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1) 선방곡 선각여래입상,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망월사

모산재 2010. 12. 30. 14:02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과 칠불암의 마애불상군을 보기 위해 점심도 굶은 채 금오산을 넘고 봉화대 능선을 타는 강행군을 했는데, 역시 고생은 보람 있었다. 보람보다도 더 큰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온다. 십수 년 전에 남산을 찾을 때는 이곳을 왜 찾지 않았을까. 남산의 진짜 최고 보물을 빼 놓다니...

 

 

벅찬 감격을 안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한다. 남산 안내도를 보니 삼릉계곡의 북쪽 능선과 골짜기에 배리 삼존불과 삼층석탑 등 많은 문화재들이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봉화골로 내려가서는 별로 볼 것도 없고 고위산 넘어서 천룡사 삼층탑을 보러갈 수도 있겠지만 그 하나만 보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탐방 코스를 잘못 잡았고 판단도 좋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실제로 다시 금오산을 되짚어 상사바위를 지나 배리 삼존불 방향으로 가는 능선에서는 선각 마애불 하나를 만났을 뿐이다. 삼릉골 들어서기 전에 배리 삼존불부터 보았으면 머나먼 산길을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되었다. 차라리 칠불암에서 봉화대를 거쳐 새로 발견된 엎어진 마애대불을 들렀다가 천룡사 삼층석탑으로 가는 것이 좋을 뻔하였다.

 

 

어쨌거나 금오산을 넘어서 상선암 뒤 능선에 서 있는 상사바위를 지나온다. 해가 기울어지면서 맑기만 하던 하늘이 흐릿해져 시야도 나빠졌다.

 

 

 

 

 

 

 

그런데 남산 안내도에는 또 하나의 상사바위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국사골 순환도로 근처에 표기되어 있다. 어떤 모양의 바위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래와 같다.

 

 

출처 : http://blog.daum.net/muaedongcheon/666

 

 

 

 

상사암을 지나 배리 삼존불이 있는 능선길로 내려서기 전의 쉼터에는 북쪽 경주 시내 방향의 전망을 안내하고 있다.

 

가까운 산자락으로 경애왕이 최후를 마친 포석정과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서린 나정, 삼층석탑만 남아 있는 창림사터가 보인다. 그리고 멀리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전설이 서린 계림과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또는 반월성)이 보인다.

 

 

 

 

 

날씨가 좋지 않아 육안으로는 경주 시내는 흐릿하게 보일 뿐이다.

 

 

 

 

 

하산하면서 내내 두리번거렸지만 찾지 못한다. 궁금하여 나중 인터넷 검색을 해보아도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7부 능선쯤 내려왔을까. 능선길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바위 기둥, 거기에 부처님이 서 계신 줄 누가 알았으리.

 

안내도에 표기되어 있는 것 중 등산로에서 만난 유일한 문화재, 그나마 길 옆에 던져 놓은 듯 써 놓은 '선방곡 마애여래입상'이란 팻말이 없었더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선방곡은 배리 삼존불이 있는 동쪽 골짜기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천년 세월 능선의 비바람에 바위의 풍화가 워낙 심하게 진행되어 선각된 불상의 윤곽이 좀체로 잡히지 않는다. 불상 높이는 2m쯤 돼 보인다. 바로 남쪽 골짜기에 있던 선각육존불과 비슷하게 붓으로 스케치한 듯 쓱쓱 그려 놓았다.

 

 

 

 

 

 

그리고 산을 다 내려와 평지로 들어선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었는지 풍경도 흐릿해지는 시간인데, 한 무리의 탐방객들이 어느 전각 앞마당에 모여서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장면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서 만나는 배리 삼존불(지금은 명칭이 '경주 배동 석조여래 삼존 입상'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불상은 불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전각을 지어 모셔 놓았다. 그러나 보호각이 너무 낮아 안에 모셔진 불상들이 천장에 머리가 짓눌리는 듯 압박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채광이 되지 않아 불상의 얼굴은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전각을 저렇게 좌우로 길게 짓기보다는 입상인 삼존불의 특성에 맞게 위로 높게 지었어야 했다. 최소한 내부 공간이 석불 높이의 1.5배는 되어야 자연스러울 것이다.

 

 

 

 

 

 

이곳은 북쪽으로 500m쯤 거리에 포석정이 있고, 남쪽으로 400m쯤 거리에 삼릉이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을 배리(拜里)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전설이 전하고 있다.

 

 

옛날 남산 서쪽 기슭에 권세 있는 유렴이라는 재상이 살았다. 당시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덕망있는 스님을 모셔다 재 올리는 것을 큰 효성으로 생각했다. 유렴도 부모님을 위해 재를 올리려고 덕망있는 스님을 모셔왔다. 행색이 초라하므로 재상은 "이게 무슨 고승이냐." 하고 큰 소리로 꾸중하며 스님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자 스님이 장삼 속에서 조그마한 짐승을 끄집어내는데 갑자기 커다란 사자로 변했다. 스님은 사자를 잡아타고 날듯이 남산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제야 유렴은 큰 스님인줄 알고 엎드려 수없이 절을 했다. 그래서 이곳을 배리(拜里)라 하였다 한다.

 

 

 

비파골의 석가사와 불무사에 얽힌 전설과 비슷한 유형의 설화로, 왕이나 권세 있는 자들을 꾸짖고 사라지는 점에서 모티프가 동일하다.

 

 

 

 

 

 

■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 / 보물 제63호

 

 

배리 미륵불이 있는 골짜기를 '선방골(禪房谷)'이라 부르는데, 신라시대에 이곳에 큰 절이 있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애초에 삼존불은 이 골짜기 기슭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일제시대인 1923년에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세 불상은 남산의 다른 불상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삼존불은 전체적으로 몸집이 통통한  4등신이어서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중앙 본존불의 높이는 2.7m로 세 불상 중 가장 높다. 조용하게 미소가 번지는 듯한 표정으로 왼손은 여원인(與願印), 오른손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왼손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아래로 드리우고 있는 여원인은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약속이고, 오른손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위로 든 시무외인은 두려움을  없게 해주겠다는 약속의 표시다.

 

머리에(나발)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아이처럼 얼굴은 풍만하고 다문 입과 아래로 뜬 눈은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마에 백호는 표시되어 있지만 목에는 삼도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어깨에 두꺼운 외투를 걸친 모습이 다소 무거워 하체를 빈약하게 보이게 한다.

 

좌우의 불상과는 달리 전신광배를 하고 있는데, 광배는 많이 빈약하다. 

 

 

 

 

 

오른편의 보살상은 표식이 없어 무슨 보살인지 알 수 없으나, 의궤에 의하면 대세지보살로 나타나 있다. 이 보살 역시 풍만하고 인자한 모습이며, 목에서부터 발목까지 드리워져 있는 영락 장식(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은 중국 수나라 때의 양식으로 이 불상의 제작된 연대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나타낸다.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데, 백제 시대 불상인 서산 마애 삼존불과 얼굴 모습이 유사하다든가 하는 점에서 삼국시대 말기,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두광에는 작은 불상들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화불(化佛)이라 한다. 부처님의 빛이 비치는 곳에는 부처님이 계시다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이다. 괴로운 중생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보살님이다. 왼손에는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바르게 사는 법을 설하시고 있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들어 올려 설법인을 하고 있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다.

 

 

 

 

 

 

삼존불 바로 아래쪽에는 삼불사(三佛寺)라는 작은 절이 자리잡고 있다. 삼존불이 조성되면서 그 의미를 따서 새로 지은 절로 보인다.

 

 

 

 

 

삼불사 앞마당 끝에는 차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노란 술에 하얀 꽃잎이 아름다운 꽃이지고 있다.

 

 

 

 

 

 

삼불사에서 내려서면 망월사라는 절이 나온다. 이미 해는 지고 지나칠까 하다가 문을 들어섰다.

 

 

 

■ 망월사(望月寺)

 

 

그런데 절의 정문부터 독특하다.

 

대개는 천왕문으로 되어 있게 마련인데, 앞에서 보면 삼문 형식으로 되어 있어 마치 유교적인 사당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천왕문 양쪽에 사천왕상을 모시는 보통의 양식과는 다른 특이한 양식을 보인다.

 

이곳은 정문에 밀고닫는 문짝을 마주 달아 거기에 천왕상을 그렸다. 그런데 그 모습도 낯선 시퍼런 칼을 휘두르거나 커다란 바위를 들고서 험상궂은 표정을 짓고 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넓은 절마당 저편에 대웅전이 있을 뿐 그리 눈에 띌 만한 건축물이 없다. 대웅전 앞에 탑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저멀리 오른쪽 귀퉁이에 작은 탑이 하나 보일 뿐이다. 

 

 

그리고 더 볼 것이 없다 싶어 돌아섰다. 

 

 

 

 

 

그런데 남산 안내도를 보니 이 절에 '연화탑'이라는 게 표시되어 있다. (바로 위의 사진 대각선 방향에 보이는 탑이 연화탑이고, 그 뒤의 건물이 대명전이다)

 

 

집에 돌아와서 궁금한 마음에 찾아보니 '연화탑(蓮花塔)'이라 부르는 삼층석탑은 여러 모로 특이한 점이 많다.

 

 

 

 

첫째, 탑이 서 있는 위치가 대웅전 앞이 아니라 대웅전과 요사채 사이 마당 귀퉁이에 서 있다는 점

둘째, 탑을 땅 위가 아니라 '구각연당'이라 부르는 9각형의 작은 연못 속에 세워 놓은 점.

셋째, 탑 옥개석의 각층 층급받침에 특이하게도 연화무늬가 희미하게 나란히 3개씩 조각이 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세번째의 특이한 점으로 탑의 이름이 연화탑이 되었다. 옛날에 만든 옥개석 밑에 근래에 만든 탑신을 받쳐 창건과 더불어 세운 것이고, 석등 및 석탑 부재는 신라시대의 양식을 보이는데 창건 당시 이 부근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리고 탑의 위쪽에는 육각으로 건축한 '대명전(大明殿)'이라는 독특한 전각도 있다. 이곳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위패를 봉안하여 재를 올린다고 한다. (그런데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서도 선덕여왕의 위패를 모시고 재를 올린다고 한다.)

 

 

 

 

이 특이한 느낌의 절은 우리 나라 주류 종파인 조계종이 아니라 신라의 원효 스님을 종조로 하여 현대에 창시한 원효종의 총본원인 사찰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3년 경주에서 해인(海印) 스님이 창종하여 원효종 초대 종정이 되고, 1977년 12월 대한불교 원효종이 되었다. 현재 총무원은 서울 안양암(安養庵)에 있고, 주요 경전은 <원효종 성전(元曉宗聖典)>인데 1967년 망월사에서 발간되었다.

 

 

 

 

해는 지고 어둠이 밀려온다. 점심을 쫄쫄 굶고 오늘 하루 남산 능선을 왕복하면서 기대에 훨씬 넘치는 감동의 시간을 가져 참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5분쯤 걸어서, 아침에 출발했던 삼릉계곡 입구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곳 식당에서 늦은 점심 먹는 셈으로 부추전에 막걸리를 주문하여 하루의 피로를 푼다.

 

 

캄캄한 어둠 속, 도로 양쪽에 울울히 서 있는 이름다운 적송 숲을 바라보다가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경주 시내로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