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주 여행 (5) 한벽당과 한벽굴, 석양의 전주천 풍경, 남천교

모산재 2010. 12. 4. 10:19

 

전주 여행지도 속에 견훤 왕궁터가 표기되어 있어 찾아 보기로 하고 이목대에서 기린로로 내려서서 한벽당 방향으로 걷는다.

 

 

 

여행지도에는 길 표시가 분명하지 않아서 막연히 방향만 잡고 걷는데, 동쪽으로 넘어가는 길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린로가 전주천을 만나 다리를 건너는 지점에서 터널 하나가 나타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벽굴'이라고 하는 터널이다. 기린로로 이어지는 그 옛날의 전라선 철길 터널이다. 지금은 동쪽 산 너머로 철길이 옮겨가고 기린로와 전주천 상류 천변길을 잇는 사람들과 차량의 통행로로 이용되고 있다.

 

 

 

 

 

여행 지도로 보면 이 부근에 한벽당이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산기슭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터널을 지난다.

 

터널을 지나면 견훤궁터로 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런 길은 보이지 않고 전주자연생태박물관이 나타난다. 유유히 흐르는 자연하천 전주천을 앞에 두고 썩 잘 어울리는 곳에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생태박물관 뜰에 각시취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아 주민으로 보이는 이에게 물으니 터널을 지나오기 전 이목대 아래쪽에서 난 고갯길로 넘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다시 한벽굴을 지난다. 한벽굴 바로 앞에 한벽당(寒碧堂)이라고 적어 놓은 팻말이 있는데 길이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여행을 다녀온 다음에야 한벽당이 바로 한벽굴 위에 있음을 알게 됐으니... 좀 떨어진 천변 길에서 바라보면 한벽굴 위로 정자의 일부가 보인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까...

 

어쨌거나 정자 아래로 철길 터널을 뚫었다니, 참 기가 막힐 일이다. 그런데 일제는 애초에 한벽당을 헐어내고 철길을 내려고 하였는데 전주의 유학자들이 나서 철거를 막아냈다고 한다. 한벽당은 그대로 두고 정자 밑으로 굴을 뚫은 것이다.

 

 

아쉬움이 크지만 어찌하리.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한 나의 실수인 것을... 그래도 한벽당(寒碧堂)에 대해서는 기록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출처: Daum 백과사전

 

 

한벽굴과 한벽당이 의지하고 있는 산을 승암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이 한벽당이다. '한벽(寒碧)'은 '벽옥한류(碧玉寒流)'를 뜻하는 것이니, 바로 아래로 흐르는 전주천의 물이 시리도록 차고 푸른 기운을 발하고 있어서 '한벽당(寒碧堂)'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전주천 푸른 물은 한벽당 아래에서 바윗돌과 절벽에 부딪혀 굽이를 이루며 서쪽으로 돌아 흐른다. 이곳의 절경을 '한벽청연(寒碧晴烟)'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아왔다고 한다. '한벽청연(寒碧晴煙)'은 내가 갠 맑고 청아한 한벽당의 풍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벽당은 '달을 맞이하는 다락'이란 뜻의 요월대(遼月臺)라는 편액을 단 정자와 나란히 서 있다. 요월대는 일제 때 새로 지은 정자인데, 달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동향이어야 하는데 남향으로 지어 놓아 사람들의 지적을 많이 받고 있다.

 

 

한벽당은 조선 개국공신이자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月塘) 최담이 71세 때(1404년) 관직에서 물러나 세웠다고 한다. 원래는 '월당루'라 하였는데 후에 한벽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예전의 한벽당은 지금과 달리 5층 누각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담은 그가 지은 한벽당에 올라 그 감격을 '光風霽月 鳶飛魚躍(광풍제월 연비어약)'이란 구절로 표현하였다. '햇살 밝고 바람 맑은데 비 개인 하늘에 달이 환하게 비치고, 솔개가 높이 나는데 물고기가 뛰어노는구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나타낼 때 예로부터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한벽당은 호남의 명승으로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는데, 초의선사는 1815년경 처음 서울 가던 길에 명필 이삼만 등과 사귀어 이곳에서 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등한벽당(登寒碧堂)'이라는 시를 남겼다.

 

 

田衣當水榭 농사꾼차림으로 물가 정자에 다다르니
云是故王州 이곳은 왕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지.
谷靜禽聲遠 계곡은 고요한데 새소리 멀리 들리고
溪澄樹影幽 맑은 시냇물에 나무 그림자 그윽히 비치네.
遞商催晩日 바쁜 장사치는 저문 길을 재촉하고
積雨洗新秋 흠뻑 내린 비에 씻은 듯 산뜻한 가을.
信美皆吾土 진실로 아름다운 우리 땅이여
登臨寧賦樓 누각에 올라 어찌 노래하지 않으리.

 

 

'한벽당(寒碧堂)'이라는 편액은 강암 송성용(剛庵 宋成鏞·1913~1999) 선생의 글씨라고 한다.

 

 

 

한벽굴을 지나자 바로 오른쪽으로 나 있는 산길이 나타난다. 도로에서 멀지 않은 길섶에 비각이 하나 서 있는데, 한벽당을 세운 월당 최담 선생의 유허비이다.

 

그렇게 얕은 고개를 넘어서니 마을이 나타난다. 하지만 견훤궁터임을 알리는 어떤 표지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는데, 어느 한 사람이 건너편 산 중턱에 있을 거라면서 볼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없고 이정표도 없으니 어찌 하나. 망서리다 결국은 포기하고 발길을 돌린다.

 

 

 

전주 향교를 둘러보기로 하자 생각하고 전주천으로 향한다.

 

여러 해 전 오모가리탕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던 한벽집을 지나는데, 벌써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고 있다.

 

푸른 숲을 거느리고 아담한 한벽보에 담겨 전주천은 '한벽'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시원하고 푸른 물빛을 자랑한다. 도심을 관통하는 하천임에도 이 아름다운 전주천에는 수달과 원앙이 서식하고 쉬리와 참종개와 같은 일급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다닌다고 한다.

 

 

 

 

 

기우는 해에 역광으로 잡히는 전주천은 환상적인 빛의 세례 속에 잠긴다. 천변길과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들, 저녁 햇살을 반사하며 출렁이는 하얀 억새꽃... 한동안 바라보고 섰다.

 

 

 

 

 

 

정보를 찾다보니 지금 흐르고 있는 한벽당 하류의 물길은 원래 줄기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예전의 하천은 한벽당 아래에서 기린로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렀다는 것이다. 이 물이 덕진연못을 거쳐 추천대교 방향으로 가는데, 덕진연못과 전군도로와의 사이를 파보면 하천으로 형성된 모래층이 나타난다고 한다.

 

 

▼ 이튿날 오후의 전주천 징검다리

 

 

 

 

옛날 전주의 집들은 동쪽으로 산을 등지고 서쪽을 향해 있었는데 당시의 전주는 재물은 풍부하지 않았으나 대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물길이 바뀌고 집 방향이 남쪽으로 향하면서 재물이 풍부해진 대신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까운 곳에 현대식 건물로 넓은 공간을 거느린 전주전통문화센터를 지난다. 마당에서 널뛰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이곳에는 국악전용극장과 전통 음식관, 전통찻집, 혼례식장, 놀이마당 등이 들어앉았다.

 

 

 

 

 

그리고 전통문화센터 바로 옆골목 전주향교 들머리. 홍살문을 통해 골목 맞은편에 향교 정문 역할을 하고 있는 만화루(萬化樓)가 보인다. 홍살문 오른쪽엔 사람 키를 넘는 하마비가 멀뚱하게 서 있다.

 

 

 

 

 

천변 입구에 웬 대형 버스들이 서 있고 여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섰나 했는데, 알고보니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바로 이곳 전주 향교에서 찍고 있다고 한다. 연기자들 보려고 아이들이 몰려든 모양이다.

 

 

 

 

 

 

향교 앞 골목은 촬영 차량과 몰려든 여학생들로 북새통이다. 

 

촬영을 이유로 스탭들이 나와서 출입을 막고 있다. 어이없는 일... 하필이면 한글날이자 휴무일인 토요일에 촬영할 게 뭔가? 평일날 한적한 시간에 촬영하고 주말은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양보해야 할 것을...

 

 

 

 

 

붐비는 골목, 향교 앞 담장 서쪽 모퉁이에 서 있는 비각 안에는 효자비가 있다. '효자군수 박진지려'라고 새긴 빗돌은 1398년 태조 이성계가 내린 정려비다. 원래 풍남문 부근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주인공 박진은 정몽주의 외손자로 영암군수로 있을 때 여든을 넘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홍수로 물이 넘치는 전주천을 헤치고 건너 고향으로 돌아와 병수발을 들었다. 한겨울에 수박과 꽃을 구하고 잉어를 잡아 드리는 등 효행이 극진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八十年堂臥蛾床(팔십년당와아상) 나이 여든에 병상에 누워 있으니
六十老子藥先嘗(육십노자약선상) 예순 늙은 아들이 약맛을 먼저 보네.
死生在命終難避(사생재명종난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라 피하기 어려우니
近汝慈墳立壽堂(근여자분입수당) 네 어미 무덤 가까이 내 무덤(壽堂)이나 준비하거라.

 

 

 

결국 전주향교는 들어가지 못하고 나오는데, 해는 지고 시간이 애매하여 다시 나와 전주천을 걷기로 한다.

 

전주천으로 접어드는 길에 멍멍이 두 녀석이 아주 진한 사랑 놀음을 벌이고 있다. 근처 나무에 쇠줄로 매여 있는꼬마 검둥이를 덩치가 몇 배로 큰 흰둥이 녀석이 얼르며 민망한 장면을 연출한다.

 

 

 

 

 

수크령과 억새꽃이 마음껏 피어 있는 전주천은 도시 하천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넉넉하고 평화롭다. 물길과 산책로가 온통 콘크리트로 도배된 청계천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생태 환경이 비교적 괜찮은 양재천도 전주천에는 비할 수 없다. 직강화되어 물굽이도 여울도 없는 하천이니까...

 

 

해는 무지개다리 남천교 위의 누각을 실루엣으로 남기고 산 너머로 숨어 들었다.

 

 

 

 

 

 

석양에 물드는 억새꽃이 아름답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돌무지개다리 남천교와 누각. 

 

전통적인 양식의 무지개다리와 누각으로 디자인한 발상은 참 괜찮은데, 아담한 전주천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거대하고 육중하여 부담감이 백 배다.

 

전주의 상징이라 할 한옥마을과 생태하천 전주천을 왜소하게 만들어 버리다니... 큰 것이 좋은 것은 아니련만 편안하고 정감있는 다리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섬세한 문화 감각이 아쉽기만 하다.

 

 

 

 

 

예전의 남천교는 너무 낡아 재작년 공사를 시작하여 작년 12월 말에 새 다리가 준공되었다고 한다. 옛날에 있었던 무지개다리 형식으로 건설하고 위에는 팔작지붕의 누각 청연루(晴烟樓)를 올렸다. '한벽청연(寒碧晴煙)'에서 따온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남천에 돌다리가 있어 남원으로 통하는 길목 노릇을 하였는데 홍수에 떠내려가 버려 오랜 세월 불편을 겪던 중, 정조 때(1791년) 중국 오강(吳江)의 홍교(虹橋)를 본떠 무지개 다리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공사에는 전주부 내 각 면에서 차출한 7,400여 명의 연군(烟軍)들이 동원되고, 호남 32개 고을과 수많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아름다움과 위엄을 갖춘 남천교는 완성되었다.

 

남천교는 무지개 모양의 다릿발이 물 위에 비친 다리 모습이 안경 같다 해서 안경다리, 다섯 개의 무지개가 뜬 것 같다 해서 오홍교(五虹橋), 다리의 난간 기등에 다섯 마리의 용을 새긴 조각 장식이 있어 오룡교(五龍橋) 등 여러 이름으로 렸는데, 홍수로 여러 차례 파손되고 개축하기를 되풀이하다 1907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사라져 버렸다.

 

 

 

 

 

1922년에 옛 남천교 자리보다 약간 하류 쪽에 전주교라는 이름의 콘크리트 다리를 만들었는데, '싸전다리(米廛橋)'라고 부르기도 했다. 예전에 나무다리가 있던 곳인데, 옛날에 이 다리목을 끼고 좌우에 싸전(쌀가게)들이 늘어 서 있어서 '싸전다리'라고 한 것이다.

 

 

 

 

싸전다리에서 남부시장으로 올라서니 어둠이 내리는 거리 불빛들이 점차 또렷해졌다.

 

 

전주 막걸리라도 한잔 해야지... 효자동 홍도주막으로 갈까 하다가 삼천동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막걸리집이라는 '용진집'으로 향한다. 언덕길에 있는 협소한 집, 초저녁인데도 사람들이 가득차 있다. 용케 자리 하나가 나 있어 앉는다.

 

 

 

 

 

막걸리 한 주전자 만오천 원. 한두 해 찾질 못했더니 만이천 원하던 값이 많이 올랐다. 전주 이름값 할 만한 안주이긴 한데, 홍도주막에 비해서는 좀 섭섭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한 주전자 더 시켜도 약간의 추가 안주만 나올 뿐이다.

 

 

 

 

 

그래도 두 주전자의 술을 비우고 나니 배도 부르고 팽팽하게 거나해지는 기분도 좋아지지 않느냐...

 

한옥마을도 즐겁게 돌아보았겠다, 만족스런 마음으로 숙소를 찾아든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