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주 여행 (3) 경기전,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각

모산재 2010. 12. 1. 22:48

 

민속놀이를 구경한 뒤에 바로 경기전(慶基殿) 입구로 향한다. 경기전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전각인데, 이곳을 찾기 전에는 이런 전각이 있는지도 몰랐으니 나만 이리 무식한 것이었을까. 

 

주말에다 한글날을 맞아 문화축제까지 벌여서인지 경기전에는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체로 찾은 어린 학생들로 해서 더욱 붐빈다. 왕조 창업자의 초상을 모신 곳, 예전 같으면 그 누구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지엄한 공간이지만 세월이 바뀌어 지금의 경기전은 모든 이들이 찾는 공원이 되었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그 선대들이 살았던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고 하여 '풍패지향(豊沛之鄕)'으로 부른다. '풍패'는 한나라 고조 유방의 고향인데, 고려 왕조를 뒤업고 조선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를 유방에 빗댄 표현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었다.

 

어진이란 그림이 아니다. 어진은 어진 자체로 이미 왕과 같은 권위를 지닌다. 그러니 어진을 대할 땐 그림 한 장이 아니라 한 나라의 군주를 대하는 예우를 갖춰야 할 것이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태종 이방원은 재위 10년 째인 1410년 전주(完山), 경주(鷄林), 평양 등에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을 짓는다. 조선 창업의 주인공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그 자체로 종묘사직을 상징하는 것이니 어진전을 지어 왕조의 위엄을 기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엔 '어용전(御容殿)'이라 이름 붙였던 전각은 그 뒤로 '태조 진전'이라 부르다가 세종 24년(1442)에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 붙여 전주는 '경기전(慶基殿)',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이라 했다. (*두산백과에는 '영종전(榮宗殿)'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듯하다.)

 

'새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런 터'라는 뜻의 경기전은 이렇게 역사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세 곳의 어진전이 모두 불타 사라졌는데,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만 다시 세운 것이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1990년 세워진 경기전 정문. 경기전은 2000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정문 앞 큰길 가에는 하마비가 서 있다.

 

사자를 닮은 두 마리의 동물상이 빗돌을 받치고 있다. 두 줄로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들은 들어오지 말라.'라는 뜻이다. 하마비에 관용적으로 쓰는 '대소인원 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구절과는 좀 다른 표현이다. 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니 보다 지엄한 표현이다.

 

 

 

 

그냥 뎅그러니 비석만 서 있는 일반 하마비와 달리, 암수 한쌍으로 보이는 돌사자가 받치고 있는 이 하마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마비라고 한다. 근년에 문화재청이 하마비의 예술적 가치를 실사하여 보물로 승격시킬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는데, 이후에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받침돌 양쪽에 네모진 홈이 패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보호각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경기전이 중건된 해에 세워졌고 1856년(철종 7)에 중각(重刻)되었다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오른쪽 마당으로는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마당가 언덕은 대나무 숲이 시원스레 우거져 있어 공원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홍살문을 지나 외삼문(外三門)이 나타난다.

 

 

 

 

(홍살문은 능원(陵園)과 묘(廟) 궁전(宮殿)과 관아(官衙) 등의 입구나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여 임금이 그 집이나 마을 앞에 세우도록 한 붉은 문이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홍살문 안쪽 외삼문과 내삼문은 이름 그대로 세 개의 문이 나 있는데, 지나갈 때는 '동입서출', 즉 동쪽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나가야 한다. 가운데는 신령이 드나드는 길이라 해서 '신도'라고 해서 일반인은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경기전 외삼문. 단청에 새겨진 문양들은 조선왕조의 번영을 나타낸다고 한다.

 

 

 

 

 

경기전 내삼문(內三門). 단청의 꽃 문양은 헌화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정문, 외삼문, 내삼문, 이렇게 세 개의 문을 지나서야 경기전(慶基殿) 정전이 있는 마당으로 들어선다.

 

태조 어진을 봉안한 전각이니만큼 격식과 기품을 잘 갖추고 있다. 본전은 배례청과 익랑과 이어져 있고, 동서로 회랑을 거느리고 있다. 전북도 유형문화재로 있다가 2008년에 승격되어 보물 제1578호로 지정되었다.

 

 

 

 

태종 때 세웠던 정전이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려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한 것이다. 1872년 태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면서 크게 보수하였다.

 

높은 석축 위에 앞면 3칸 옆면 3칸의 다포식 맞배집 건물을 올렸다. 본전 앞의 배향 공간인 배례청은 본전보다 1단 낮게 쌓은 석축기단 위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2익공식 포작(包作)을 짜올린 맞배지붕 건물이다. 본전과 배례청은 능침처럼 정자각(丁字閣)으로 구성하였다.

 

정면에 보이는 배례청의 풍판 한 가운데 위 아래로 돌출되어 있는 것이 나무 거북 조각상이라고 하는데, 십장생의 하나인 거북을 새김으로써 화마를 막고 전각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라고 한다.

 

 

 

이제 정전 안의 풍경을 보기로 하자.

 

건물 안의 3번째 기둥렬에 높은기둥(高柱)을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았다. 이 단의 양 옆에는 일산(日傘)과 천개(天蓋)를 세웠다.

 

 

 

 

 

단의 가운데에는 태조 어진(太祖御眞)을 모셔 놓았다. 이 어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태조 어진이라고 한다. 

 

태조 어진은 함경도 영흥 환조의 옛 집, 즉 태조가 출생한 곳에 세워진 준원전(濬源殿), 개성부 태조 옛 집터에는 목청전(穆淸殿), 집경전, 평양에는 영숭전(永崇殿) 등 총 6곳의 진전에 모셔졌다. 명종대 기록에 어진은 26축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등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만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옛 어진이 너무 낡아 1872년에 화가 조중묵이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그림이라는데, 옛것은 태워 백자항아리에 담아 경기전 뒤뜰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태조는 어깨와 앞가슴에 황룡을 수놓은 푸른 도포를 입고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익선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전신상은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화와 비슷하게 표현되었다고 한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며,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익선관의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고 표현이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잘 표현한 점 등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평가되고 있다. 보물 제931호로 지정되었다.

 

 

↓ 태조 어진(출처 : 문화재청)

 

 

 

 

이 어진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해지기까지에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

 

경기전에 어진을 최초로 봉안한 것은 1410년(태종 10) 무렵인데, 임진왜란으로 정읍 내장산을 거쳐 아산 등지로 피난시켰다가 1597년(선조 30)에는 멀리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寺)로 안치하였다. 광해군 때 경기전이 중건되면서 다시 전주로 이관해 봉안하였지만 다시 병자호란이 터지면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으로 옮겼으며, 1767년(영조 43) 대화재가 일어나 전주향교 명륜당으로 피난하는 등 역사의 굴곡 속에 숱한 시련을 거쳤다.

 

그 뒤 1872년 어진이 너무 낡아 서울 영희전의 것을 조중묵이 새로 모사하여 봉안하였다. 그런데 서울 영희전 것은 원래의 경기전 것을 모사해놓은 것이었는데 한국전쟁때 소실됐다고 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경기전의 영정은 현존 유일의 태조 어진이 되었다.

 

 

어진이 있는 옆 공간에는 고종 때 어진 봉안 행렬 때 쓴 가마와 향정(香亭) 등이 전시돼 있다.

 

보통 가마와는 달리 한옥을 연상시키는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향정의 모양이 이색적이다. 향정은 향로, 향합 등을 싣고 가는 가마로 태조 어진을 봉안할 때 썼던 가마로 추정된다.

 

 

 

 

향정은 왕가나 관청의 특정 의례가 있을 때, 용정(龍亭)이나 신연(神輦)앞에 각종 의장물(儀仗物)들과 함께 차려놓고 사용되었으며, 길을 갈 때 향정 담당 관리가 향을 피우게 했다.

 

 

 

 

 

 

정전 앞 양쪽 회랑엔 태조 외에 지금까지 전해오는 다섯 왕들의 어진이 전시돼 있다. 그러나 이 어진은 진품이 아니고 영인본이다.

 

왕들의 초상화인 어진은 창덕궁 선원전에 보관되어 일제시대를 거치며 보존되어 왔는데, 한국전쟁이 터지고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불타 버리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 왕들의 어진은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익종(왕으로 추존된 효명세자) 등 여섯 임금의 것뿐이다. 이 중에 온전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어진은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영조 어진 반신상 2점에 불과하고, 연잉군 때의 영조와 철종 익종의 어진 등은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일부분만 전한다.

 

동쪽 회랑에는 정조, 세종,고종의 어진이 봉안되어 있다.

 

 

정조 어진. 상상화로 그려진 어진이다.

 

 

 

 

 

세종 어진. 이전의 어진이 전해지지 않은 가운데 운보 김기창 화백이 1973년에 그린 것이다. 오늘날 세종대왕상의 기본이 된 이 어진은 한때 김기창이 자신의 얼굴의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고종. 조선 말기 화가 채홍신이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황제의 나라인 대한제국 선포 후에 그려져 황룡포를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서쪽 회랑에는 영조, 철종 등의 영정을 모셨다. 영정을 덮고 있는 유리가 빛에 반사되어 정면 사진 촬영을 못했다. 

 

 

 

 

 

 

 

더보기

 

※ 영조와 철종의 어진 진본

 

<영조 어진> 10년에 한번씩 어진을 그렸다는 영조의 상반신 어진이다.

 

 

 

<철종 어진> 어진의 반이 사라진 모습. 한국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 전주를 다녀온 한 달 뒤, 경기전 뒤편에 어진박물관을 개관하였다는 소식을 접한다. 조경묘 앞에 공사중이던 건물이 아마도 이 어진박물관이었던 모양이다.

 

일제의 문화재 훼손 정책은 전국에 걸친 것이지만, 이곳 경기전도 일제시대에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1919년에는 경기전의 서쪽 부속채가 철거되고 이 자리에 일본인 초등학교가 세워졌으며, 1937년에는 별전이 철거되었다.

 

1963년에 별전이 있던 자리에 전라북도 박물관이 건립되고 1976년에는 전주시에서 인수하여 전주시립박물관으로 새로이 개관되었다.

 

1990년에 경기전 정문을 설치하고 이듬해 박물관을 철거한 후 전주사고 '실록각'을 복원하였다. 1995년에 부속채들이 있던 중앙초등학교 교사를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2004년에는 <경기전의(慶基殿儀)>의 내용을 바탕으로 전사청 등 부속채 들을 복원하였다.

 

 

 

 

 

■ 경기전 서쪽 부속채들

 

경기전의 동쪽 담장 너머 넓은 공간에는 전주사고와 예종대왕 태실이 있다. 

 

그리고 서쪽 담장 너머로는 뒤편으로 어진전에 제를 올리기 위한 시설로 전사청과 조병청 그리고 제기고가 있으며, 중앙에 동재와 서재,  앞쪽으로는 경덕헌과 수복청이 자리잡고 있다. 1919년 일제가 부속채들을 철거하고 일본인 학교인 중앙초등학교를 세운 자리를 다시 복원하여 복원한 것이다.  

 

 

어정. 임금이 마실 물이나 음식을 만드는 데 쓰는 물을 긷는 우물이다.

 

 

 

 

 

서재와 동재. 제사를 지내는 제각이다. 동재의 동쪽 담장 너머로 경기전 내삼문과 본전이 보인다.

 

 

 

 

 

서재와 그 뒤로 보이는 어정, 전사청(제사를 관장하는 전사관이 집무하는 곳), 그리고 조병청(제사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곳)

 

 

 

 

 

서재 마루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짚신과 미투리를 엮고 있고, 아저씨 한 분은 망태기와 삼태기 등 새끼를 이용한 민속 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시간을 거슬러 사라져 버린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은 무엇에 비길 수 없다. 

 

 

 

 

 

 

 

수복청(왼쪽)과 경덕헌(오른쪽). 수복헌은 제사를 맡은 하급 관원들이 수직하는 곳으로 행사 때 임시로 거처하는 일종의 살림집이고, 경덕헌은 경기전 일원을 지키는 수문장청이다.

 

 

 

 

 

※ 경기전 서편 공간 안내도

 

 

 

 

 

 

그리고 경기전의 뒤편으로는 조경묘(肇慶廟)가 자리잡고 있다. 조경묘는 태조의 22대조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인 신라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 부부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년(영조 47)에 지은 것이다.

 

 

순서대로라면 조경묘와 전주사고, 예종 태실 등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하겠지만 이 공간이 바로 경기전 주변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바로 오목대와 이목대로 향한다. 조경묘와 전주사고, 예종 태실은 다음날에야 찾는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