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주 여행 (4) 오목대와 이목대, 태조와 목조의 유허지

모산재 2010. 12. 2. 16:28

 

경기전 동쪽과 북쪽에 전주사고와 조경묘가 있는 줄 알았으면 먼저 살펴 보았을 것을... 

 

그것도 모른 채 경기전을 나와 다시 태조로(경기전과 전동성당 사이로 난 큰 길)를 걸어 동쪽의 오목대로 향한다.

 

그런데 태조로를 메우고 달리는 차량들로 한옥마을에서 기대하는 느긋한 평화는 여지없이 깨져 버리지 않느냐.  이곳을 차량이 다니지 않는 거리로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일까.

 

 

 

태조로가 거의 끝나는 곳, 공예품전시관이 있어 잠시 들로 한 바퀴 돌아본다. 그리 내 마음을 끄는 것들은 보이지 않아 뜰로 들어서는데, '청소년 차 예절 경연대회' 시상식을 하고 있다. 시상식보다는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구경을 한다. 

 

 

 

 

태조로가 끝나는 곳에 외곽도로인 넓은 기린로가 나 있다. 기린로는 오목대가 있는 산허리를 두 동강 내고 전주천을 향해 달린다.

 

태조로와 기린로가 만나는, 산허리가 잘려 나간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오목대 오르는 언덕길이 이어진다.

 

그 언덕길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한옥마을의 풍경이 아름답다. 한옥마을 전체를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 오목대라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문득 중국 운남성의 리지앙(麗江)에서 만고루에 올라 내려다보던 아름다운 기와집 풍경들이 떠오른다. 

 

 

 

물론 도시 전체가 옛 기와집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리지앙만큼 장관이라 할 수 없지만, 750여 채의 한옥이 자리잡고 있는 풍경은 이 땅 어디에서고 다시 찾을 수 없는 옛 풍경 아니겠는가. 풍남동과 교동은 남한 최대의 한옥 밀집지역인 것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은 천민이나 상인들이 살던  서문 밖 전주천변에 몰려들었는데, 1907년 양곡 수송을 위해 전군가도(전주-군산길)가 개설되면서 성곽 서쪽이 헐리고 이어 1911년 남문을 제외한 성곽 동쪽이 모두 헐리면서 전주성은 사라져 버렸다. 성이 사라지면서 일본인들은 성 안 중앙으로 진출하여 상권을 차지하게 되고, 이에 반발하여 조선 사람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풍남동과 교동 일대의 한옥들은 중앙과 서부의 일본식 가옥들, 화산동의 서양식 선교사 마을과 학교 교회당 등과 대비되며 전주는 독특한 색깔을 띄는 도시가 되었다.

 

 

■ 오목대(梧木臺)

 

오목대로 오르는 길은 나무계단으로 되어 있다. 길 옆은 커다란 나무들이 엉성한 숲을 이루고 있고, 숲 아래 공간은 잡풀과 덤불들이 차지하고 있다. 좀 괜찮은 숲으로 가꾸었으면 좋을 것을... 어쨌거나 이곳은 오래 전부터 전주 시민의 휴식 공간이 되어 온 곳이다.

 

계단 위로 정자의 윗부분이 올려다 보이더니, 금방 오목대 넓은 마당으로 올라선다.

 

 

 

경기전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거리에 자리잡은 오목대(梧木臺, 지방기념물 16호)는 서남쪽의 언덕이 벼랑을 이룬 다소 길쭉한 타원형의 돈대인데, 둘레에는 토성의 흔적이 있다.

 

오목대라는 이름이 특이한데 이곳에 오동나무(梧木)가 많았던 것일까. 맞은편에 있는 이목대는 배나무(梨木)가 있었던 곳이었겠지... 하지만 주변에 오동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이곳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의 본향인 이목대 부근으로 조선 왕조의 창업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적인 공간으로 남아 있다. 오목대는 고려 말(우왕 6년, 1380년) 이성계가 운봉 황산에서 '아지발도'라는 소년 장수가 이끄는 왜구들을 물리치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러 종친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던 곳이다.  

 

※ 황산대첩

  

왜구의 침입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고려 말기에는 더욱 극심해졌다. 13세기 고종대 이래 연안에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의 침공이, 14세기 후반 충정왕대 이후 극심해졌으며, 우왕대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왜구들은 1376년 충청도 홍산에서 최영에게 크게 패한 뒤 한동안 잠잠했으나, 1380년(우왕 6) 8월 500척의 대선단으로 진포(鎭浦-금강 어귀)에 침입하였다. 왜구는 배를 정박시켜 놓고 육지로 올라와,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역에서 갖은 약탈을 다 자행하였다. 왜구는 수도 개경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화 교동(喬桐)과 예성강까지 나타났다.

 

조정에서는 나세(羅世)를 상원수,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하여 왜적을 공략하도록 하였는데, 진포 싸움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포를 처음 사용하여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우고 대승을 거두었다. 배들이 모두 불타 퇴로가 막히자, 이 때 목숨을 건진 자들과 이미 상륙해 있던 자들이 합류하여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더욱 잔인한 약탈과 살상을 자행했다. 왜구는 경상도 상주·선산·경산부(지금의 星州) 등을 차례로 노략질하고 지리산 근방의 사근내역(沙斤乃驛 : 함양)에 집결하고 있었다. 지리산 일대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이에 이성계를 충청․전라․경상 3도 도순찰사에 임명하여 왜구 대토벌전에 나섰다. 이성계는 운봉에 있는 황산 서북의 정산봉(鼎山峰)에서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때 왜구의 수가 10배나 많았으나 겨우 70명 만이 살아남아 지리산으로 도망갔으며, 왜구의 전사한 피로 강이 물들어 6,7일간이나 물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노획한 말만도 1600여필이었다고 한다.

 

당시 왜구의 소년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가 날쌔고 용맹했는데, 이성계가 활을 쏘아 그 투구끈을 맞혀 투구가 떨어진 사이 이지란(李之蘭)이 화살을 날려 이마를 맞혀 사살했다고 한다.

 

이때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577년(선조 10) 전라남도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괴하여 원상이 훼손되었으나, 남아 있던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이용하여 1957년에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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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지발도 이야기'

 

'아지발도 이야기'이성계남원 황산대첩과 관련된 이야기로 이성계아지발도에 관한 전설은 남원시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운봉 일대에는 황산대첩과 관련한 지명이 많이 유래하고 있다. 이성계의 놀라운 활솜씨와 이성계가 영계(靈界)의 도움을 받는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전하는 이야기로, 역사적 사실에 신비성을 가미한 것으로 전래되고 있다.

고려 후기로 들어오면서 일본군은 고려를 침략하여 지리산에 진을 치고 노략질을 일삼았다. 조정에서는 이성계퉁두란에게 왜구를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일본군 장수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린데도 무예가 뛰어나고 두꺼운 갑옷과 투구를 쓰고 있어서 화살을 쏘아도 잡을 수가 없었다.

이성계아지발도를 잡으려고 며칠째 황산에서 기다리는데, 아지발도는 꼭 황산 앞에서 자기들 진지로 되돌아가 계속 실패만 하였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아지발도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누이로부터 조선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루는 아지발도가 자고 있는데, 아직 새벽이 되지도 않았는데 닭이 울었다. 아지발도는 닭이 우니까 새벽인가 싶어 일어나 고남산 쪽으로 올라갔다. 이성계는 ‘옳다!’ 싶어서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할머니를 시켜서 아지발도 앞으로 보냈다.

아지발도가 “여기 어디에 황산이란 곳이 있느냐?” 하고 물으니 할머니는, “여기엔 황산이란 곳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랬더니 아지발도는 안심하고 계속 앞으로 걸어왔다.

이윽고 날이 완전히 밝을 무렵 아지발도황산으로 올라오므로 퉁두란이 화살을 쏴서 아지발도의 투구를 맞추었다. 아지발도는 땅에 나뒹굴며 입을 벌렸다. 이때 이성계아지발도의 목구멍에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그래서 아지발도황산에서 많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아직도 황산다리 아래 바위가 벌건데, 사람들은 그것이 아지발도의 피라고 하면서 그 바위를 피바위라고 부른다. 이성계아지발도를 죽인 것을 계기로 고남산태조봉이라고도 불린다.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황산대첩을 거둔 이성계는 귀경 길에 선조들이 살았던 전주에 들려 오목대에서 일가친지를 불러모아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여기에서 술이 거나해진 이성계가 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다고 한다.

 

大風起兮雲飛楊(대풍기혜 운비양)           큰 바람이 일어나서 구름이 날아 오르다.
威加海內兮歸故鄕(
위가하내혜 귀고향)    위세가 해내에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安得猛士兮守四方(안득맹사혜 수사방
)   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사방을 지키게 할까 .

 

대풍가를 통해 이성계는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야심, 천하제패의 꿈을 드러냈다.

 

그러자 종사관으로 참전했던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고, 그는 홀로 말을 달려 남고산성 만경대에 올라 개경을 바라보며 비분강개한 마음을 시로 읊었다도 전한다.

 

岡頭石逕橫(천인강두석경횡)    천길 바윗머리 돌길 가로질러

登臨使我不勝情(등임사아불승정)    올라서니 이 마음 걷잡을 수 없네.

靑山隱約夫餘國(청산은약부여국)    청산을 다짐하던 부여국은

黃葉紛百濟城(황엽빈분백제성)    누른 잎이 흩날리어 백제성에 쌓였네.
九月高風愁客子(구월고풍수객자)    구월 높은 바람에 나그네 시름 깊고

百年豪氣誤書生(백년호기오서생)    백년의 호탕한 기상 서생은 그르쳤네.
天涯日沒浮雲合(천애일몰부운합)    하늘가 해는 기울고 뜬구름 만나니

矯首無由望玉京(교수무유망옥경)    고개 돌려 속절없이 옥경만 바라보네.

 

이 시는 전라도 관찰사 권적이 1742년에 남고산성 만경대에 새겼다고 한다. 정몽주는 이 시를 남긴 지 12년 만에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했으니, 이미 이 시기에서부터 이성계와 정몽주는 정치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로 돌아섰던 모양이다.

 

 

 

오목대는 전주인들의 자긍심을 나타내는 상징적 공간이기도 한 모양이다. 그 옛날 전동성당을 태조 유허지인 이곳 오목대 자리에 세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전라감사가 반대 상소를 올려 무산되었다. 그 감사가 바로 나중에 일제 앞잡이로 변신한 이완용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도 이곳 오목대를 피해 다가산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오목대 남쪽 방향으로는 비각 하나가 서 있다.

 

 

 

비각 안에는 비석이 서 있는데,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址)'라고 씌어 있다. '태조고황'은 '이성계를 가리키고 '주필은 임금이 머무른 장소를 뜻하니, 이 비문은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첨을 승리하고 머물렀던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비문은 1900년 고종 황제가 친필로 쓴 것이다. 

 

 

 

 

정보를 찾다보니 전주시에서는 오목대 일대를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조성해 나갈 계획이라는 기사문이 있다. 문화관광 인프라 구축에 도움을 주고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활동영역을 지원해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목대를 둘러본 다음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의 유허지 이목대로 향한다.

 

오목대 뒤로 돌아 이목대로 가는 길은 기린로 위를 건너는 육교로 이어져 있다. 원래 산줄기가 오목대까지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1931년)에 전라선 철길을 내며 동강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철길이 이전되고 없고 넓은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육교를 지나는 이 길은 한옥마을 둘레길로 개발된 모양이다.

 

 

 

전라선이 이곳을 지날 때면 알 수 없는 이유로 속도가 느려진다는 전설까지 소개해 놓았는데, 어쨌거나 산허리를 잘라내 도로가 지나가는 모습은 살풍경하다.

 

전주시에서도 교동 오목대와 이목대 사이를 지나는 기린로 1.2km를 지하 도로로 만든 뒤 기존 도로에 공원과 주차장 등을 만들어 이들 유적지를 연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 이목대(梨木臺)

 

오목대에서 육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70m쯤 가다보면 가파른 언덕 위 좁은 터에 이목대가 자리잡고 있다. 오목대처럼 커다란 누대가 있을 거라 상상했는데 비각만 보일 뿐이다. 

 

이목대는 시조 이한() 때부터 누대에 걸쳐 살던 곳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가 태어나 이 곳에서 진법놀이를 하며 자란 곳이다. 

 

목조는 당시 전주부사와의 불화로 함경도로 옮겨갔는데 이는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으므로 이를 하늘의 뜻이라고 여겼다 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용비어천가' 제3장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목조가 전주를 떠나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와 산성별감,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에게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주관과 안렴사는 관의 명을 거절했다는 혐의로 목조 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보내기로 책동하였고, 목조는 결국 전주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목대와 마찬가지로 이목대 비각 속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가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목대의 원래 위치는 이 비각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고 한다. 이목대는 일제 때 철길을 내면서 옮겨졌고, 남원 가는 도로인 기린로를 확장하면서 또 한번 옮겨진 끝에 이곳에 온 것이라고 한다. 

 

이목대의 원래 위치는 오목대 앞자락에 위치한 봉우리로, 전주향교 뒤편에 있었다는 것이다.

 

 

※ 용비어천가 제3장

 

周國(주국)大王(대왕)이 豳谷(빈곡)애 사샤 帝業(제업)을 여르시니   주나라 대왕이 빈곡에 사시어서 제업을 여시니.

우리 始祖(시조)ㅣ 慶興(경흥)에 사샤 王業(왕업)을 여르시니           우리 시조가 경흥에 사시어서 왕업을 여시니.

昔周大王 于豳斯依 肇造丕基 今我始祖 慶興是宅 肇開鴻業

 

(풀이)

 

<전절 >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것은 무왕 때 이루어졌지만, 그 제업의 기초는 시조 후직의 12세손 고공단보가 빈곡에서 조상의 업적을 이어받고 덕을 쌓아 백성들이 다 추대했을 때부터이다.

 

<후절> 목조가 전주에서 살다가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으로 옮기니, 170여 호의 백성이 그를 따랐다. 그 후 원나라에 귀화하여 경흥 동쪽으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에서 원나라로부터 다루가치(達魯花赤: 정복지에 파견 통치하는 관리)라는 벼슬을 받아 우리나라 동북면의 민심이 목조께로 돌아가니 조선 왕업의 기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목대에서 오동나무(梧木)를 못 봤는데, 이목대에서도 배나무(梨木)를 보지 못했다. 어째서 오목대이고 이목대인 것인지...

 

이제 이목대를 지나 견훤의 궁궐터로 가볼까나.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