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7) 금오산, 망산· 비파골 전설, 약수골마애대불,지바위골마애불

모산재 2010. 12. 27. 17:29

 

 

삼릉계곡은 상선암을 지나면서 끝나고 능선을 따라 등산로는 한없이 이어진다

 

 

 

능선의 바위 전망대에서 마애석가여래좌상과 그 너머 남산과 망산 사이로 환하게 열린 형산강과 경주평야의 풍경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절로 상쾌해지고 푸근해진다.

 

천 년 전 신라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고대 복장을 한 신라의 선남선녀들이 석불에 불공을 드리기 위해 남산을 오르는 모습이 등산객들의 모습에 포개져 떠오르기도 한다.

 

 

 

 

 

고위봉(495m)에 이어 남산에서 두번째로 높은 봉우리 금오산(468m)이 금방 나타난다. 크고작은 바위들이 많이 솟아 있는 남산인데 뜻밖에 금오산 정상은 바위가 없는 평범한 사질 흙산이다.

 

 

 

 

 

 

■ 금오산에서 만나는 두 개의 전설

 

 

금오산 정상에는 '경주 남산과 망산(望山)의 유래'를 적은 안내판을 세워 놓고 있다.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 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 한 남신이었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소리는 너무나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노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 라고 해야 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금오산 정상에서 좁은 등산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다보면 넓은 길이 나타난다. 포석정에서 남산 동쪽의 통일전으로 이어지는 큰길이다. 여기서부터 용장사지 입구까지 길은 편안하게 이어진다.

 

 

큰길 위쪽이나 아래쪽에는 온통 크고작은 바위들이 뾰족뾰족 솟아 있어 기기묘묘한 풍경을 이룬다. 비파들이 모여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묘한 신비감에 젖어들게 하는 풍경이다.

 

금오산과 용장사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이 골짜기를 '비파골'이라 부르는데, 이곳에는 '비파바위'가 솟아 있고 불무사, 석가사 등 수많은 절터가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 '비파골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신라 32대 효소왕이 어느 날 망덕사(望德寺) 낙성식에 참가하여 예를 다하여 불전에 친히 공양을 올렸다. 이 때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한 중이 나타나서 왕에게 자신도 재(齋)에 참례케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언짢은 기분으로 마지못해 말석에 앉으라고 허락하였다.

재를 마치고 왕은 그 중을 불러 빈정대는 말투로 "비구는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물었다. 중은 "예, 소승은 남산 비파암(琵琶岩)에 삽니다." 하고 대답한다. 왕이 다시 이르기를 "돌아가거든 국왕이 친히 불공드리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 하고 비웃듯이 일렀다.

이에 중이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예 잘 알겠습니다. 왕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眞身釋迦)와 함께 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왕은 놀랍고 부끄러워 진신석가가 날아간 방향에 수없이 절하고 신하들을 시켜 진신석가를 모셔 오도록 해지만 사라진 곳을 알 수 없었다. 남산 비파골에 있는 삼성곡(三聖谷)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만 바위 위에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곤 왕께 사실을 아뢰니 왕이 비파암 아래에 석가사(釋迦寺)를, 진신석가가 숨어 사라진 바위 위에는 불무사(佛無寺)라는 절을 지어 진신석가를 공양했다 한다.

 

 

 

비파바위의 부처님이 망덕사(望德寺)의 낙성재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진신석가 모습으로 바뀌어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부처나 보살을 통해 왕의 잘못을 꾸짖는 이야기는 숱하게 전해지는데, 누추한 승복을 입고 광주리에 물고기를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을 경흥국사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 충담스님이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다공양을 올린 후 경덕왕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려 군신(君臣)과 백성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친 이야기 등이 그러하다. 남산의 바위 속에 머물면서 왕이나 권세있는 자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나타나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 다시 숨어버리는 부처와 보살의 이야기를 통해 남산의 부처와 보살은 백성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보살피며 신앙의 대상이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신앙이 예술로 승화되고 골짜기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이 새겨졌으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남산은 그야말로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던 것이다.

 

 

 

 

■ 만나지 못하고 지나친 두 마애불

 

 

<하나> 약수골 마애대불(약수곡 마애여래입상)

 

 

금오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계곡이 약수골인데 정상 부근에 약수골 마애대불이 있다고 한다. 높이 8.6m로 머리는 따로 만들어 올린 흔적은 있으나 없어졌고, 발도 따로 만들었으나 왼쪽은 사라졌다. 남산에서 가장 높은 불상이다.

 

 

▲ 출처 : 경주남산연구소 (http://www.kjnamsan.org/)

 

 

 

 

마애대불 가까운 곳에는 머리가 사라진 석불좌상이 있다고 한다.

 

 

<둘> 지바위골 마애불

 

 

남산 안내도를 보면 금오산에서 내려와 큰길을 만나는 곳 부근에 이 주변에 지바위골 마애불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안내 표지를 보지 못한다.

 

나중에 자료를 검색해보니 이 마애불은 2005년 발견 되었다고 하는데 큰길에서 금오산과 반대방향으로 50m 정도 떨어진 곳, 계곡 정상부의 해발 450m의 바위면에 있다고 한다. '경주 남산 오산계 지암곡 제4사지 선각마애불상’이란 이름이 붙었다.

 

 

 

 

 

지금까지 경주 남산에서 확인된 불상들 중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불상인데, 선각된 불상의 모습이 풍화되어 매우 희미하다. 날개모양의 천의(天衣)와 다리를 덮는 치마(裙衣)의 존재가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