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덕궁 (6) 옥류천 일원, 취규정, 소요정, 태극정, 청의정

모산재 2010. 10. 31. 17:08

 

존덕정에서 옥류천 가는 길은 그야말로 한적한 숲속 오솔길입니다. 생명감 넘치는 숲의 기운을 받으며 걸으니 상쾌함이 넘쳐납니다. 함께 걷는 이들도 모두들 좋아라며 감탄사를 연발합니다.

 

완만하긴 해도 비탈길이라 가벼운 운동도 됩니다. 산책길로는 가장 이상적인 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길 중간에서 돌아서 내려다보니 존덕정이 늦은 오후의 햇살에 희미하게 빛납니다.

 

 

 

 

 

 

오르막길을 올라서자 후원을 순환하는 큰길이 나타납니다. 산등성이로 난 큰길로 들어서 왼쪽으로 걸어가다보면 취규정(聚奎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납니다. 이 호젓한 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인 쉼터입니다.

 

 

 

 

 

 

취규정(聚奎亭)이라... 무리 '취(聚)'에 별 '규(奎)'자로 된 이름이니, 저녁에 산책을 하다 이 높은 언덕 위의 정자는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사색과 낭만을 즐겼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규(>奎)'는 단순히 '별'의 의미를 넘어 '문장'의 뜻도 가지고 있는 글자이니, 취규정(聚奎亭)은 빼어난 문인들이 모이는 정자라는 뜻이 됩니다. 어쨌거나 이 정자는 독서를 하며 휴식도 즐기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후원에서는 가장 오래된 정자의 하나로 인조 임금 때(1640)에 세운 정자라고 합니다. 옥류천 주변의 정자들보다는 4년 늦게 지어졌습니다.

 

 

 

취규정을 지나자마자 다시 오른쪽 오솔길로 접어들며 골짜기로 내려갑니다.

 

 

 

 

 

 

이 깊은 숲길을 걷는데 골짜기 너머 쪽으로부터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옵니다. 알고보니 그쪽은 성균관대 캠퍼스 운동장이 있는 곳입니다. 예전 허술하던 시절에는 성대생들이 담장을 너머 이곳 후원으로 숨어들기도 했다고 함께 걷던 일행 중 한 분이 알려 주는군요.

 

 

옥류천으로 내려서는 길입니다.

 

 

 

 

 

 

창덕궁 후원 북쪽의 깊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옥류천 일대의 정원은 인조 임금 때(1636) 조성하였습니다. 이해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났으니, 바로 직전이네요.

 

이곳은 소요정(逍遙亭), 태극정(太極亭), 청의정(淸漪亭) 등의 정자와 함께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여 많은 임금들에게서 특히 사랑받았던 곳이라고 합니다.

 

 

 

<옥류천 일대 정자 안내도>

 

 

 

 

 

 

골짜기로 내려서자 옥류천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고 입구에서 취한정(翠寒亭)이라는 정자가 맞이합니다. 그리고 옥류천을 통해 소요정과 태극정이 보입니다.

 

 

소요정(逍遙亭)은 옥류천 물가에 지어 소요암과 폭포를 바라 볼 수 있도록 지어 놓은 정자입니다.

 

 

 

 

 

 

소요정 옆으로는 옥류천에서 내린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병자호란이 있던 해(1636)에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탄서정(歎逝亭)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단칸 홑처마 사모지붕의 소박한 정자이지만 역대 임금들이 가장 즐겨 찾던 정자였습니다. 임금이 신하들과 어울려 주연을 베풀어 유상곡수를 즐기며 소요정의 정취에 흠뻑 빠졌습니다. 숙종, 정조, 순조 임금 등 많은 임금들이 소요정과 관련된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소요정 앞에는 소요암(逍遙巖)이라는 바위가 있고 거기에서 작은 폭포수가 흘러내립니다.

 

 

 

 

 

 

북악산 동쪽 줄기에서 흘러내린 물과 인조가 팠다고 알려진 어정(御井)으로부터 넘쳐나온 물이 계류가 되어 폭포수를 이룹니다.

 

 

 

 

 

 

소요암에는 인조 임금이 썼다고 하는 '옥류천(玉流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숙종 임금이 썼다고 하는 한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飛流三百尺(비류삼백척)     날아흐르는 물이 삼백 자인데
遙落九天來(요락구천래)     멀리 구천에서 떨어져 내리네.
看是白虹起(간시백홍기)     보고 있노라니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번성만학뢰)     온 골짜기를 뒤집을듯 우레소리 가득하네.

 

 

이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라는 시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이백의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에 비해 1/10로 줄였다 하더라도 사람 키 높이도 안 되는 작은 폭포를 비류삼백척(飛流三百尺)'이라 한 것이나 물소리조차 듣기조차 쉽지 않은 가는 물줄기를 '번성만학뢰(飜成萬壑雷)'라고 표현한 것은 누가 보아도 심한 과장이지만, 그걸 비난할 수 없잖은가. 사실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흥겨움, 그게 풍류니까요...

 

 

 

시가 쓰여진 바위 앞에는 널찍한 암반에 누운 U자형의 홈을 파서 계류를 흐르게 해 놓았습니다. 임금은 이곳에서 신하들과 더불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고 하니, 이곳은 창덕궁의 포석정이라 할까요.

 

바위의 홈을 따라 한 바퀴 돌아흐른 물은 폭포가 되어 떨어져 내립니다.

 

 

 

 

 

 

누구의 설계인지(혹 인조 임금이 직접 설계한 것은 아니겠지요...) 작은 계곡을 멋드러지고 운치있게 만들어낸 솜씨가 대단합니다.

 

물길을 이끌어 들이는 부분에도 세심함이 엿보입니다.

 

 

 

 

 

 

소요암 뒤쪽에는 인조 임금이 만들었다고 하는 어정(御井)으로 보이는 곳이 돌 뚜껑으로 덮여 있습니다. 접근 금지 팻말이 그 앞에 놓여 있네요.

 

 

 

 

 

 

소요암과 반대편에는 태극정(太極亭)이라는 단칸 사모기와지붕의 정자가 있습니다. 인조 임금 때(1636)에 소요정과 함께 세워졌는데, 창건 때는 '운영정(雲影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옥류천 일원에서 가장 위쪽에는 초가지붕을 한 청의정 (淸漪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초가지붕이라 농막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과연 주변에는 서너 평 가량의 작은 논을 두고 벼를 심었는데 벼가 익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정조 임금은 친히 '청의정시'를 지어 아름다운 정취를 노래했다고 합니다. 이 정자도 태극정, 소요정과 함께 세워진 것입니다.

 

 

청의정 위쪽으로는 성벽(내성이라고 하지요)이 보입니다. 이곳이 궁궐의 가장 뒤쪽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합니다.

 

 

 

청의정 위쪽에서 태극정 방향으로 본 풍경입니다. 태극정 뒤로 농산정이 보이네요.

 

 

 

 

 

 

농산정(籠山亭)은 옥류천 주변의 정자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구성도 특이합니다. 방 2칸, 마루 2칸, 부엌 1칸으로 모두 5칸 건물인데 행랑채와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왕이 신하들과 옥류천에 들러 주연을 베풀 때 다과와 음식 등을 마련하던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정합니다.

 

<동궐도>에도 농산정이 보이는데, 당시에는 꽃나무 등으로 생울타리를 두른 취병(翠屛)이 있어 지금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그럼 옥류천이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지 <동궐도>를 잠시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오른쪽 긴 건물이 농산정인데 취병이 보이지요. 태극당 옆으로 보이는 삼간 초가는 지금은 사라진 모양이고 나머지는 옛 모습 그대로이지요. 소요암 뒷부분이 반듯하게 정돈된 것이 눈길을 끄네요.

 

 

 

 

이렇게 옥류천 일대의 아름다운 정원을 다 돌아본 다음, 후원 서쪽으로 가는 숲길을 걸어 돌아나갑니다.

 

 

길 중간에 창덕궁의 천연기념물  중의 하나인 다래나무(251호) 를 만납니다.

 

 

 

 

 

이 다래나무는 나이가 약 600살쯤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다래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 되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다래 열매를 볼 수 없습니다. 나무가 늙어서가 아니라 원래 다래나무가 암수딴그루인데 창덕궁의 다래나무가 수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출입 금지구역도 아니건만 관리인 한분이 들어가지 말라고 괜히 소리칩니다. 좀 떨어져서 이렇게 한 컷 찍고 돌아섭니다.

 

 

 

 

 

 

돌아나오다 보니 신 선원전(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도와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 지낸 곳인 대보단을 일제가 없애고, 신원전에서 역대 왕들의 어진을 옮겨와 모신 전각)으로 보이는 전각이 담장 곁에 있었지만 출입을 금하는지라 그냥 스쳐 지나옵니다.

 

애련지 쪽에는 흰작살나무가 하얀 열매들을 조랑조랑 달고 있더니, 서쪽 성곽 길을 따라서는 좀작살나무가 영롱한 붉은 열매들을 달고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천이 흐르는 입구에까지 다 왔습니다.

 

 

 

 

 

 

서쪽 금호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천연기념물 향나무(194호)를 만납니다.

 

 

 

 

 

이 향나무는 수령이 750 년 정도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높이 12m 정도이지만 뿌리 부분의 둘레가 5.9m 나 되는 아름드리 향나무인데 가지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 뒤틀리며 자랐습니다.

 

예로부터 향나무는 제례 때 향을 피우는 재료로 이용되었는데, 이 향나무는 동쪽에 있는 선원전에서 제례를 올리는 데 사용하기 위하여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데, 진작에 낙선재 쪽을 돌아보지 못해 그쪽으로 가고자 합니다. 바쁘거나 피곤하신 분들은 먼저 가기로 하고 시간이 되는 분들은 다시 금천교를 건넙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