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경주 남산 (1) 배리 삼릉, 신라 초기에서 말기로 이어지는 박씨 왕릉

모산재 2010. 12. 25. 14:30

 

 

경주 남산을 찾는다. 십 몇 년 전 처음 찾았을 때의 그 매혹적인 느낌을 늘 잊지 못해 아쉬워하면서도 머나먼 거리가 부담스러워 미루어 두었던 것을 ktx 노선이 개통되자마자 얼씨구나 찾은 것이다.

 

흔히 "남산에 오르지 않고서는 경주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고 한다. 남산이란 자연 자체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이 바로 남산인 것이다.

 

 

경주시의 남쪽에 남북으로 8km 길이로 길게 솟은 남산은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를 품고 오목조목한 타원형의 산세를 이룬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에는 아담한 바위들이 기기묘묘하게 솟아 있어 등산의 묘미에 젖어들게 하고, 골짜기와 능선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수많은 석불과 석탑, 절터 등이 곳곳에서 맞이하며 문화의 향기에 젖어들게 한다. 불교 문화만이 아니라 남산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신화가 깃든 나정, 신라 천년의 막을 내린 비극이 서린 포석정이 지척에 자리잡고 있는 역사의 산이기도 하다.

 

 

주말 이틀간을 남산만 돌아보기로 작정하고 찾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떤 순서로 돌아보아야 할까. 남산 지도 한장만 달랑 들고 삼릉계곡에서부터 오르기로 한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탈까 기다리는데 택시 기사가 6천원이면 갈 수 있다고 하여 택시를 타고 삼릉계곡 입구에 도착한다.

 

삼릉계곡은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 기운이 돌아 냉골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시베리아기단이 밀려 내려온 것인지 아침 기온이 매울 정도로 차갑다.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서 목장갑을 사오길 잘 했지... 손을 내놓기가 힘들 정도이고 귀마저 얼얼하게  시리다. 냉골이란 이름에 잘 어울리는 날씨... 

 

삼릉계곡에는 11곳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남산에서 가장 유적이 많은 곳이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는 곳이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삼릉의 솔숲을 오른쪽으로 끼고 등산로를 오른다. 단풍철을 지난 탓인지 이른 아침의 삼릉계곡은 한적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빼곡히 들어선 솔숲에 자리잡은 삼릉(三陵)이 나타난다. 남산 위로 솟아로은 햇살이  막 솔숲으로 비쳐들고 있다. 

 

 

 

 

 

 

 

■ 배리 삼릉 / 사적 제219호

 

 

배리 삼릉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삼릉이라 부르는데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능에는 표식()이 하나도 없고 상석()이 있으나 이것은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들 무덤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다는 점과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 년의 거리를 넘어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신라 초기에 이와 같은 대형 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신라의 왕위 승계 체계를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은 해소될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를 하자면 다음과 같다.  

 

건국 이후 초기의 신라는 박씨들이 다스렸으니, 시조 박혁거세가 신라 육부 촌장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뒤  박씨 왕조가 계속되다가 8대 아달라왕에서 박씨 왕조는 김씨 왕조로 바뀐다. 박씨 왕조 기간  4대 탈해왕이 석씨(昔氏)로 처음 왕이 되었고 아달라왕 이후 9대 벌휴왕부터 16대 흘해왕까지는 석씨 왕조가 이어진다. 그리고 17대 내물왕 이후 삼국과 어깨를 겨루며 태평성대를 누리던 신라 왕조는 김씨들로 대를 이었다. 신라 초기인 아달라왕에서 박씨의 왕통은 사실상 맥이 끊겼다가 신라가 거의 망해가는 시기인 53대 신덕왕이 김씨 왕통인 혜공왕의 후대가 끊김으로써 왕이 된 것이다.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원손이라고 한다. 신덕왕이 오랜 세월 끊겼던 박씨 왕통을 다시 이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를 지니는 것 아닐까. 그렇게 해서 신덕왕과 그 이들 경명왕의 무덤을 한곳에 둔 것이 부자연스러울 것은 없다. 신라 초기인 아달라왕의 무덤이 대형인 것이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나중 신덕왕과 경명왕의 무덤을 조성할 때 후왕의 무덤과 격을 맞추어 다시 무덤을 크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 아달라왕은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시기(157년)의 왕으로 아직 경주 주변에 강역이 머물던 시기의 왕이다. 신덕왕은 헌강왕의 사위로 효공왕이 자손이 없어 왕위에 올랐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애왕의 형이다. 이 시기에는 신라는 견훤이나 궁예 등에게 지방을 다 빼앗기고 경주 주변 지역만 다스릴 정도였다.

 

 

오릉이 신라 시조왕인 박혁거세왕과 왕비 알영부인, 남해왕, 유리왕, 자비왕 등 박씨 왕들을 한 자리에 모신 것처럼 삼릉도 또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한 곳에 조성한 무덤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다시 찾은 박씨의 왕통은 오래 가지 못하고 신덕왕과 아들 경명왕과 경명왕의 아우 경애왕에서 끝났다.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유상곡수를 즐기다가 견훤군의 습격을 받고 자살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그리고 김씨인 경순왕이 신라의 56대 왕이 되었지만,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더는 수습하지 못하고 왕건에게 나라를 넘기고 천 년 왕조 신라는 역사로부터 사라진다.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경애왕의 무덤은 삼릉의 남쪽 솔숲 사이로 살짝 보이는 위치에 있다. 

 

 

 

  

 

위쪽에서 본 삼릉

 

 

 

 

 

 

삼릉의 솔숲은 고즈넉하다. 구불구불 들어선 솔숲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더러 보인다. 안개까지 피어오르면 솔숲은 몽환의 풍경을 이룬다고 하니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다. 

 

 < 계 속 >


 

 

 

 

경주 남산 문화재 안내 지도

 

 

출처 : 경주시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