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주 여행 (1) 풍남문, 전동성당

모산재 2010. 11. 23. 00:54

 

한글날이 주말과 겹쳐진 날 아침 전주 여행을 떠났다. 이보다 더 좋은 날씨가 있을까 싶은 가을날이다.

 

전주 막걸리에 맛들려 사내들끼리 수차례 전주를 들락거리긴 했지만, 전주의 역사를 한번이라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던 터였다. 효자동의 막걸리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남부시장의 콩나물 해장국집에서 아침 해장을 즐기면서도 바로 곁에 있는 한옥마을을 찾으려고 했던 적은 없었으니...

 

 

고속터미널에서 내리니 마침 점심 때... 전주비빔밥 맛보자고 성미당(서신점)을 찾았다. 놋그릇에 담긴 비빔밥 한 그릇에 만원, 육회를 넣은 육회비빔밥은 만이천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맞지 싶다. 비싸다는 느낌이다.

 

식사를 한 뒤 고속터미널 입구의 관광 안내 부스에서 얻어 온 '전주여행 '안내도를 들고 여행 순서를 잡아본다. 일단은 눈에 띄는 굵직한 여행지를 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한다.

 

풍남문-전동성당-경기전-오목대-이목대-견훤왕궁터-전주향교-전주객사

 

 

 

▼ 전주 한옥마을 안내도 (전주한옥마을 홈페이지에서 크롭 인용)

 

 

 

 

 

■ 전주 풍남문(全州 豊南門)

 

 

옛 전주부성의 남문으로 전주의 상징이라는 풍남문에서부터 둘러보기로 하였는데, 택시를 타고 도착하고 보니 하필이면 공사중이다. 풍남문을 중심으로 전주한옥마을과 남부시장이 연결된다.

 

 

 

 

 

▼ 보수 이전의 풍남문 모습(문화재청 자료)

 

보물 제308호로 지정되어 있는 풍남문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파괴된 것을 영조때(1734) 성곽과 성문을 다시 지으면서 명견루라 불렀다.

 

'풍남문(豊南門)'이라는 이름은 영조 43년(1767) 화재로 불탄 것을 관찰사 홍낙인이 영조 44년(1768) 다시 지으면서 붙인 것이다.

 

전주부성에는 원래 4대문이 있었지만 1905년 조선통감부의 폐성령에 의해 풍남문만 남고 3대문이 동시에 철거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 때

풍남문도 많은 손상을 입었는데, 197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보수공사로 종각과 포루, 풍남문 바깥쪽 옹성을 복원하여 옛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아래층이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된 중층문루(重層門樓)의 팔작지붕이다. 중앙에 무지개문(홍예문)이 있으며 그 위에 중층 문루를 세웠다. 아래층 내부에 앞뒤 두 줄로 4개씩 세운 높은기둥(高柱)이 그대로 위층의 갓기둥(邊柱)이 되었는데 한국 문루 건축에서는 드문 형식이라고 한다.

 

전주시에서는 앞으로 나머지 3개의 성문과 성벽을 되살리는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4대문의 원래 모습과 정확한 위치를 찾는 데는 실패한데다 예산 확보가 어려워 주춤하고 있는 상태라 한다.

 

 

 

 

■ 전주 전동 성당(全州殿洞聖堂)

 

 

풍남문에서 큰길을 건너면 남동쪽으로 푸른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아름다운 교회 건물이 나타난다.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하는 전동성당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성당 왼편으로 두 팔을 벌리고 선 예수상이 보인다. '예수평화상'이라는 이 조각상 앞에는 성경 모양의 오석에 한글과 영문으로 전동성당을 소개한 글을 새겨 놓았다.

 

 

 

 

 

푸른 잔디로 잘 가꾸어진 뜨락에 고풍스런 건물이 솟아 있는 모습은 참 아릅답다. 성당 건물은 화강석 기단 위에 올린 붉은벽돌 건물로서 호남지방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의 하나다. 중앙의 우뚝 솟은 종탑을 중심으로 양쪽에 작은 종탑을 배치하여 균형감과 함께 건물의 상승감을 더해 준다.

 

 

3랑식(三廊式)으로 된 건물은 육중하며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외관은 소박하고 단조로운 편이다. 두껍고 육중한 벽에 창문은 작다. 둥근 아치와 튼튼한 기둥, 큰 탑과 장식적인 아케이드(늘어선 기둥 아래의 공간) 등은 로마네스크 건축의 두드러진 양식이다.

 

 

 

 

 

100년이 넘는 역사의 격랑 속에 전동교회도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국 전쟁 중에는 인민군이 점령하여 전라북도 인민위원회, 차량 정비소와 보급 창고로 사용하기도 했고, 1980년에는 전북 지역의 '민주화의 성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88년 10월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이듬해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보수 공사를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전동성당 내부를 들여다보면 열주(列柱)와 돔형 천장으로 된 공간이 신비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처럼 열주에 의해 지탱되는 아치군(群)과 그것이 조성하는 개방된 통로 공간을 아케이드라고 한다. 절로 신앙심이 생겨날 것 같다.

 

 

 

 

 

잠시나마 마치 유럽에나 온 듯한 환상에 젖게 만든 전동성당은 그러나 피에 젖은 역사가 담겨 있는 건물이다. 

 

전동성당은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함으로써 참수형을 당한(신해박해=진산사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지이며, 또한 십 년 뒤 1801년 신앙의 자유를 위해 외세를 끌어 들이려다 대대적인 검거 선풍(신유박해)과 함께 '호남의 사도'로 불리던 유항검 등 초기 전라도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순교한 곳이다. (아래 '신해박해와 신유박해의 주인공들' 참고)

 

이들이 순교한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 보두네(한자명 尹沙物) 신부에 의해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이 마련되었고, 1908년 프와넬(한자명 朴道行) 신부의 설계에 따라 7년만인 1914년에 건물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성당 건립 공사는 중국인이 맡았는데, 중국인 인부 100여 명이 벽돌을 굽고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풍남문 밖 성벽의 돌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신해박해와 신유박해 때 순교자들이 능지처참되고 참수 당하던 것을 지켜 보았던 성곽의 돌들을 주춧돌로 사용한 것이다.

 

더보기
※ 신해박해와 신유박해의 주인공들

  

■ 신해박해(진산사건),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윤지충은 고산 윤선도의 6대손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으며,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정조 때 좌상인 채제공의 신망을 받아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다. 진사에 급제한 이듬해 서울에 갔다가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서학을 접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약용 형제들의 지도로 열렬한 신자가 되고 다시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에게 전교한다. 권상연은 안동이 고향으로 문학과 윤리를 공부하다가 고종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789년에 이어 두 번째로 1790년 9월 중국 북경에 파견된 윤유일(바오로)은 선교사 파견에 대한 북경 구베아 주교의 약속과 함께 조상 제사 금지라는 회신을 갖고 왔다. 이 일로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큰 시련이 닥쳐왔다. 천주교의 전례와 유교 의식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제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로부터 소위 '진산 사건'으로 알려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사가 시작됐다.

전라도 진산에 살고 있던 윤지충은 1791(신해)년 5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신주를 불태우고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 전통 사상과 제도를 거스르는 이 '분주폐제(焚主廢祭)' 사건은 조선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왔다. 이 사건은 이후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에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고 결국 1791년 12월 8일 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되어 전주 풍남문에 내걸렸다. 9일이 지나서야 시체를 거두어 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윤지충이 전라 관찰사에게 적어서 남겼다는 '공술서(供述書)'는 한국 교회사에서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공식 변론으로 기록되고 있다. 전라감사가 유교 제사를 폐지한 이유를 묻자 윤지충은 "제사의 음식은 육신의 양식으로 영혼에게 음식을 드리는 것은 허례허식이다. 그리고 신주는 목수가 만든 목편(木片-나무조각)에 불과하니 죽은 영혼이 물질적인 나무에 붙어 있을 수 없다." 라고 주장하였다. 견고한 신앙을 조목조목 정연하고 조리 깊게 적은 이 변론은 훗날 신도들의 영적 독서로 읽혀졌고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이 쓴 <상재 상서(上宰相書)>의 뼈대가 됐다.

 

 

■ 신유박해와 유항검(柳恒儉)

 

조선 말 4대 박해 중 첫 박해인 신유박해(1801년) 때에는 조선인 신자 500여 명이 체포되었으며, 전라도 교회에서만 무려 200여 명이 체포되었다.

유항검(1754~1801)은 전주부 사람으로 유명한 토호요 거부였던 그는 덕망과 재산으로 인해 세력이 컸다. 그는 새 종교에 대한 말을 듣고 윤지충(尹持忠) ·권일신(權日身) 등에 의해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권철신을 찾아가 천주교의 교리를 받고 실천하기 시작하여 가족과 이웃들에게 소식을 전하였다.

그는 가성직(假聖職)제도에 따라 신부의 권한을 위임받고 호남지방 전교에 힘써 '호남의 사도'로 불리었다. 그러나 가성직제도가 교리에 어긋날 뿐 아니라 교회를 모독하는 일임을 알게 되자 그 제도를 폐지하는데 앞장섰다. 그 후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땅에 잠입시키고 그를 도왔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갈구하면서 대박청래 운동(大舶請來運動 -외국의 큰배를 불러들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호남지방에서 제일 먼저 체포되어 대역부도죄와 사학괴수로 9월 17일, 풍남문 밖에서 능지처참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조정은 유항검의 머리를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만인에게 경각심을 주었다. 또한 그의 생가를 파가저택(집을 허물고 그 곳에 연못을 만들게 함)하고 재산도 몰수하였다.

그리고 이 때 부인, 동정 부부였던 큰아들 중철과 며느리 이순이(누갈다), 둘째아들 문석, 동생 관검과 그의 아들 종선 ·문철 등 일가족이 순교하였다. 16세 미만의 세 자녀는 귀양을 보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과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은 역적모의죄로 능지처참형을 받았고, 김유산과 이우집은 불고지죄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매장지는 전북 김제군 용지면 재남리 바우백이였으나, 전동 초대 주임신부인 보두네 신부가 1914년 3월 사순절에 전동성당으로 안치했다가, 같은 해 4월 19일 치명자산으로 옮겨 모셨다.

 

 

■ 전동성당의 순교자들

 

두번에 걸친 박해로 전동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의 7인이 순교한 성지가 되었다.

- 윤지충(바오로 33세)/전라도 진산 출신. 폐제분주로 참수형/ 순교일 :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 권상연(야고보 41세)/전라도 진산 출신. 폐제분주로 참수형/ 순교일 : 1791년 11월 13일(양력 12월 8일)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48세) /전주 초남리 출신.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형/ 순교일 : 1801년 9월 17일 (음력)
- 윤지헌(38세) 윤지충의 아우/고산 저구리 거주.역적모의죄로 능지처참형/ 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고지죄로 참수형/ 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 이우집(40세) 유관검과 친척/전라도 영광 사람. 불고지죄로 참수형/ 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전동성당을 나와서 바로 맞은편에 있는 경기전(慶基殿)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경기전은 왕조의 발상지인 이곳,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전각이다.

 

 

▼ 전동성당 앞 거리 풍경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