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덕궁 (7) 헌종의 서재 낙선재, 석복헌과 수강재

모산재 2010. 10. 31. 22:36

 

창덕궁 정전과 편전, 그리고 '금원'이라고도 불리는 후원을 다 돌아보고 난 다음에야 마지막으로 낙선재로 향합니다. 낙선재는 성정각과 희우루 동쪽 넓은 마당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일대는 본래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에 있었지만 지금은 창덕궁 영역으로 되어 창경궁과 담장을 맞대고 있습니다.

 

 

이미 해는 기울어져 붉은 빛을 띤 햇살이 주인 잃은 고궁을 적막하게 비추고 있습니다. 

 

 

 

 

 

 

 

 

낙선재는 24대 헌종이 자신의 서재 겸 사랑채로 지은 건물입니다. 창덕궁의 동남쪽에 자리잡은 이 전각들을 뭉뚱그려 낙선재(樂善齋)라고 부르지만, 낙선재 동쪽으로는 헌종이 특별히 사랑한 경빈 김씨의 처소인 석복헌(錫福軒), 할머니의 처소인 수강재(壽康齋)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들 전각들은 사대부가 풍으로 단청 없이 지은 백골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 낙선재와 주변 전각 배치도

 

 

 

 

 

낙선재로 들어가는 정문은 장락문(長樂門)입니다.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합니다. 창덕궁 후원의 연경당 정문과 같은 이름이어서 인상적입니다.

 

장락(長樂)’이란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는 의미로 <한비자(韓非子)>에 "존엄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충신을 제어하면 길이 즐거움이 생기고 공명을 이루게 된다."라고 하였고, <논어>에 "오직 어진 사람만이 길이 즐거움에 처한다.” 라고 한 말과 관련된 이름입니다. 임금이 어진 정치를 베풀어 길이 즐거움을 누리라는 염원을 담은 말이라 하겠습니다.

 

 

장락문을 들어서니 낙선재 누마루와 언덕 위 후원의 상량정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낙선재는 24대 임금 헌종이 1847년에 지은 것으로 헌종이 서재 겸 사랑채로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헌종은 유난히 아꼈던 후궁 경빈 김씨를 맞이하면서 자신의 사생활 공간으로 사용하려고 낙선재를 짓고 이듬해에는 경빈 김씨의 처소로 석복헌을 지었습니다.

 

 

 

 

 

낙선재는 나중 갑신정변 직후 고종이 집무소로 사용합니다. 대신들을 만나 갑신정변 뒤처리를 하고,일본과 청나라 등 외국 공사들을 접견하기도 했습니다. 순종도 국권을 빼앗기고 난 1912년 6월 이 곳으로 거처를 옮겼고 황후인 순정효황후는 1966년까지, 1963년 일본에서 환국한 영친왕 이은(李垠)과 부인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낙선재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 팔작지붕집으로, 오른쪽 한 칸을 전면으로 돌출시켜 누마루로 삼았습니다. 낙선재라는 이름은 영조 때부터 기록에 등장하나 1756년과 1788년에 화재로 타버려서 <동궐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낙선재’ 현판은 청나라때 문인인 섭지선(葉志詵, 1779~1863년)의 글씨이다.

 

 

 

낙선(樂善)'은 '선을 즐긴다'는 뜻인데, 맹자가 "하늘이 준 벼슬이 있고 사람이 준 벼슬이 있는데 '인의와 충신으로 선을 즐겨 게으르지 않는 것(樂善不倦)'이 천작(天爵)이고 공경대부가 인작(人爵)이다.(孟子曰 有天爵者 有人爵者, 仁義忠信 樂善不倦 此天爵也. 公卿大夫 此人爵也)" 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라 합니다. 임금이 이 곳에서 인의와 충신을 지키며 선을 즐겨 하늘의 작록(爵祿)을 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낙선재 동쪽에는 보소당(寶蘇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보소(寶蘇)'는 '소동파를 보배로 삼는다'는 의미로 본래 청나라 금석학자 옹방강이 소식을 사모하여 보소재(寶蘇齋)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추사 또한 같은 당호를 썼는데, 헌종이 당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낙선재 내부

 

 

 

 

 

 

낙선재 바로 동쫃 공간에 석복헌(錫福軒)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석복(錫福)'은 '복을 내려 준다'는 듯으로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라는 염원을 담은 것입니다. 헌종이 아끼던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마련해 준 처소입니다. 왕비 간택에 왕이 간여할 수 없었닥 하는데 헌종은 정례를 깨고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는데 정비인 명헌왕후보다 경빈 김씨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다가 나중에 후궁으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이곳은 순종비인 순정효황후가 1966년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1993년 복원공사에서 발견된 상량문을 통해 낙선재 건립 이듬해인 1848년에 세워졌음이 밝혀졌습니다.

 

 

 

수강재(壽康齋)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강(壽康)'은 글자 그대로 '건강하게 오래 살다'는 뜻. 수강재(壽康齋)는 원래 조선 태종이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 준 다음 거처하던 수강궁(壽康宮) 자리로 순조 27년(1827)부터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익종)의 별당이었는데, 1848년에 헌종의 할머니 순원왕후의 거처로 중수한 것입니다. 조선 마지막 옹주 덕혜옹주가 1989년 7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동쪽 문을 중춘문(重春門), 서쪽 문을 수강문(壽康門)이라하며 뒤편 언덕 위에는 취운정(翠雲亭)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수강재 동쪽 골목. 뒷뜰로 향하는 문은 폐쇄되어 있습니다.

 

 

 

 

 

 

수강재 동쪽 문을 통해본 수강재 안마당과 석복헌

 

 

 

 

 

낙선재 후원 언덕 위에는 승화루, 상량정, 한정당, 취운정 등의 아름다운 누정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곳입니다.

 

 

 

 

상량정(上凉亭)은 현재 접근이 차단되어 있습니다. '상량(上凉)'이란 '시원한 곳에 오른다'는 뜻으로 정자가 높은 언덕에 시원스럽게 자리잡고 있는 것과 관련된 이름으로 보입니다.

 

 

 

 

한정당 서쪽 돌기둥에 올라 앉은 육각 정자로 본래 이름이 평원루(平遠樓)였는데 순종 이후에 이름을 바꾼 듯합니다. 서쪽 담장에는 원형의 만월문(滿月門)이 있는데, 창덕궁의 아름다운 담장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한정당(閒靜堂)은 취운정 서쪽 담장의 일각문 밖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아주 단아한 건물입입니다. 동궐도에는  빈터로 되어 있는데 1917년 이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정(閒靜)'은 ‘한가하고 고요하다'는 뜻이니 선비들이 추구했던 가치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창덕궁 순례를 모두 마칩니다.

 

제한된 시간에 바쁘게 돌아보다보니 보지 못한 전각도 많고 살펴보지 못한 공간도 많아 아쉬움이 큽니다. 언제 한번쯤 시간을 내어 이번에 살피지 못한 곳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 궁궐의 분위기에도 흠뻑 젖어보리라 생각하며 궁궐을 벗어납니다.

 

 

 

 

 

 

※ 다음 지도로 본 창덕궁 배치도(부분은 낙선재 영역)

 

 

 

 

 

 

 

 

 

 

※ 낙선재 마지막 황실 가족 이야기

 

 

● 순정 효황후

 

순정효황후 윤비는 순종황제의 비다. 서른 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중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옥새를 감춰 두고 내놓지 않은 일이며, 한국전쟁 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 라며 호통쳐서 내쫓은 일,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 승하한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며 낙선재를 지켜낸 그 당당한 기품 등..... 또한 공산치하에서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 버리지 않고 끝내 낙선재를 되찾아 흩어진 왕족들을 기다리던 윤황후였다.

 

그녀는 왕조의 운명과 함께 침잠하는 자신의 운명을 불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한때 그녀는 성북동 흥천사 가까운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그 절을 매일 찾아가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를 했다.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기고도 외로운 싸움 끝에 끝내 창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 영왕

 

영왕 이은(李垠)은 1897년 생으로 고종의 3남이며 순종의 동생이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로서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920년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제로 일본 황족의 딸 이방자 여사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광복이 되었어도 귀국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1963년 12월에야 가능하게 되었으나 이미 말을 못하고 게다가 기억 상실의 상태였다. 그 후 7년간 병원치료도 헛되이 1970년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홍유릉에 안장되었다.

 

 

● 영왕 비 (이방자, 1901-1989)

 

일본 동경 출생. 황족의 장녀로 태어나 1918년 학습원을 졸업하고, 20년 당시 일본에 인질로 가 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결혼하였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조선과 일본의 융합이란 차원에서 계획된 경략결혼이었다.제2차세계대전 후, 1947년에 제정된 신헌법에 의하여 왕족 신분을 상실한 두 사람은 무국적 상태로 있다가 63년 한국적을 취득하여 귀국하였다. 1970년 남편 이은과 사별한 후 한국에 남아 부군의 뜻을 이어 신체장애자를 위한 명휘원(明暉園)과 정신지체아를 위한 자혜학교(慈惠學敎)를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하였다.

 

 

● 이구 (李玖,1931- 2005)

 

영왕과 이방자 여사의 2남으로 태어난 이구씨는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때 단독으로 도미(渡美)하여 MIT공대를 졸업하였다. 직장 동료였던 줄리에트 여사와 결혼하였으나 한국에 돌아온 후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 속에 파탄을 맞게 되었다. 이방자 여사가 사후 한국을 떠났으나 1996년 영구 귀국하여 부암동에 거처를 정하기도 하였다. 2005년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 덕혜옹주(1912-1989)

 

덕혜옹주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녀이다. 고종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외동딸로서 왕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지냈다. 그러나 1925년 12세에 동경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저 사망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던 20세에 대마도주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결혼 생활 3년만에 그 동안의 시련으로 심한 우울증에 실어증까지 겹쳤다.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여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하기까지 끝내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