 제작한 불상은 건무 4년명(338) 금동좌불상(金銅座佛像)과 같은 고식(古式) 불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부여 군수리사지에서 발견된 여래좌상 등이 중국의 고식 불상과 유사한 사실에서 추정된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불상은 6세기 이후 남북조에서 수나라시대에 걸치는 시기의 양식과 유사하다. 이들 불상은 얼굴의 미소, 옷주름의 형식 등에서 신비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미륵보살(彌勒菩薩)에 대한 신앙이 강하여 반가(半跏) 형식의 미륵보살이 유행한 특징을 보인다. 현존하는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은 중국 북조의 영향을 받은것이지만 얼굴은 둥글어지고 전체의 모습이 세련된 걸작품에 해당한다. 손을 볼에 대고 머리를 숙여 사색에 잠긴 자세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도 온화하고 사색의 깊이에 기품있어 보인다.

 

이 시기의 불상으로는 6세기 말경에 제작된 서산의 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과 신묘명(571) 금동삼존불상이 있다. 이들 불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상·조각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당나라의 불상은 인도 굽타조각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사실미가 더해지고 자유로운 자세를 취하며 풍만한 형상을 취한다. 따라서 종래 불상의 눈이 은행 열매 같고 입가의 미소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단정 근엄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번화된 것에 해당한다.

 

국보 제128호로 지정된 금동관음보살(金銅觀音菩薩)은 천의(天衣)의 X자형 교차가 없어지고 장신구가 화려해지며, 정면 직립에서 떠나 삼굴(三屈)의 관능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특히 신라의 불상은 둥근 얼굴과 풍만한 모습으로 표현되면서도당나라의 불상과는 달리 숭고한 부처의 자비로움이 전신에 넘쳐흐른다.

 

이러한 불상 조각의 극치는 석굴암(石窟庵)의 불상에서 나타난다. 석굴암에는 후실 중앙에 본존(本尊) 불상이 있고 그 둘레의 벽에는 11면관음 4보살 10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그 조각 솜씨가 매우 뛰어나고 전체적인 조화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어 어느 민족, 어느 시대의 조각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은 최대의 걸작품에 해당한다.

 

특히 통일신라시기에는 종래의 미륵보살보다도 아미타여래상의 제작이 많아진 점도 커다란 특징이었다. 이는 통일기의 신라인들이 현세에서 선을 쌓아 내세에는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정토(極樂淨土)에 태어나기를 기원한 정토종(淨土宗)이 유행한 것과 부합된다.

 

이러한 불상조각은 통일신라 말기에 불상의 표현기술이 저하되고, 선종(禪宗)의 전래로 불상 제작의 의욕이 저해되어 쇠퇴하게 된다.이 때에는 한천사 철조 여래좌상과 같이 인체를 표현하는데 부조화스럽고 생산조건의 변화로 이같은 철조의 불상 조성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도 불교국가라서 많은 불상을 조영하였다. 그러나 고려시기에는 선종의 참선(參禪)에 의한 사색적 경향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 등으로 인해 신라시기보다 불상 제작이 쇠퇴한 일면이 발견된다.

 

이 시기의 불상은 대체로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종래의 신비성이나 내세(來世)·이상(理想)을 지향하는 숭고한 종교미가 없어지고 현세의 인간을 대하는 괴상한 얼굴과 두꺼운 옷자락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신체를 덮는 방식을 취한다. 더구나 통일신라기와는 달리 삼국시대의 불상과 같이 다시 미소가 나타나지만 온화한 모습으로 표현되지는 못하였다.

 

이같은 불상조각의 퇴보는 12·13세기 이후 중국에서 남북조·당나라의 조각기술이 소멸되면서 일어난 동아시아 전체의 공통된 현상이기도 하였다.

 

영주 부석사의 아미타여래상이나 광주 교리의 마애철조 여래좌상은 강인한 현세적인 얼굴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옷의 문양이 단조로워 표현 능력이 오히려 퇴보되었음을 나타낸다. 덕주사 마애여래입상도 얼굴을 낮게 부조(浮彫)하고 경직된 선으로 단순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취한다. 특히 논산 관촉사의 미륵불도 거대하기는 하지만 균형이 잡히지 않아 미술적 가치는 오히려 반감된다.

 

따라서 대표적인 예술작품은 역시 불상보다도 대장경·청자에서 찾아진다.

 

그런데 불교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물론 불교가 오랫동안 지배하여 예불은 계속되었지만 현세적이며 구복적인것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수한 불상이 조성될 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기에는 조형예술이 퇴보하였으나 개성이 있었던데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개성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시대적인 불상양식이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창조적인 양식으로 전환할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울 관악산의 보살은 암벽에 얼굴을 높이 부조하고 몸은 음각산으로 표현하여 불상을 조성하는 정신과 기술이 모두 퇴보하였음을 드러낸다. 성주 노석동 마애불상군은 얕은 부조로 삼존상을 새기고, 왼쪽에 여래좌상 1구를 더 조각한 특징을 보인다.이는 평면적인 조각 수법으로 형태가 경직되고 긴장감을 보이는 작품에 해당한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사원이나 불상보다도 궁궐이나 성곽·성문·서원(書院) 등의 건축이 발달하는 특징을 보인다.

 

<출처> 56//한국미술/(02) 불상 불탑|작성자 향천

 

 

 

※ 한국 불상의 양식

우리나라에는 4세기경(372년 고구려 소수림왕2년) 중국 北朝의 前秦에서 불경, 불상과 함께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되었지만 최초로 제작한 불상은 모두 남아있지 않으므로 알 수가 없다. 불상이 전래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建武4년명 금동불좌상(338년)과 같은 예가 있으므로 중국에서는 그와 유사한 양식의 불상이 유행했을 것이다. 삼국 초기에는 중국의 고식 불상과 같은 양식의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 최초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가 되면서 불상의 조형미가 점차 한국적인 양식으로 토착화되었다. 불상의 기본적인 양식을 지닌 여래상을 중심으로 그 양식의 변화를 시대별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불상양식에는 6세기 이후, 곧 남북조시대부터 隋시대에 걸치는 시기의 불상양식과 유사한 양식이 나타났다. 현존하는 최고의 기년명 불상은 539년(혹은 599년)에 제작된 고구려의 延嘉7年名 금동불입상(국보 119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데 불상은 양식적으로 세장한 얼굴과 몸 좌우로 힘차게 퍼진 두터운 옷자락 등에서 중국의 북위양식의 영향이 농후하지만 중국 불상에 비해 전반적으로 단순화되는 등 한국적인 조형미도 함께 반영되어 있다. 재료면에서 10cm내외의 소형금동불이 주류를 이루고 뒤어어 흙으로 빚은 소조불과 석불도 조성되었다.
백제에서는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얼굴표정에서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색다른 양식의 불상이 제작되었는데 이것은 중국 남조의 영향이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중국의 北齊, 周, 隋대의 조성양식의 영향으로 종래의 세장한 얼굴이 둥글어지고 몸에 살이 붙으면서 신체의 굴곡이 점차 드러나며 보살상은 엄격한 直立의 상태에서 점차 탈피하기 시작했다. 특히 6세기 말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반가사유상이 유행하였다. 이 시기의 삼국에는 다음과 같은 공통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1) 몸에는 살이 빠지고 얼굴은 갸름하다가 말기에는 살이 올라서 齊周양식에 접근한다.
2) 눈은 은행알 같고 입가에는 미소가 있다.
3) 옷주름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고 좌우에는 고기 지느러미 같이 전개된다.
4) 법의는 통견이고 두껍고 좌우 대칭으로 복잡한 주름이 표현되고 있다.
5) 보살의 천의는 앞으로 X자형으로 교차된다.
6) 목에는 三道가 없고 수인은 통인(通印,시무외여원인)이다.
7) 큰 주형광배(舟形光背)안에는 삼존을 표현하는 일광 삼존형식이 유행한다.
8) 반가 형식의 미륵보살상이 유행한다.
9) 대좌는 연화대좌가 많고 광배는 주형, 보주형이 많은데 주형광배 주위에는 화염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10) 삼국시대 말기에는 암석에 감실(龕室)을 파고 감실 안에는 불상을 조각하는 석굴조각의 초기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통일신라시대
인도의 굽타양식의 영향으로 성립된 중국의 盛唐양식이 유입되는 시기로, 세련되고 사실적인 조각양식이 확립되었다. 종래의 인간적인 얼굴에 위엄이 서려지면서 신체는 적절한 비례로 서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며 몸에 밀착된 얇은 옷자락으로 인해 신체의 굴곡과 볼륨이 완연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로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국보81호 국립박물관 소장 179년)이 있다. 이 시기의 불상양식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

1) 육계는 작아지고 나발이 많아진다.
2) 미소가 사라지고 다정근엄한 모습이다. 3) 목에 삼도가 나타난다. 4) 옷차림은 우견편단(右肩偏袒)이 많아진다.
5) 옷주름은 좌우대칭의 양식이 사라지고 자유로워진다.
6) 상현좌(裳懸座)의 형식이 사라지고 옷끝은 대좌 위로 올라가서 대좌가 완전히 노출된다.
7) 대좌는 8각이고 복련의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된다.
8) 수인은 통인(通印)이 사라지고 부처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9) 보살은 정면 직립에서 자유로운 자세를 취한다.
10) 보살상은 천의의 X자형 교차가 없어지고 장신구가 화려해진다.
11) 보살상은 살이 쪄서 전반적으로 관능적인 표현이 많아진다.

통일신라시대 전성기의 통일신라 불교조각은 8세기 중엽의 석굴암 조각을 정점으로 이후 점차 형식화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신라사회의 내부 모순, 선종의 유행으로 인한 예배대상으로서의 불상기능의 쇠퇴, 당말 중국불교의 급속한 쇠퇴에 기인한 것으로 전반적으로 체구가 위축되면서 숭고미를 잃고 있다. 철불의 조상이 늘어나며 여래상에서는 촉지인 좌상과 약사상 및 새로 나타나는 비로자나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고려시대
중국의 송, 요, 원과의 교류를 가져 다양한 조성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전기에는 통일신라 후기의 양식을 계승한 항마촉지인 좌상의 철불과 석불의 조성예가 늘어나며 석불입상은 크기가 10cm 내외로 커지면서 지역적인 특색이 두드러진다. 사실적인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입체감이 둔화되어 있다. 14세기경에는 풍만한 상호와 단순하면서도 부드러운 옷주름, 정교한 금구장식 등에서 고려인의 조형감각이 반영된 불상이 조성되었다. 또한 얼굴표정과 신체의 자세, 영락장식 등에서 이국적인 분위기가 짙은 불상형식도 유행한 점 등 질적이고 양적인 면에서 한국 불교조각의 새로운 부흥기였다.

1) 얼굴은 부드러운 면이 사라지고 경직된다.
2)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뻗고 입은 두툼해진다.
3) 어깨가 움츠러들면서 좁아져 신체의 균형이 변한다.
4) 무릎의 폭이 좁아지고 무릎의 높이는 높아지는 경향이 짙다.
5) 법의는 두꺼워져 사실적인 표현이 둔화된다.
6) 불신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의 표현이 악화된다.
7) 원형의 앙련·복련의 상·하대석과 8각 중석의 대좌가 방형대좌로 바뀐다.
8) 광배(光背)의 화염문과 두광(頭光)의 연화문의 조각기법이 둔화된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일관해오던 관계로 더 이상 계승·발전되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왕가의 불사(佛事)와 서민의 예불은 계속되어 불상의 조성도 필요했으나 그것은 개인적인 복을 염원하는 현세적인 경향이 짙어 우수한 불상이 조성될 수 없었고 개성마저 사라졌다. 시대적인 양식은 형성되었지만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창조적인 양식의 전환은 볼 수 없다. 이 시대의 불상양식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인체의 파악이 부족하다.
2) 옆에서 보면 등허리가 앞으로 굽어지고 턱이 앞으로 내밀려 있다.
3) 얼굴은 개성미가 없고 역동감이 사라진다.
4) 법의는 두꺼워지고 옷무늬도 극히 간략화된다.
5) 전체적으로 속화(俗化)된 감이 짙다.

 

 

 

※ 한국 불상의 양식

 

①초기불상
중국의 고식불상과 같은 양식의 불상이었고 삼국에서는 이러한 불상을 모방한 불상이 최초로 제작되었다.

②삼국시대
삼국은 공통된 양식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몸에는 살이 빠지고 얼굴은 갸름하다가 말기에는 살이 올라서 제주양식에 접근한다. 눈은 은행 열매 같고 입가에는 미소가 있다. 법의는 통견이고 두껍다. 옷주름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고 좌우에서 고기 지느러미 같이 전개된다. 좌상은 상현좌의 형식을 취하여였고 좌우대칭으로 복잡한 주름이 표현되고 있다. 보살의 천의는 앞에서 X형으로 교차된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수인은 통이다. 큰 주형 광배안에 삼존을 표현하는 일광삼존 형식이 유행한다. 반가형식의 미륵보살상이 유행한다.

즉, 삼국시대의 불상에서는 신비성이 진하게 표출된다.

③통일신라시대

당의문화 영향으로 불상조각에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 육계는 작아지고 나발이 많아진다. 미소가 사라지고 단정근엄한 모습이 된다. 목에 삼도가 나타난다. 착의법은 우견편단이 많아진다. 의문은 좌우대칭의 양식이 사라지고 쟈유로와진다. 상현좌의 형식이 사라지고 의단은 대좌 위로 올라가서 대좌가 완전히 노출된다. 대좌는 8각이고 복련의 하대석, 중대석, 앙련의 상대석으로 구성된다. 수인은 통인이 사라지고 부처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 보살은 정면 직립에서 떠나 자유로운 자세를 취한다. 보살상 천의의 X형 교차가 없서지고 장신구가 화려해진다. 모든 불상은 살이 쪄서 관능적인 표현이 된다.
통일신라의 불상조각들은 8세기를 고비로 쇠퇴의 길을 걸어서 인체 파악의 불철처, 표현 기술의 저하, 선종으로 인한 불상 제작 의욕의 감퇴 등으로 미적감각을 잃어간다.

④고려시대
고려를 건설한 왕건은 왕조의 건립이 불교의 힘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사찰과 탑과 불상의 조영을 촉진하였다.그러나 대작은 만들었으나 우수작은 만들지 못했다. 그것은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는 사색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영향으로, 불상조각에 대한 의욕상실, 표현능력의 퇴보를 가져왔다. 불상의 양식은 대체로 신라 불상의 양식을 계승했으나 현세의 인간을 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⑤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타격은 받았지만 소멸되지는 않았다.그러나 이러한 환경속에서 우수한 불상은 조성될수 없었고 고려시대의 개성마저 사라져 버렸다.또 양식면에서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창조적인 양식의 전환은 볼 수 없다.

 

 

 

※ 불상의 위계

 

①불상
불교의 궁극적 목표이며 최고의 경지인 깨달은 분을 상징한다.즉,부처의 상을 불 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과거,현재,미래의 부처) 또 종류는 석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 다불(多佛), 방위불이 있다. 한편 예배의 대상이 되는 여러종류의 상은 불교상이라 한다. 불상은 인간의 모습으로의 태생한 것을 응신불,인간형태가 아닌 부처를 법신불이라한다. 법신불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대일 여래 : 마하비로자나불 또는 마하비로자나 여래라 하며 전 우주 어디에서나 빛을 발하는 참된 부처이고 석가는 분신이다.

-아미타 여래 : 무량광 여래, 무량수 여래라고 하며 서방 극락세계를 관장하고 그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이 광명을 받는 자는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약사 여래 : 동방 유리광 세계의 주인이며 대의왕불이라고 하고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 재회를 소멸, 의복 음식을 만족하게 함

②보살상
성불을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사람으로 보살의 속성은 "상구보리 하중생"이다. 즉, 곧 위로는 부처를 통해 불타의 정각의 지혜이자 최고의 이상인 불과에 이르는 보리를 구하는 일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길이다. 그래서 보살은 사홍서원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한다. 그리고 한다.그리고 아미타의 일생 보처 보살은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라 하고 약사 여래의 보처보살은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라 하며, 석가 여래의 보처보살은 미륵보살이라 한다. 보살은 정토에서 부처를 모시는 존재이므로 천상계의 옷을 입는다. 실제 표현 때는 귀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보살이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자비로운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다. 보살은 머리에 관을 쓰고 하늘을 나는 옷, 목걸이, 귀걸이, 팔찌, 영락의 장신구와 손에는 연꽃, 정병, 구들 등을 들고 얼굴은 온화하고 아름답다. 종류로는 문수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일광, 월광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이 있다.

사흥서원 : 고통이 많은 중생을 다 구제하려는 소원, 번뇌를 다 끊어 버리는 소원, 법문을 다 배우려는 소원, 불도를 다 이루려는 소원
이러한 사홍서원을 세우고 완전하게 실천하면 현재의 생에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부처전에 보살이 먼저 된다.보살이 되려면 "파라밀"을 수행하여야 한다. 파라밀이란 생노번뇌가 찬 이세상을 떠나 이상의 경지인"열반, 피안"에 도달 한다는 뜻이다.

파라밀이란
- 자비심으로 조건없이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재시,불법을 설법하여 제도하는 법시, 남의 재난을 구하는 무외시 등 복리를 남에 주는 일
- 부처가 정한 법을 지키고 적극적으로 선행을 쌓아야 한다.
- 인간세계의 비방, 박해, 추위, 더위를 참는다.
- 금하는 날엔 고기를 먹지않고 마음과 몸을 아끼지 말고 파라밀을 지켜 나가라.
-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산란하게 하지 않는다.
- 반야(般若)는 실상을 비춰보는 지혜로서 나고 죽고 이 언덕을 건너 불생불멸의 저 언덕에
- 이르는 뗏목과 같으므로 여러 불법을 통달하여 어지러움을 끊고 참뜻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6 파라밀을 지켜야 보살이 되는데 완전한 궁극적 보살을 일생보처라 한다.

③나한, 조사상
소승불교신자들의 원형으로서 석가모니의 직제자와 여러 나라에서 추앙받는 고승들을 나한이라 하며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각 종파의 창시자,종파의 지도자들을 조사(祖師)라고 하여 숭상하여 왔다.

④신장상(神將象)신상은 불교나 부처님을 지켜 주고 중생에게 이익되게 해 주는 수 많은 신상들이다. 종류로는 범천, 제석천, 사천왕, 금강력사, 12신장, 20팔부중이다.

3)명왕
명(明)은 어둠을 깨뜨리는 광명이고 지혜, 즉 지력으로 일체의 장벽을 깨뜨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명왕이고 대일 여래의 교령을 받아 모든 악마를 조복시키는 것이 임무이다. 그는 일단은 악의무리들을 죽게하지만 다음에는 자비로운마음에서 다시 소생시켜 인도하는 덕을 겸비하고있다. 보통 분노의 표정이고 명왕은 인도토착의 시바신을 불교에서 포섭 우리나라엔 이 명왕이 나타나지 않는다.

삼륜신 : 여래가 명왕,보살의 형태로 모습을 달리한 것이다.결국은 중생을 교화하기위한 목적이다.

4)천
천 또한 명왕과 같이 호법신으로 인도의 토착신들을 불교에서 포섭, 말기에 무수히 많어진다. 우리나라엔 범천, 제천, 사천왕, 팔부중, 인왕, 가릉빈가 등에 불과하다.

①범천 : 욕계의 모든 욕심을 끊고 청정하여 정법을 깊이 믿으며 부처가 출세할 때마다 가장 먼저 와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한손에는 불자 또 한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②제석천 : 수미산의 희견성이 그의 거처이고 석가모니의 생전부터 그를 돕고 옹호했다.
③사천왕 : 사천왕은 수미산의 사방을 지킴. 처음 인도의 호재신과 융합되어 귀인으로 표현되었으나 중국에 오면서 무인상으로 표현되었고 바위나 잡귀를 깔고 앉기도 하였다.
-동쪽(지국천):손에 칼.
-서쪽(광목천):탑을 들고 있다.
-남쪽(증장천);용을 붙잡고 있다.
-북쪽(다문천):비파를 들고 있다.

④팔부중 : 인도의 고대 신화로 불교에 흡수되었다.
-용,야차 : 사자,코끼리등으로 표현 사람일 땐 얼굴 2,3개
-간달파 : 음악을 연주
-아수라 : 투쟁을 좋아함. 제석천과 싸움. 얼굴이 3개,팔 6개. 가장 무서운 신
-기루라 : 새의 왕, 날개 길이 336만리, 용을 먹고 산다.
-긴나라 : 반인반조 내지는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괴물
-마후라 : 뱀의 신, 뱀관을 쓰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인 왕 : 이왕 또는 금강역사라고 하며 불법을 수호하고 주먹을 내리치는 형상으로 입을 벌린 형과 다문형으로 대칭되어 있다.
-가릉빈가 : 극락조이고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새.악기를 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