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북한산 둘레길, 소나무숲길-순례길 구간을 걷다

모산재 2010. 11. 3. 19:49

 

처음 북한산 길을 우이동에서 걷는다는 말을 무심코 들을 때는 연전에 개방한 우이령길을 걷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야 우이령길이 아니라 둘레길이며, 북한산에까지 둘레길이 생겼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지난 8월 말에 개방하였다고 하는군요.

 

북한산 산자락 곳곳을 건물들이 차지하고 들어섰는데 무슨 둘레길일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들이 펼쳐지고 민가가 나타나고... 그리고 멀리 산 첩첩 강 구비구비... 들꽃 향기를 맡으며 새 소리 듣다가 사람사는 모습 보며 역사의 숨결을 느끼기도 하고... 둘레길이건 올레길이건 걷는 것의 즐거움은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의아스러우면서도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네요. 제1구간을 걷기로 했다면서 우이동 계곡 쪽으로 이동합니다.

 

둘레길로 들어서기 전 짐을 내리고, 주차하러 간 사람을 기다리는 사이 돗자리를 펴고 캔맥주 한잔씩 돌리며 살짝 기분을 내는 중입니다. 

 

 

 

낮술을 피해 멀찌감치 해바라기만 하고 섰습니다. 그늘에 있기보다는 햇볕을 쪼이는 것이 더 기분 좋은 계절이 되었습니다.

 

 

정보 검색을 해보니 '북한산 둘레길' 홈페이지가 생겼군요. 둘레길을 만든 취지를 보니, <역사 문화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살아 숨쉬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길>이란 목표로 급격히 늘어난 등산객을 저지대로 분산시켜 북한산 높은 봉우리와 능선 지대의 자연 훼손을 막고 어린이와 노인, 장애우 등 사회적 약자층의 편의를 위해라고 하네요. 

 

제1구간이라고 들어서 그런가 했는데, 그런 구간은 없고 모두 13구간을 만들어 주제에 따라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걷기로 한 구간은 이 중에서 '소나무 숲길'과 '순례길' 두 구간입니다.

 

 

이것은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자료. 구간을 주제별로 이름 붙여 놓았습니다.

 

 

 

우이동 계곡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금방 둘레길로 들어섭니다.

 

둘레길에 세워 놓은 윤곽지도입니다. 여기에는 구간별 명칭이 없군요.

 

 

 

소나무숲길은 그야말로 이 구간에 소나무숲이 많아서 생긴 이름입니다. 둘레길 중 유일하게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는 우이계곡에서부터 수유리 솔밭근린공원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아래는 홈페이지에 실린 소나무숲길 안내도입니다.

 

소나무숲길 코스 지도

 

 

소나무숲길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가까운 곳에 손병희의 묘소가 있지만 그냥 지나칩니다. 들러보고 싶지만 함께 가는 길에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요. 천도교 교령이자 3.1운동 민족대표였던 그이지만 일진회에서의 친일 행적 의혹이 있기도 합니다. 

 

 

 

둘레길 주요 길목엔 이런 안내도가 세워져 있습니다. 

 

 

 

늘 정상이나 능선을 향해 오르다가 갑자기 내리막길이 더 많은 둘레길을 걸으니 편하고 여유롭습니다. 가파른 산길이 부담스런 이들에게는 가벼운 운동이 되는 좋은 산책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심심하고 밋밋할 듯합니다. 게다가 비슷한 산길 풍경이 이어져 지루한 느낌도 듭니다.

 

소나무숲길이라고 하여 소나무숲만 지나는 것은 아니겠지요. 신갈나무나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 숲도 함께 어울립니다.

 

 

 

 

만고강산이라는 약수터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북한산 둘레길은 그다지 걷는 재미를 느끼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계곡을 건너고 들을 만나고 고개를 넘고 마을로 들어서고... 그런 변화를 느낄 수 없이 무작정  걷기만 하는 길은 답답한 것이지요.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산길 양쪽으로 담장이 있는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마을로 내려선다는 뜻이지요. '박을복자수박물관'이라는 것도 눈에 띄네요. 박을복은 전통자수에 근·현대회화의 흐름을 결합시킨 자수를 발전시킨 분이라고 합니다. 이미 100세에 가까운 분입니다. 유료 관람할 수 있도록 개관한다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혼자 왔으면 들어가 보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소나무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솔밭근린공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에 도착해서야 소나무숲길이라는 이름이 실감이 납니다. 평활한 공원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많은 시민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휴식을 즐기고 있습니다. 평일 오후인데도 주말이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인공 폭포가 흘러내리는 곳에는 귀한 백송도 심어 놓았군요. 

 

 

 

화장실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기다리며 공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합니다.

 

공원을 돌아보다 만난 이 꽃은 처음 보는 원예종. 확인해 보니 일명 '거북머리'라고 부르기도 하는 켈로네라는 꽃입니다.

 

 

 

솔밭근린공원에서 나오면 둘레길은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4.19국립묘지 뒤로 이어지는 이 길에는 '순례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4.19국립묘지 외에도 독립유공자와 17위의 광복군 합동 묘소 등 16기의 묘역이 있다고 하는군요.  

 

아래는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순례길 안내도입니다. 지도에서 전망대는 4.19국립묘지 뒤쪽 언덕에 있는 전망대이니 '4.19국립묘지 전망대'라고 하는 게 바를 것 같습니다. 4.19국립묘지 표시도 안 되어 있으니, 제작한 사람의 '마인드'가 참 마음에 안 듭니다.

  

순례길 코스 지도

 

 

솔밭근린공원을 나와서 오른쪽 길로 꺾어드는 지점입니다. 이 길은 아마도 보광사 가는 큰길인 듯합니다.

 

 

  

이백 미터쯤 가다보면 이렇게 또 산길로 접어듭니다. 보광사 가는 큰 길 왼쪽 능선의 숲으로 개척한 길입니다.

 

 

 

아래 안내도를 보면 솔밭근린공원은 소나무숲길과 순례길을 잇는 지점이 되고 있네요.

 

 

 

순례길 입구입니다.

 

 

 

 

그리고 4.19국립묘지 전망대에 이르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올해는 4.19혁명 50주년이 되는 해이지요. 50년이 지난 지금이야 이곳이 그리 외진 곳이 아니겠지만, 대학시절 이곳에 처음 찾아왔을 때에는 1960년 4월의 그 위대한 정신을 이 외진 곳으로 유배 보낸 듯해서 참 쓸쓸해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4.19혁명을 1년만에 쿠데타로 짓밟아버린 세력들이 묘지의 기공식과 준공식을 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이곳에 묘지를 조성한 후 군사정권은 4.19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하였지요. 

 

지금도 '민주주의'와 '통일'이라는 4.19정신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빨갱이'니 '좌빨'이니 하는 소리는 물론 "북한에 가서 살아라.'는 폭언을 듣게 되는 현실입니다. 군사독재 정권에는 양처럼 순응하던 인간들과 그들에 세뇌된 자들...

 

 

높이 솟은 기념탑 뒤로 모두 224분이 혼이 묻힌 묘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4월19일, 경찰의 발포로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하고 6천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은 노동자 61명, 고등학생 36 명, 무직 33명, 대학생 22명, 중학생과 국민학생 19명, 화이트칼라 19명이었으니 대학생보다도 노동자와 무직자, 초중고 학생들의 희생이 컸음은 주목할 만합니다.

 

서을 수송국민학교 4학년 5반  강명희라는 어린이가 쓴 '오빠와 언니는 왜 총에 맞았나요'라는 시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지요.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 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 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 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 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 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 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19일

그리고 25일과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 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4.19하면 늘 가슴 속에 먹먹하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진영숙! 한성여중 2학년  열다섯 살의 꽃다운 여학생은 어머니에게 유서를 남기고 거리 시위에 나서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저 많은 무덤 어디에 그녀는 누워 있을까. 자꾸 눈길이 머뭅니다. 채 피지 못한 꽃봉오리 같은 학생들이 수십 명이나 누워 있을 저 무덤들을 보면서, 지금 저들의 죽음을 욕되게 하고 있는 자들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진영숙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동대문시장에서 피복상을 하던 어머니와 살고 있었지요. 4월 19일 밤 8시경 버스를 타고 시위를 하다 파출소에서 쏘아댄 총탄을 맞고 쓰러집니다.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선 지 네 시간만입니다.

 

그녀의 유서를 다시 적어 봅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묘지를 내려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군가 아는 척을 합니다. 뜻밖에 동생이네요. 강남 쪽에 근무하는 동생이 동료들과 함께 이 길을 찾았다가 우연히 이곳에서 마주친 것입니다. 아마도 둘레길이 많이 알려지긴 했나 봅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계속 걷습니다. 순례길이라더니 김창숙 선생 같은 저명한 민족운동가와 낯선 분들의 묘지의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와 안내판이 연이어 나타납니다.

 

 

 

 

계곡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로 접어들며 순례길도 거의 끝나가는가 봅니다.

 

 

 

이렇게 나무다리를 건너면 또 하나의 나무다리가 나타나고...

 

 

 

다리 아래 계곡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둘레길 걷기를 마감합니다.

 

 

가을빛을 머금은 물빛이 단단합니다. '소나기'에서 황순원 선생은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갔다.' 라고 표현했던가요.

 

문득 나도 저 개울물가의 바위를 징검다리 삼고 쪼그려 앉아 '소년'처럼 저 물을 움켜 쥐고 싶어지네요. 훔쳐보고 있는 '소녀'가 없어면 어때요. 가을이 깊어졌는데...

 

 

 

사내들은 그냥 계곡으로 들어서지 않고 여기저기 앉아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데, 처자들은 모두 개울 속 바위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잠시도 가만 있질 못하는 찍사는 호장근으로 보이는 녀석을 만나 낑낑댑니다. 호장근 잎이 왜 이리 작은가, 어째 나도하수오 비슷한 느낌이다 싶은데,

 

    

 

그 옆에 마침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녀석이 보입니다. 나도하수오가 아니라 호장근이라고 외치듯이...

  

  

 

그리고 계곡을 내려오는 길에 이 골짜기에 호장근이 대량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늘에는 아직도 꽃이 피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느릿느릿 걸어 두어 시간쯤 걸어본 둘레길, 그리 나쁘진 않았지만 단조롭다는 느낌은 지울 길 없습니다. 건강이 허락된다면 둘레길보다야 정상이나 능선길이 훨씬 낫겠지요. 다만 둘레길 다른 코스에서 색다른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면 만족도가 커질 수는 있을 것 같군요.

 

그래도 가벼운 산책길로서는 그리 흠잡을 것 없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 북한산 둘레길 13구간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