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전주 여행 (6) 전주객사, 가장 큰 현판에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객사

모산재 2010. 12. 5. 00:12

 

전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식사를 하러 나선다.

 

전주를 찾을 때에는 당연하다는 듯 아침식사는 콩나물국밥이다. 고부간에 운영하는 남부시장의 '현대옥'을 갈까 하다가 오늘은 소문으로만 듣던 '왱이집'을 가보기로 한다.

 

 

콩나물국밥 전문집 '왱이집'은 경기전 뒤쪽으로 한블록 떨어진 골목, 전주객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9시를 훌쩍 넘어 10시간 다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고소한 보리 튀밥을 한줌 집어 맛보며 10분을 기다린 끝에 겨우 자리가 나 식사를 한다. 

 

 

 

 

 

왱이집의 콩나물국밥은 현대옥과 거의 비슷하다. 먼저 수란에 국물을 몇 숟가락 넣어서 먼저 먹고, 다음에 펄펄 끓이지 않은 간장맛 나는 편안한 국물에 육질이 느껴지는 콩나물과 밥을 말아 놓은 콩나물국밥을 먹는다.

 

다만 너무 대형 식당이다보니 끓는 국물을 조금씩 조금씩 부어서 적당한 맛을 맞춰주는 현대옥의 정성을 느끼기가 어렵다. 또한 현대옥에서는 시장에서 김을 사들고 와서 국밥에 부숴 넣고 먹는데, 이곳에서는 수란에만 김을 넣기를 권하고 있다.

 

 

 

 

 

맑고 편안한 맛이 괜찮긴 하지만, 5,000원이라는 가격에 비해서는 내용이 허하다는 생각이다. 반찬이랄 것도 별로 없지 않은가.  

 

 

 

식사를 마치고 다음 일정을 위해 거리를 나선다. 

 

여행을 출발할 때는 첫날은 전주를 돌아보고 오늘은 고창 선운사와 선운산 일대를 걸을까 했는데, 어제 견훤궁터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전주 향교도 들어가지 못해 전주를 제대로 둘러 보지 못하고 말았다.

 

선운사는 포기하기로 하고 오늘도 전주 답사 여행을 계속하기로 한다. 시간이 널널하니 전주 객사와 전주 향교를 돌아보고 발길이 닿는 대로 이곳저곳 구경하기로 한다.

 

 

 

 

■ 전주 객사, 풍패지관(豊沛之館)

 

왱이집에서 나와 북쪽 큰길(충경로)로 걸으니 전주객사가 금방 나타난다. 현대식 건물이 늘어선 대로변에 넓은마당을 둔 전통건축물이 갑자기 출현하니 생소하면서도 기분이 좋다.

 

객사 마루에 걸터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소녀와 아가씨들의 모습이 눈길을 끈다. 휑한 길거리도 아니고 답답한 실내도 아닌 곳에서 저리 널널한 마음으로 기다림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아니겠는가. 저런 기다림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전주 사람들이 부럽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지만 고려 후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객사는 단순히 숙소 역할을 한 것만 아니었다. 외국 사신이 오면 연회장 역할을 하고 조정에서 오는 사신은 이곳에서 임금의 교지를 전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궐(闕)'자가 새겨진 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렸다. 지방 고관이 부임하면 먼저 이 곳에 들러 배례를 올렸다. 그래서 객사는 관찰사가 일을 보는 동헌보다 격이 높았다.

 

전주 객사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커다란 현판을 단 주관을 중심으로 동서 익헌(翼軒)을 거느리고 길게 늘어서 있어 보기에도 시원스럽다. 아마도 오늘날 남아 있는 지방관청 건물 중 단일 건물로 가장 큰 규모일 것이다. 보물 제583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 동쪽 마당 모퉁이에서 바라본 전주객사. 주관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익헌(날개채)이 이어져 있다. 익헌은 방과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의 전주객사는 전주사고를 지은 뒤 남은 재료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고쳐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주관 양쪽에는 서익헌, 동익헌이 날개처럼 달려 있어 객사는 동서로 회랑처럼 길게 늘어선 형상이다. 동익헌은 서익헌에 비해 규모가 작은데, 내부 공간도 동익헌의 마루는 좁고 서익헌의 마루는 훨씬 널찍하다. 서쪽 뜰에는 수직사 건물이 지키고 서 있다.

 

일제의 조선시대 관청 훼손 정책은 극심하였다. 원래 전주객사에는 내삼문·중삼문·외삼문을 비롯 맹청, 무신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모두 사라지고 내삼문 안쪽만 남았다. 게다가 도로를 개설한다면서 동익헌조차 잘라내버렸다.(1999년 동익헌은 복원되었다.)

 

주관 앞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는데 이것은 전주객사를 일컫는 말로서,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라는 뜻을 담고 있다. '풍패'는 한고조 유방의 고향인데. 이성계의 고향인 전주를 거기에 빗댄 표현이다. 그래서 전주를 '풍패지향'이라 하고 객사를 '풍패지관'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풍남문도 '풍패'의 남문을 가리키는 이름이요, 사라진 '패서문'도 '풍패'의 서문을 일컫는 이름이었다.

 

 

▼ 전주객사 주관. 국내 최대의 현판이 달려 있다. 내부 공간은 방과 앞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는 힘찬 필체의 초서 현판은 크기가  무려 가로4.7m, 세로1.8m,에 이른다. 성인 남자 키높이로 쓴 이 글씨를 쓰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붓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국내 현판 글씨 가운데 가장 크기가 큰 글씨가 아닐까 싶다. 글씨가 크기로 유명한 것은 평양 금수산의 '을밀대(乙密臺)' 현판인데 전주객사의 현판 글씨보다는 작을 것이라고 한다.

 

 

 

 

 

이 멋드러지고 커다란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인가. 주지번(朱之蕃)이라는 중국 사신이다. 주지번이 누구이고, 어째서 그가 이 현판을 쓰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뒷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로 조선에 온다.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을 정도로 주지번은 비중 있는 고위급 인사였다. 그러한 주지번이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불원천리하고 한양을 떠나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다. 전주에서 서북쪽으로 50리 떨어진 익산군 왕궁면 장암마을에는 주지번의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이 살고 있었다. 주지번은 그 은인을 만나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오던 길에 전주객사에 잠시 들렀다가 기념으로 편액을 써준 것이다.

그로부터 13년 전인 1593년, 표옹은 임진왜란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가던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館)으로 북경에 갔다. 그때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장자>라고도 하는 <남화진경(南華眞經)>을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찮은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진경>을 외는 것이 하도 신통해서 표옹이 사정을 물어보니 청년이 대답한다.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여비가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표옹은 젊은이에게 과거시험 답안지 작성법을 가르쳐주고, 자신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서적의 필사본과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주었다. 2년 뒤인 1595년, 젊은이는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바로 명나라 대문장가 주지번이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이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다.

 

표옹 송영구(瓢翁 宋英耉, 1556-1620)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기도 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청렴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은 재상을 지낸 중국의 문인으로 이르는 곳마다 그의 시문이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이름을 날렸으며, 성균관 명륜당의 현판과 강릉 경포대의 '제일강산' 현판 일부 등에 글씨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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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지번과 표옹 송영구

 

한편 주지번이 전주 북쪽 50리 거리에 위치한 장암 마을에 있던 표옹을 찾아왔을 때, 표옹의 나이는 51세였다. 표옹은 46세 때 청풍군수를 지냈고, 52세 때에는 경상도 성주의 목사를 지냈다. 따라서 주지번이 방문한 시기는 청풍군수를 지낸 다음 성주목사로 나가기 바로 전해다. 북경의 영빈관에서 만났던 때부터 계산하면 13년 만의 만남이었다. 당시 주지번의 나이를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지번이 허균과 개인적으로 친해졌다는 이야기를 감안해볼 때 허균의 당시 나이(38세)와 비슷한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쯤이었지 않나 싶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 "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 왈 "그러면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해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 주지번과 허균

 

‘조선왕조실록’ 시디롬에서 주지번 항목을 검색하여 보면, 그는 을미년(乙未, 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주지번의 벼슬은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라고 소개되는데, 한림원은 당대에 학문의 경지가 깊은 인물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그는 또 ‘한서기평(漢書奇評)’의 서문을 쓴 인물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주지번은 보통 관료가 아니라 중국 내에서 알아주는 일급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것이다.

그런 주지번이 부사 양유년과 함께 사신으로 조선을 방문하였을 때가 선조 39년인 1606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정사 주지번의 카운터파트로 대제학인 유근(柳根, 1549∼1627)을 내세웠다. 유근은 선조 20년 일본의 승려 겐소(玄蘇)가 들어왔을 때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하여 겐소 일행을 탄복케 한 당대의 문사이자, 풍모가 준수하고 언행에 절도가 있던 인물이었다. 유근이 바로 표옹의 고모부였다는 사실도 재미있는 점이다. 또 유근의 종사관으로는 허균(許均, 1569∼1618)이 발탁되었다. 조선에서도 일급 문사들을 내세워 주지번을 상대케 한 것이다.

이렇게 중국측의 주지번-양유년 조를 상대할 수 있는 조선의 복식조로 50대 후반의 유근과 30대 후반의 허균이 선발되었다. 공식적으로는 양국 외교관의 만남이지만, 비공식적 차원에서는 한·중 문장가들이 재주를 겨루는 국가 대항 문장겨루기적 성격도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해서 당대 중국과 조선에서 난다긴다하는 문장가인 주지번과 허균은 서로 만나게 되었고, 허균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시가 북경의 선비들에게 소개된 것도 주지번과 허균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주지번이 허난설헌의 시에 매료되어 중국에 가지고 가서 알린 것이다.

 

 

※ 표옹 송영구의 강직하고 청렴한 인품

 

그렇다면 주지번이 소점해준 표옹은 평소에 어떻게 살았을까. 생전에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를 보자. 표옹은 52세 때 성주목사를 지냈고, 56세때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관찰사 임기 동안에 아주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관찰사를 그만두고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어느 나루터에 닿았을 때의 일이다. 이때가 여름 무렵이었는데 경상감사를 배웅하기 위해 나루터까지 동행한 이방이 “어르신네가 경상도에 계셨다가 가지고 가시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부채 하나밖에는 없군요”하고 한마디 하니까, 표옹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낙동강에 던져버렸다. 부채마저 강물에 던졌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낙동강에 붙인 이름이 ‘투선강(投扇江)’이다. 그리고 그 부채를 던진 나루터를 ‘투선진(投扇津)’이라고 하였다고 송씨 문중에 전해진다.

투선강과 투선진. 이는 이후 진천 송씨들의 정신이 되었다. 강직과 청렴의 상징으로서 표옹의 후손들이 조상에 대하여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 조용헌 '표옹 송영구 고택 - 풍류의 멋 감도는 非山非野의 명당'에서 가려 뽑음 

 

 

▼ 서편 수직사 뒷마당에서 본 전주객사. 서익헌의 마루(양실)가 동익헌의 마루에 비해 훨씬 넓다.

 

 

 

 

객사의 대청을 양청(凉廳), 방을 오실(澳室)이라 하였는데, 전주 객사는 이 두 구조가 공존하고 있어 '오량(澳凉) 구조'라 부른다. 이 구조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에 따라 다른데 남부지방에서는 대부분 임진왜란 뒤에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 객사 서쪽에서 바라본 마루 모습

 

 

 

 

▼ 주관과 서쪽날개채(서익헌)가 이어진 부분

 

 

 

 

객사 주관의 가운데에는 사분합문 위로 태극문양과 홍살이 있는데, 바로 이곳이 대궐을 상징하여 '궐(闕)'이라고 쓴 위패를 모신 감실이지 싶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대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는 곳이다.

 

 

 

 

 

 

주관의 툇간(집채의 원칸살 밖에 붙여 다른 기둥을 세워 만든 칸살)에는 툇마루를 깔았으며, 칸마다 띠살문을 달았다. 천장은 연등 천장이며, 주관의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동익헌과 서익헌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 뒤뜰에서 바라본 객사. 주관은 뒤쪽으로 문이 없지만, 동익헌과 서익헌의 오실은 문이 나 있다.

 

 

 

 

객사 앞마당 서쪽 뜰에는 수직사(守直舍) 건물이 지키고 서 있다. 객사의 경비와 관리 업무를 맡은 관원들이 거처했던 건물이다.

 

 

 

 

 

 

일제가 관청을 민간에 불하하고 훼손하는 정책을 대대적으로 시행하였음에도 오늘날까지 전하는 객사는 많다. 전주객사 외에 안변 가학루(1486년), 고령 가야관(1493년), 거제객사(1489년), 무장객사(1581년), 밀양객사(1652년), 부여객사(1704년), 안동 선성현객사(1712년), 낙안객사(1722년), 완도객사(1722년) 등이 있고, 객사문(국보51호)만 남아 있는 강릉객사가 있다. 이 중 시설과 규모면에서 가장 유명한 객사는 중국 사신이 주로 머물렀던 개성의 태평관(太平館)이었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본향을 상징하는 풍패지관, 1471년 중건된 전주 객사는 가장 오래된 객사이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우리 나라 지방관청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며, 또한 달고 있는 현판 또한 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건물이라 생각한다.

 

 

 

전주객사 동쪽 담장 바깥 골목은 '객사길'이다. 고풍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이라 토산품 등 풍물시장이라도 들어서 있다면 제격인데, 오히려 화려한 간판 아래로 젊은이들이 물결처럼 몰려다니는 젊음과 유행의 거리가 된듯하다.

 

 

 

 

 

 

객사 마루에서 친구와 연인을 기가리던 젊은이들은 손을 잡고 이곳 객사길로 들어서니, 조선에서 만나 현대를 함께 즐긴다고나 할까...

 

 

객사를 돌아보고 발길은 다시 한옥마을로 향한다. 경기전 뒤쪽 골목을 통해 전주향교까지 산책을 즐길 마음으로...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