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주 여행 (7) 조경묘(전주이씨 시조묘), 전주사고, 예종대왕 태실

모산재 2010. 12. 7. 01:36

 

 

전주객사에서 나와 충경로 사거리에서 풍남문 방향으로 얼마간 걷다보니 '한국집'이란 식당이 나온다. 거기서 골목으로 들어서니 그곳에서 경기전 뒤편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어 들어선다.

 

바로 넓은 경기전 돌담길이 환하게 펼쳐지는데 담장 안으로 경기전 부속채 건물들 뒷모습이 시야를 채운다. 멀리 남쪽으로 전동성당의 첨탑도 보인다.

 

 

 

 

 

담장 너머로 제수 음식을 만드는 조병청과 제사를 관장하는 업무실인 전사청, 그리고 방앗간이 옹청(오른쪽)이 보인다. 가운데 문 너머로 어정과 제각인 동재, 서재가 어렴풋...

 

 

 

 

 

경기전 뒷모습이다. 정전과 잇달린 익헌의 지붕 윤곽이 드러난다.

 

 

 

 

 

후원에는 건물을 짓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11월에 개관한 어진(御眞) 박물관인 모양이다.

 

 

 

 

■ 전주 이씨 시조묘 조선 왕조

 

그리고 그 동쪽으로 홍살문이 나타나고, 삼문 옆으로 아담한 흙돌담을 두른 건물군이 보인다.

바로 이곳이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李翰)과 시조비 경주김씨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肇慶廟)이다. 

 

그런데 외삼문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조경묘 경내는 둘러 볼 수 없다.

 

 

 

 

 

전주는 태조의 4대조 목조 이안사(李安社)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 땅에 옮겨갈 때까지 19대에 걸쳐 거주(世居)한 전주이씨의 본향이다. 그럼에도 전주이씨는 시조 묘가 없었는데, 1771년(영조 47) 이득리 등 7도(七道)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며 조경묘가 창건되었다고 한다.왕실의 뿌리를 확고히 함으로써 왕실을 권위를 높이려는 영조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영조는 조경묘 건립을 기념해 문과 정시를 베풀어 20여명을 뽑았다. 그런데 이 과거시험에 전주이씨와 경주김씨가 한명도 급제하지 못하자 다음날 이들을 대상으로 완경과를 베풀어 지역인들을 발탁하였다고 한다.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은 태조의 21대조로서 신라시대에 도성을 쌓고 고치던 사공(司空)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전주 동교의 발산 아래 자만동(滋滿洞)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경주김씨 신라 태종무열왕의 11대손이라 전한다.

 

 

▼ 조경묘 홍살문과 외삼문

 

 

 

 

1854년(철종 5)에 경기전과 함께 중수되어 조경묘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영조가 친필로 써서 보낸 '시조고신라사공신위(始祖固新羅司空神位)'와 '시조비경주김씨신위(始祖妃慶州金氏神位)'라고 쓴 위패가 모셔져 있다.

 

 

▼ 담장 너머로 보이는 조경묘 내삼문

 

 

 

 

 

조경묘의 수직사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지기도 했던 이문용(李文鎔, 1987) 여사가 간첩 은닉죄로 몰려 10여 년의 옥고를 치른 뒤 말년을 보낸 곳이라고 한다. 

 

 

 

망국의 비운 속에 조선 왕실의 후예들의 삶은 애잔한 이야기로 종종 등장한다.

 

덕혜옹주의 이야기가 그러하고 고종의 손자이자 순종의 조카, 순종의 동생인 의친왕의 13남 9녀 중 11번째 아들인 이석 씨 이야기가 그렇다. 그는 한때 가수로 '비둘기집'이란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미국생활을 하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 찜질방을 전전해야 했을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 한다. 마지막 황손인 그도 지금 전주시에서 지어준 '승광재(承光齊)'라는 한옥마을의 한 집에서 쓸쓸히 살고 있다.

 

 

  ▼ 이문용 여사의 죽음을 보도한 기사(한국일보 1987. 3.29)

이문용(李文鎔, 1900~1987)은 고종의 딸이고 어머니는 상궁 염씨로 알려졌다. 마지막 황녀로 알려졌던 덕혜옹주의 11살 연상의 배다른 언니가 된다. 서울 계동에 있는 민가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귀비 엄씨의 질투로 인해 종실인 학부대신 이재곤의 주선으로 경북 김천으로 피해 9살까지 숨어 살아야 했고, 10살 때 어머니 상궁 염씨와 가까이 지내던 상궁 임씨가 서울로 데려와 창경궁 앞 원남동의 한 여염집에서 살면서 궁중예법과 법도를 배우게 됨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

 

그후 진명여고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고, 1916년 열일곱일 때 개화파 김옥균의 후손인 김한규의 아들 열 네살 김희진과  혼인하였으나, 1919년 남편이 익사하였으며, 그의 아들도 이듬 해 뒤를 이어 폐렴으로 죽는다.

 

해방이 되자 좌익활동을 하던 시동생이 생활비를 대준 것이 문제가 되어 사상범으로 몰려 옥살이와 피신, 또한번의 옥살이를 12년 한 끝에 1970년 출옥하였다. 말년에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경기전(慶基殿)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녀의 진술과 중앙정보부 신원조회로 그녀가 황손이라고 알려지고 박정희의 지시로 호적이 만들어져 법률적 복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녀의 진술 외에 황족이라는 기록이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소설가 유주현이 <황녀>라는 장편소설을 쓰고 1974년 같은 제목으로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황녀 여부에 대한 시비가 생겨났다. 그러나 종실 이면용(李沔鎔))등의 증언으로 옹주가 확실하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사후 문혜옹주라는 칭호가 붙었으나 이는 정식 칭호나 시호는 아니다.

 

그녀의 인생 역정을 기록한 책으로 소설가 유주현의 장편소설 <황녀>와 <굽이 굽이 흐르는 강물처럼>(김규달, 설민호. 1980)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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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천에 황녀(皇女)의 성장지 있었네

 

명성황후 민씨를 포함하여 13명의 여인과의 슬하에서 왕손을 두었던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의 아들 딸들은 많다. 

 

그 중에 영친왕 이은(李垠)의 이복 동생이 되는 황녀(皇女)로 1900년 12월 3일 염 상궁을 생모(生母)로 하여 태어난 옹주 이문용(李文鎔)이 있다. 의화군 이강(李堈)이 의친왕에, 황자 이은(李垠)이 영친왕에 책봉되던 해에 상궁 염씨에게서 태어났으니, 덕혜옹주보다 11살 위의 배다른 언니가 된다.

 

왕권을 향한 욕망과 암투가 뒤끓는 왕가(王家)의 딸로 태어나, 왕실 족보에 정식으로 올려지지 않은 왕녀도 허다했던 그 시절. 왕녀로 태어남 자체가 죽음을 각오한 생명이요 삶이 아닐 수 없었던 이 때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은(垠:영친왕)을 낳아 기르는 엄 상궁의 득세가 이만저만한 지경이 아니던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문용은 학부대신이요 고종황제의 사촌인 이재곤의 주선으로 민영익 대감의 어느 민가에서 태어나고, 생모인 염 상궁은 즉시 죽임을 당하여 사생아 아닌 사생아, 고아 아닌 고아가 된다. 문용의 당숙되는 이재곤 대감의 주선과 임 상궁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간신히 목숨만은 건진 것이다.

 

그래서 문용은 왕의 여자들이 벌이는 암투극에 희생되지 않기 위한 호신책으로 임 상궁이 주선한 유부(乳父) 손창렬 내외의 외동딸이 되어버린다. 일시에 공주의 신분에서 천민의 딸이 된 이문용은 김천시 대항면 향천4리(속칭 방앗골ㆍ방하치ㆍ방아재)로 내려와 숨겨져 유모에 의해 양육되게 된다. 그러나 호신책으로 숨겨 길러지던 그녀는 얼마 아니 되어 유부(乳父) 유모(乳母) 내외의 결렬로 고아, 연자방아 소몰이, 걸인소녀의 신세가 된다. 그녀는 김천의 직지사 입구의 대항면 향천리 방앗골에서 9년 간 갖은 고난과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면서 걸인소녀로 성장 하였다. 더욱 기구한 것은 이문용의 생모가 염 상궁이 아니라 임 상궁이라는 것이다.

 

역사와 소설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런 탄생의 벅찬 비밀을 지키며 살아온 황녀 이문용의 생애는 파란만장하였다. 그 후 그녀는 임 상궁의 주선으로 다시 상경하여 창경궁 앞 원남동의 민가에서 왕가의 예법을 익혔으나 입궁하지는 못하였다. 진명여고를 다녔고, 1916년에 우국지사 김한규(金漢圭)의 맏아들 김희진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직후 일본 유학 중이던 남편과 돌박이 아들마저 잃어버리고 식객만도 못한 젊은 과부가 된다. 또 6ㆍ25 후에는 좌익활동을 하던 시동생의 생활비를 대준 것이 문제가 되어 사상범으로 몰려 장기 복역수가 되었다가 1970년, 10년의 옥살이 끝에 전주교도소에서 출옥 하였다. 말년에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인 전주 경기전(慶基殿)에서 기거하다가 1987년 3월 28일 전주시 수직사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사생아로, 연자방아 소몰이로, 걸인소녀로, 청상과부로, 장기 복역수로 고난을 이겨내며 살아온 황녀 이문용의 삶의 여정은 눈물겹고 처절하였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1906.2~1967.10)의 생애와 유사한 인생 유전이었다. 이조 왕가의 마지막 옹주였던 그녀는 탄생의 벅찬 비밀을 간직한 채 참으로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문용(李文鎔)이 실존하는 이조 왕가의 마지막 옹주로 밝혀진 것은 유주현의 소설 <황녀(皇女)>로부터이다.

 

일찌기 춘원 이광수가 이문용 여사를 여러 차례 만나 “신라 말엽에 마의태자가 있었다면 이조 말엽엔 백의공주(이문용)가 있으니, 내 이를 작품으로 쓰겠다.”고 벼르다 마침내 작품화 하지 못했다. 황녀로 태어나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기면서 파란만장, 처참하게 살아온 이문용의 일대기를 그린 역사소설 <황녀>는 1972년 10월 <문학사상>지에 연재되면서 탄생하였다. 이 장편소설은 1975년에 단행본 <황녀>(전 3권, 동화출판공사)으로 발간되기도 하였다. 현대 장편으로는 소설가 유주현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1974년 MBC에서 드라마 '황녀'를 제작, 방영한 적이 있으며 2003년에 연극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그러자 이문용이 과연 황녀(皇女)냐 하는 진위 논란이 일었다. 이에 이재곤 대감의 아들 이면용(李沔鎔)이 그녀를 만나 친족임을 확인하기도 하였고 8ㆍ15 광복 후 황녀(皇女)로 봉해졌다. - 민경탁, 월간 <향토 김천>2009년 10월호

 

 

 

 

 

■ 춘추사고, '실록각' 

 

조경묘 앞에서 다시 돌담을 끼고 모퉁이를 돌면 경기전 동쪽의 넓은 뜰이 나타난다. 넓은 뜰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고 담장 안쪽에는 이층 누각 하나가 보인다. 바로 복원한 춘추사고인 실록각이다.

 

 

 

 

 

 

담장으로 난 쪽문을 들어서면 넓은 뜰 가운데에 실록각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다. 전주사고는 뜰 안쪽으로 경기전 내삼문 안으로 통한다, 전주사고는 조선 4대 사고 중 임진왜란때 유일하게 화를 면한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돼 있던 곳이다.

 

건물은 정유재란때 소실된 것을 1991년에 적상산사고를 본떠 복원하였다. 현재 실록각 자리에는 전주시립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국립전주박물관으로 승격되어 효자동으로 이전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충주와 서울의 춘추관에 사고를 두었는데 1439년(세종 21년)에 사고를 늘려 경상도의 성주, 전라도의 전주에 두어 4대사고가 설치되었다. 1445년(세종 27) 처음으로 전주에 실록이 봉안되었으며, 사고가 건립된 것은 1473년(성종 4)이다. 세종실록부터 편찬할 때마다 주자(鑄字)로 인쇄하여 각 사고에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실록이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만 온전히 남았는데, 이는 태인의 선비들인 안의·손홍록의 공이다. 이들은 왜적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소문을 듣고 전주로 달려와 태조부터 명종까지 13대에 걸친 실록 804권과 태조영정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기고 다음해 7월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무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조정에서 사관을 내장산에 파견해 실록과 영정을 해주·강화도·묘향산 등으로 옮겼다가, 왜란이 끝난 뒤 사고를 지어 1603년 7월부터 다시 출판한 3부를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 교정본은 오대산에, 전주사고의 실록원본은 마니산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춘추관실록은 이괄의 난으로 소실되었고, 묘향산실록은 무주 적상산(赤常山)으로 이전했으며, 마니산실록은 같은 강화도의 정족산으로 이장했다.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를 작성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했으며 4사고의 실록은 조선시대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다.

 

전주사고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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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史庫) +
 
 
일제강점기에 정족산 및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하고, 적상산 사고의 실록은 장서각으로 이관했으며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동경제국대학으로 옮겼다가 1923년 일본의 관동대지진 때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다 탔고, 조선총독부에 이관했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에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에 옮겼다. 장서각 소장 적상산본은 해방 직후 관리 소홀로 도난사건이 발생하여 낙권이 많이 생겼는데 지금은 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은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다.
 
조선 후기 사고들의 건축 양식을 보면,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2층 누각식의 기와집 건물 2동을 세웠는데,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사고의 수직(守直)은 전기의 경우 충주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명, 별색호장(別色戶長) 1명, 기관(記官) 1명, 고직(庫直) 1명이 있었다. 후기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되어 사찰이 사고를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적상산 사고에는 승군이 20명 내외, 정족산 사고에는 50명, 오대산 사고에는 20명이 배속되어 있었으나 때에 따라 또는 사고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사고 수호는 수호사찰의 주지를 예조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수호책임을 맡겼는데, 조선 후기 수호 책임을 맡은 절을 보면 정족산의 전등사(專燈寺), 적상산의 안국사(安國寺), 태백산의 각화사(覺華寺), 오대산의 월정사(月精寺)였으며 이 절에 위전(位田)을 주어 수호하게 했다. 그러나 외사고의 전반적인 관리책임은 각각 사고마다 참봉 2명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했다. 보관중이던 실록이 좀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햇빛을 쪼여주는 포쇄는 3년마다 1번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사고가 있는 뜰 남쪽에는 불상의 대좌로 보이는 석물이 두 개나 보인다. 어째서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왕조의 지엄한 상징 공간에 이들이 들어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보이는 매화나무 한 그루.

심재가 부식하여 보호처리된 줄기는 굽어져 큰절을 하듯 땅에 닿았다가 다시 가지는 비스듬히 고개를 쳐들었다.왕조의 역사를 그대로 닮은 듯한 모습이 보기에도 짠하다.

 

 

 

 

 

 

 

■ 예종대왕 태실과 태실비

 

전주사고의 담장 바깥 동편 뜰에는 예종대왕태실과 태실비가 있다.

 

 

 

 

 

 

태실은 부도와 같은 형태로 태를 넣은 항아리를 석실에 묻었다.

 

1578년(선조 12)에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태실마을 뒷산에 세웠던 것을 1734년(영조 10)에 다시 세웠고, 1970년 태실비와 함께 경기전으로 옮겨 온 것이다. 

 

 

예종(1441~1469)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한명회의 딸을 비로 밪았으며, 왕세자 장(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왕세자에 책봉되고 1468년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일년 남짓한 재위기간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의 훈구파들이 승정원에 상시 근무하면서 권력을 휘두르며 이시애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남이·강순 등과 대립하였고, 결국 유자광의 모함으로 훈구파에 의해 남이 등은 역적 혐의로 제거된다.

 

예종이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혜성이 나타났는데, 궁궐에서 숙위하고 있던 남이가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이 자는 나중 김종직 문하의 사림파를 제거하는 무오사화의 주역이 된다.)이 역모로 고해바치게 되고 남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예종이 합세하여 남이 등 수십 명이 살륙을 당하였다. 이로써 훈구세력의 정치 경제적 기반이 강화되었다.

 

재위 13개월 만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다. 덕종의 둘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성종이다.

 

  

 

 

 

 

비는 귀부 위에 세워졌으며 윗부분은 용을 조각한 대리석 이수를 얹었다. 비석 앞면에는 '예종대왕태실(睿宗大王胎室)'이라는 글자가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만력 6년 10월초 2일건(萬曆六年十月初二日建)'이라 쓴 아래 2줄로 ‘후 156년 갑인 8월 26일 개석립(後百五十六年甲寅八月二十六日改石立)이라고 새겨 놓았다.

 

 

 

 

예종대왕 태실과 비는 전라북도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태실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 줄기가 둘로 벌어진 오금에는 배풍등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 영롱한 붉은 열매를 달았다.

 

 

 

 

 

 

경기전 별전, 전주사고가 있는 뜰마당으로 들어가는 문. 대나무숲이 시원스럽다.

 

 

 

 

 

※ 조경묘 경기전 도형(국립문화재연구소, 1899년)

 

 

 

 

 

어제 보지 못한 후원과 경기전 동쪽 뜰을 모두 돌아보고서야 경기전이 공원으로서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한 쉼터인가를 알게 된다. 볼 것도 많고 숲 또한 아름다우니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붐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