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덕궁 (4) 정조의 숨결이 서린 부용지와 부용정, 영화당, 주합루, 서향각

모산재 2010. 10. 30. 19:31

 

연경당을 본 다음 불로문을 거쳐 부용지와 그 일원의 전각들로 향합니다. 부용지라는 아름다운 인공 연못을 둘러싸고 주합루(규장각)와 영화당, 부용각, 서향각 등 크고 작은 전각들이 어울린 멋진 공간입니다. 사계절마다 변하는 주변 경치가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곳이라고 하네요.

 

연경당 일원이 정조 임금의 손자로 할아버지 정조를 롤모델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효명세자의 정신이 빛나는 공간이라면, 이곳은 바로 정조 임금의 얼로 가득한 공간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물은 부용지 동쪽 높은 월대 위에 우뚝 선 단층 누각 영화당(暎花堂)입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익공(二翼工)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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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공(翼工) / 초익공, 이익공

 

익공은 기둥 윗몸과 창방의 짜임 부분 또는 기둥머리에 건물 앞뒤 방향으로 날개 모양으로 짜맞춘 공포 형식이다. 임진왜란 후에 급격히 보급된 것인데, 주삼포(柱三包)의 약식인 것처럼 보이는 구조이다.

'이익공'은 기둥 위에 덧붙이는 쇠받침(살미)이 둘로 된 익공. 하나면 초익공이다. 살미는 소혀처럼 생겨 소혀의 사투리인 '쇠서'라고도 부른다. 기둥과 도리 사이에 보의 방향으로 꾸미는 공포의 한 부재이다.

 

 

→ 위 그림은 <http://100.naver.com/temple/org/01_gongpo/>에서 스크랩함

 

 

 

 

영화당은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베풀거나 활을 쏘기도 한 정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정조 임금 때부터 과거 시험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왕이 친히 참석한 가운데 초시에 합격한 응시자들이 시관이 내린 시제에 따라  마지막 시험을 본 곳이랍니다.

 

원래는 건물 앞에 '춘당대(春塘臺)'라는 마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너른 마당에 과시를 보느라 엎드린 팔도 선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그러나 지금은 '춘당지(春塘池)'라는 커다란  연못으로 바뀌어 버렸고 그나마 담장으로 막혀 창경궁 쪽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춘향가'에서 이도령이 장원급제할 때의 시제가 바로 춘당대와 관련된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 아니었던가요?

 

영화당은 광해군 때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건물은 숙종때(1692)에 재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애련지와 애련정과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이지요. '영화(暎花)'는 '햇살처럼 환한 꽃'이 핀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낸 것이니 부용지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나타낸 당호로 보입니다.

 

현판 글씨는 영조 임금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영화당 왼쪽을 돌아들면 커다란 인공 연못 '부용지'가 나타나고 북쪽 언덕에는 규장각으로 흔히 알려진 '주합루'라는 이층 건물이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그리고 그 서쪽으로는 서향각이라는 단층 전각이 보입니다.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 처음에는 연지(蓮池)라고 불리다가 부용지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부용(芙蓉)'은 요즘에는 무궁화를 닮은 아욱과의 커다란 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연꽃'의 딴이름이었습니다.

 

 

 

 

 

부용지는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연못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반영하여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의 형태로 조성되었습니다. 장대석으로 쌓아올린 연못은 동서 길이가 약 35m 남북 길이가 약 30 m인데, 연못 중앙에 소나무를 심은 작은 섬이 하나 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임금은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고 축하해 주기도 했는데, 1795년 수원 화성을 다녀온 정조 임금이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곳의 전각은 부용지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동쪽에는 영화당, 남쪽에는 부용각, 북쪽에는 주합루와 서향각, 그리고 서쪽에는 사정기비각이라는 작은 전각이 있습니다.

 

 

 

 

 

연못은 남쪽 모서리에는 잉어 한 마리가 물 위로 튀어오르는 모습을 새겼는데, 이것은 왕과 신하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빗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표현한 문이 주합루로 오르는 어수문(魚水門)이지요.

 

오른쪽 전각이 영화당, 어수문이라는 일주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 마주 보이는 이층 건물이 주합루입니다. 주합루 서쪽에 있는 건물이 서향각입니다.

 

 

저~ 멀리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손을 흔들며 아우성인 여인들

 

 

 

 

주합루(宙合樓)는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지었습니다 아래층은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 서고로 위층은 열람실로 기능했습니다. 그런데 규장각은 왕실도서관에서 점차로 정책연구 기관으로 기능하면서 정조의 개혁 정치와 문예 부흥의 산실 역할을 하게 됩니다.

 

 

 

 

주합루의 정문 어수문(魚水門)은 이름이 특이한데, 바로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한자 성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임금은 물에, 신하들은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융화적 관계를 함축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3갈래로 되어 있는데 임금은 가운데로 올라 어수문으로, 신하들은 그 옆의 작은 문으로는 출입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어수문 출입이 금지 되어 있어 아쉽게도 주합루와 서향각 등은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없습니다.

 

 

 

 

 

어수문은 일주문 형태의 작은 문이지만 팔작지붕에 용조각을 치장하는 등 화려한 단청 장식이 돋보입니다. 어수문은 왕과 신하가 만나는 상징적인 문이자 인재들의 등용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삼국지>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후 나날이 가까워지자 도원결의를 맺었던 관우와 장비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에 유비는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로부터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하는 고사성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정조 임금도 제갈량을 만난 유비처럼 빼어난 신하들을 만나 천하를 도모하며 의기투합하고 싶었던 뜻을 '어수문(魚水門)’이라는 이름을 통해 표현했던 것입니다.

 

 

 

 

 

주합루(宙合樓) 아래층에는 조선 왕실의 족보·서책을 보관하고 경전과 역사를 토론하던 공간으로 규장각이라 하였고, 2층은 열람실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주합루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규장각이 인정전 서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지금은 이 건물 전체를 주합루라고 부릅니다. 1776년 정조 임금이 즉위한 해에 건립되었는데 이 곳에는 정조의 어제, 어필,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 인장 등을 보관하였습니다.

 

  

 

이곳은 채제공, 정약용을 비롯하여 이가환, 박제가, 유득공,이덕무 등 빼어난 학자들의 발자취가 서린 곳입니다. 젊은 학자들이 밤낮으로 학문의 증진에 힘쓰고,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정사를 논하고 연회를 즐겼던 학문과 예술의 전당이었습니다. 

 

 

 

 

 

정조의 친필 현판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 이익공의 팔작지붕 양식인데, 건물 기둥은 둥근 것과 모난 것을 조화롭게 배열하여 하늘과 땅의 이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합루가 자리 잡은 곳은 산비탈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연과의 조화가 빼어납니다. 주합루에올라 부용지와 부용각을 바라보는 전망은 얼마나 기가 막힐까... 싶지만 출입이 허용되지 않고 있으니 상상만 해 봅니다.

 

 

주합루 서쪽에 있는 서향각(書香閣)은 규장각의 부속건물입니다. 이곳은 주합루나 봉모당에 봉안된 임금의 초상화(御眞)와 글(御製)과 글씨(御筆)를 옮겨와 바람과 볕에 말리던 곳이라고 합니다. 서책을 말리며 책의 향기를 맡으니 그래서 전각의 이름이 '서향(書香)'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4개월에 한 번씩 말리고 봉모당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서향각 안에는 정조임금이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글이 걸려 있는데, 이는 정조가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정하고 그 내력을 서문 형식으로 지은 것으로 궁중 곳곳에 걸어 달(임금)이 모든 시냇물(신하)에 비추는 이치를 실제 구현해 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현재 존덕정(尊德亭)과 서향각 안에 같은 글이 하나씩 전하여 걸려 있다고 합니다.

  

서향각은 또한 왕비가 양잠을 직접 시연하는 친잠례를 행했던 장소이기도 했답니다. 서향각의 안쪽에 순정효황후가 쓴 것으로 전하는 '친잠권민(親蠶勸民)'이란 현판이 있는데 '친히 누에를 쳐서 백성들을 권장한다' 는 뜻이니, 이는 1777년에 양잠소를 설치하여 왕비가 아녀자들의 모범이 되고자 누에를 쳤기 때문에 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상시적으로 누에를 친 것은 아니하고 합니다.

 

1911년에 총독부가 서향각을 누에 치는 양잠소로 만들어서 그 기능이 변질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눈 여겨 볼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수문 옆으로 굵은 대나무 줄기를 엮어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 살아 있는 대나무를 심어 이중의 울타리를 만든 모습 말입니다.

 

 

 

 

 

 

이 울타리가 바로 '취병(翠屛)'이라고 하는 한국 고유의 울타리입니다. '푸른 병풍'을 뜻하는 취병은 살아있는 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울타리로, 대나무를 엮어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작은 나무나 넝쿨식물을 올리는 그야말로 정감 넘치는 '친환경 울타리'입니다.

 

이 아름답고 격조 높은 울타리가 조선시대 선비들의 정원은 물론 창덕궁 후원에 조성되었던 것입니다. 율곡 이이의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중에도 '취병'이란 말이 나타나고 있지요. 제4연의 초장 '삼곡(三曲)은 어디메오 취병(翠屛)에 닙 퍼졌다.' 라는 구절...

 

 

순조 때(1820년대)에 그려진 <동궐도>에도 취병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연과 건축의 절묘한 어울림을 추구한 전통 정원의 백미인 취병은 사라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랬던 것을 최근 문화재청이 복원하였으니 다행스런 일입니다.

 

 

부용지의 남쪽과 서쪽 방향에는 부용정이라는 작은 정자와 '사정기비(四井記碑)'라는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이 있습니다. 

 

 

 

 

 

위에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비각입니다. 사정기비(四井記碑)는 세조 때 팠다는 네 개의 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라고 합니다. 원래 우물을 찾은 자리에 술성각(述盛閣)을 세웠는데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우물 두 개는 사라져 버렸고, 1690년에 이 두 우물을 정비하며 숙종이 비문을 지어 비석을 세운 것이랍니다.

 

현재는 나머지 두 개의 우물마저 사라지고 없네요.

 

 

사정기비(四井記碑)-문화재청 자료

 

 

 

 

부용정 서쪽, 이 비각이 있는 서쪽 지역도 출입금지구역으로 묶여 있습니다.

 

 

부용지의 남쪽에는 부용정(芙蓉亭)이란 열 십(十)자 모양의 아름다운 정자가 부용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연못 안에 팔각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목재를 얹어서 정면 5칸 측면 4칸 배면 3칸의 누각을 올린 모습이 그림 같습니다.

 

 

 

 

 

연못을 향한 쪽마루에는 닭다리 모양의 계자난간을 둘렀고, 반대편에는 평난간을 둘렀습니다. 정자 안은 네 개의 방을 배치했는데, 뒷쪽의 방이 다른 방들보다 한 단계 높습니다. 창은 연못 쪽으로는 卍자 모양의 완자살창을, 나머지에는띠살창을 달았습니다. 창을 들쇠에 매달면 사방으로 트이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 정자는 원래 숙종 때(1707) '택수재(澤水齋)'를 지었다가 정조 16년(1792)에 부용지를 고치면서 지어 '부용정(芙蓉亭)'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1795년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에 다녀온 뒤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이곳 부용정에서 규장각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부용정 뒤 언덕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긴 받침대 위에 독특한 결을 가진 자연석을 올려 놓은 장식돌이 있습니다. 자연석에 이끼가 파랗게 끼었으니 그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석물을 석함(石函)이라고 부르며, 괴석(怪石)을 받치고 있다 하여 괴석대(怪石臺)라고도 합니다. 창덕궁 곳곳에는 이런 석물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용지 주변에는 이 외에도 몇 개의 전각이 더 있습니다.

 

 

서향각 뒤편에는 성정각에도 있는 같은 이름의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1645(인조 23)년에 건립할 당시는 취향정(醉香亭)이라고 하는 초당이었으나 1690(숙종 16)년 여름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어 대신을 보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바로 비가 내려서 숙종이 이를 기뻐한 나머지 지붕을 기와로 바꾸고 이름도 희우정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합루 동북쪽 언덕 위에는 제월광풍관(霽月光風觀)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본래 이름은 '천석정(千石亭)'인데 현판을 ‘제월광풍관'으로 달았습니다. 학자들이 독서를 즐기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학문을 연마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제월광풍(霽月光風)'은 '비 갠 뒤의 밝은 달빛과 맑은 바람'이라는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시원하고 깨끗한 인품을 형용하는 말로 쓰입니다. 이는 북송의 문인 황정견이 염계 주돈이를 칭송하여 <염계시서(濂溪詩序)>에서 "용릉의 주무숙은 인품이 몹시 높고 가슴 속이 시원하고 깨끗하여 광풍제월과 같다."고 한 데서 유명해진 말입니다.광풍제월은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부용지 주변의 옛 모습은 지금과 그리 다를 바 없네요. <동궐지>를 보면서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겠지요. 희우당과 제월광풍관도 서향각 서쪽과 주합루 동쪽에 각각 보이네요.

 

 

 

 

 

 

이 곳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규장각 팔경'이 있다고 합니다.

 

봉모운한(奉謨雲漢) : 봉모당의 높은 하늘
서향하월(書香荷月) : 서향각의 연꽃과 달
규장시사(奎章試士) : 규장각에서의 시험 보는 선비들
불운관덕(拂雲觀德) : 불운정의 활쏘기
개유매설(皆有梅雪) : 개유와의 매화와 눈
농훈풍국(弄薰楓菊) :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희우소광(喜雨韶光) : 희우정의 봄빛
관풍추사(觀豊秋事) : 관풍각의 가을걷이

 

 

그러나 지금은 이들 건물들이 대개 사라진 상태이고 사라지진 않았더라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니, 팔경의 진면목을 즐기고 느낄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부용지 주변 경관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