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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여행 (11) 전주 동헌 풍락헌(豊樂軒), 장현식 선생 고택

모산재 2010. 12. 11. 12:14

 

■ 전주 동헌, 풍락헌(豊樂軒)

 

 

 

 

작년에 복원된 전주 동헌은 전주 향교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전주 동헌의 원래 자리는 이곳이 아니라 전주 객사의 동쪽에 있었다. 수령의 집무처가 객사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헌이라 부르는데, 바로 그 공간은 현재 전주 우체국 네거리의 남동쪽 블록으로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이 있는 구역과 구 전북은행 본점이 있는 블록을 포함한 약 7천여 평이었다.

 

 

 

 

그러나 풍락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동헌은 일제가 강제로 철거되고 매각되었다. 완주군 구이면 전주 유씨 집안으로 팔려가 제각으로 사용되어 오던 것을 최근 전주시의 요청으로 기증받아 원래 자리가 아닌 이곳 향교 옆에 옮겨 세우게 된 것이다. 

 

 

전주 부영에는 원래 형방청, 장방청, 작청, 군기고, 장청, 사령청, 통인청, 관노청 등 많은 관아가 있었으나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으로는 동헌인 풍락헌이 유일하다. 

 

 

 

동헌 입구

 

 

 

 

 

조선시대의 도시 구조는 왕권을 상징하는 객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우선 객사를 중심으로 신들의 영역을 좌묘우사(左廟右社)로 배치하였는데, 왼쪽으로 공자묘(향교 대성전)와 경기전과 조경묘를 배치하였으며, 오른쪽으로는 사직단(현 기전여고 자리)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관청을 객사 앞쪽으로 위계적으로 배치하였다. 동쪽이 서쪽보다 높고 북쪽이 남쪽보다 위계가 높았다.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일직선으로 위계를 갖추듯 풍남문에서 객사에 이르는 길은 위엄과 권위의 위계가 뚜렷하였다. 풍남문을 향해 벋은 도로를 따라 관아 건물들을 남향으로 배치하는데 마을은 아래쪽에 조성하였다. 

 

객사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전라감사의 집무처인 선화청을, 전주부 판관의 집무처인 동헌을 배치하였다. 

 

 

 

 

정문에서 들여다본 풍락헌

 

 

 

 

 

전주부의 수령인 전주 부윤이 임명되는 것이 당연히 보이지만, 조선시대 대부분의 기간은 전라도관찰사가 전주 부윤을 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관찰사가 전주부의 통치업무를 다 맡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관찰사가 전라도 전체를 통괄하여 행정을 맡았다면, 전주부의 통치업무는 전주 판관이 담당하였는데, 판관은 감영에서 관찰사의 공백을 메우면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기도 하고, 때로는 관찰사의 전횡을 견제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주 판관이 근무하던 관아의 건물 이름을 풍락헌(豊樂軒)이라 하였다. '풍년을 즐거워하는 집'이라는 뜻이니 목민관의 집무실 이름으로 썩 알맞다.

 

 

 

 

 

 

전주 판관의 설치 때부터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풍락헌은 1758년 판관 서노수가 개건하였고, 1890년 화재로 소실된 뒤 1891년 판관 민치준이 중창하였다고 한다.  

 

1895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전주부가 폐지되고 전주군이 설치되면서 1934년까지 풍락헌은 전주 군청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풍락헌의 모습은 전면 7칸의 팔작지붕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좌우 1칸의 크기는 중앙 5칸에 비해 기둥 사이가 약간 좁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오늘날 복원한 모습과 같다. 당시의 현판에는 '음순당(飮醇堂)'이라고 씌어 있는데, '진한 술을 마시는 집'이라는 뜻이니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동헌의 이름으로는 좀 그렇다.

 

1934년 봄 일제에 의해 풍락헌은 강제 매각되어 구이면 덕천리(옛 태실리) 전주유씨 제각으로 옮겨졌다. 옮겨질 당시 음순당 현판은 떼어 내어 옛 객사 내에 두었다고 하나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제각으로 옮겨진 풍락헌은 중앙의 한 칸이 줄어든 모습으로남아 있다가 1992년 1월 7일자 전북일보의 보도로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 풍락헌 현판

 

 

 

 

 

▼ 장현식 고가에서 본 풍락헌 옆모습

 

 

 

 

 

 

 

풍락헌 서쪽으로는 김제에서 옮겨온 장현식 고택이 있어 눈길을 끈다.

 

 

 

 

 

 

 

 

■ 장현식 고가

 

장현식 고택은 원래 김제시 금구면에 위치해 있었는데, 장현식 선생의 아들 장홍씨가 전주시에 기증하여 한옥마을 향교 서쪽에 옮겨 지은 것이다. 풍락헌 옆으로 옮겨 온 장현식 고택은 굴곡의 역사 속에 민족을 위해 희생한 한 가문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다. 

 

일송(一松) 장현식(張鉉植·1896~1950) 선생은 전북 김제에서 만석군의 아들로 태어나 항일 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로 전라북도 제2대 도지사를 지내기도 한 분이다. 일제 시대에 3.1운동, 조선어학회 자금을 조달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등 4동을 전통 방식으로 지었는데 근대 한옥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건축물이다. 목재 가공의 수준이 아주 정교해 전통 한옥으로서 건축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앞으로 이 고택은 영빈관으로 꾸며 전주를 방문하는 귀빈들이 묵을 수 있도록 활용할 것이라 한다.

 

표석에는 '장현식 고택'이 아니라 '고택'이라고만 새겨져 있다. 이곳에 있는 건물이 장현식 고택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장현식 고택은 안채와 중간채를 옮겨와(모과나무와 돌확도 함께) 지었고, 임실읍 진참봉 고택 중 용인민속촌에 매각되고 남은 사랑채를 옮겨왔다.

 

 

 

 

 

 

본래 고택이 있었전 김제 금구 서도리는 갑오농민군들의 최초 집회지인 원평읍과 지척인 곳이었음에도 온전했고, 한국전쟁 때도 모악산의 빨치산들이 금구읍 내의 면사무소와 우체국 등을 모두 불질렀지만 장씨 집들은 피해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만석꾼이면서도 이웃을 위해 베푸는 등 대대로 덕을 쌓아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현식 고택은 인동장씨 진안공파의 종가로, 남원 호음실의 박씨 집과 함께 여행객들은 부담없이 여장을 풀고 쉬어 갔다고 한다. 거의 사흘마다 소 한 마리를 잡아서 과객 접대에 힘써, 그들 사이에서 "노잣돈 떨어지면서도 장씨 집에 간다."는 말이 떠돌았다.

 

 

 

 

 

 

 

김제에 있던 장현식 고가는 100년이 훨씬 넘은 전통 한옥으로 1.884㎡ (570평) 대지에 안채와 사랑채 등이 있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문간채→사랑마당→사랑채→중문간채→안마당→안채→사당으로 집채와 마당의 반복적인 공간의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공간구조를 하고 있다. 솟을 대문 형식의 문간채와 사당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사랑채와 안채, 중문간채는 팔작지붕으로 되어있다.

 

한식 목조를 근간으로 하고 벽은 심벽구조형태로 안채와 사랑채는 회바름으로 외벽을 마감하였으나 나머지 건물들은 토벽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안채와 사당의 목재는 아주 훌륭한 가공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1932년 장현식에 의해 건축된 안채의 목재가공 수준은 아주 정교한 처리로 이루어져 건축적인 가치가 높고 ‘ㄱ’자형으로 경기 서울 지역 민가의 평면형을 따르고 있다.

인동장씨 금구파의 종가인 이 집의 전체적인 공간구성이 내외 구분이 분명하고 사당의 위치가 바르고 근대 한옥의 구조 특성이 반영된 우수한 주택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옛 가옥은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빗물이 새고 일부 무너지는 등 심하게 훼손되었고, 결국은 장현식 선생의 아들에 의해 전주시에 기증되어 이곳 향교 옆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원래 장씨 문중에서는 전주로 이전하기보다 제자리에 복원하는 것을 원해, 문화재청에 심사를 의뢰하기도 하고 김제시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듣지 못해 전주시의 요청에 따라 전주 한옥마을에 이전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한 지역의 역사와 자긍심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해체되고 이전된 것은 관광 전주를 위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김제로서는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는 불행일 터. 김제시의 문화적 둔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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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송 장현식(1896~1950)

 

1896년 9월 17일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서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4월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자금을 제공했다. 대동신문 재정 운영을 맡다 체포된 선생은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는다.

 

1929년 인촌 김성수와 함께 민족사학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할 때는 정읍 신태인과 감곡에 있는 2000석 값어치의 토지를 희사했다. 고려대 설립 당시의 본관 2층 8칸 교실을 그가 도맡아 지었다. 동아일보 창간 때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당시로서는 거금인 3000원을 제공하는데 이로 인해 정인승·이극로·최현배·이희승 등과 함께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4년간 치르다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선생은 자신의 재산이 의롭게 쓰이기를 원했다. 수만원의 독립자금이 알게 모르게 임시정부로 건너갔다. 이뿐만 아니라 당대 예술가나 명망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는데 춘원 이광수나 한글학자 이극로, 가람 이병기 시인, 김일엽 시인 등 숱한 인사가 선생의 사랑채에 드나들며 도움을 받았다. 특히 춘원 이광수에게는 선생의 거처가 있던 서울 명륜동 인근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기까지 했다. 그랬다가 춘원이 친일 행각을 벌이자 사랑채 출입을 엄금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북돼 그해 10월 24일 평양에서 사망한 관계로 후손들은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후손은 2007년 평양을 방문해 재북 인사 묘역에 안장돼 있는 선생의 묘소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1990년에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