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덕궁 (3) 효명세자의 발자취, 연경당과 선향재, 애련지와 의두합

모산재 2010. 10. 30. 08:45

 

 

오후 세 시, 후원 관람을 예약한 사람들은 성정각 동쪽 후원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모여 입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러는 동문인 자시문으로 들어가 관물헌(집희) 마루에 앉아 성정각과 희우루를 쳐다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기도 합니다.

 

후원(後圓)은 이름 그대로 궁궐의 뒷동산인데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어서 금원(禁園)이라고도 하고, 궁궐의 북쪽에 있으니 북원(北園)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한때는 비원이라고 일컫기도 했지만, 이는 창덕궁 후원을 관리하기 위하여 지은 관리소를 일컫는 이름이니 올바른 이름이 아니라는 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곳은 오랜동안 일반인들이 접그할 수 없었던 공간이지만 지금은 예약을 통해 제한된 인원만이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야산과 골짜기에 어울리는 전각과 연못 등을 조성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하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 성정각 앞.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후원 가는 길이 나온다.

 

 

 

 

 

세 시 정각이 되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중년 여인, 가이드가 나타나고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담장 사이로 난 길을 통하여 후원으로 연결됩니다.

 

 

후원 길로 들어서자마자 길 왼쪽으로 관물헌(집희) 뒷마당으로 연결되는 망춘문(望春門)이 나타나네요.

 

 

그런데 망춘문은 성정각의 뒷문이라기보다는 원래 희정당의 동문이라고 합니다. '망춘(望春)'이란 '봄을 기다린다.'는 뜻이니 '봄'을 뜻하는 방향인 동쪽으로 향한 문 이름이라야 어울립니다. 그런데 지금 이 문은 동쪽 방향에 있으면서도 담장의 방향과는 직각으로 틀어서 남족을 향하고 있는 특이한 자세를 취하고 있네요. 

 

 

 

 

 

 

<동궐도>에는 희정당의 동문으로서 동쪽을 향해 그려져 있는데 어찌된 것일까요. 그런데 지금의 망춘문 바로 아래에 현판이 없는 동향문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이 진짜 망춘문이고, 망춘문이라는 현판을 단 이 문은 원래 응경문(凝慶門)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망춘'이라는 이름은 중국에서도 전각이나 정자의 이름으로 즐겨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정각과 낙선재 사이, 후원으로 넘어가는 넓은 길과 공터에는 원래 높은 월대 위에 당당하게 자리잡은 중희당(重熙堂)이 있었던 곳이라 합니다. 흔히 동궁(東宮)이라 일컫는 왕세자의 거소 말이지요. 세자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존재여서 동쪽에 집을 마련하고 동궁이라 불렀습니다.

 

 

 성정각 동쪽에 있던 중희당터

 

 

 

 

↓ 낙선재 입구에서 올려다본 승화루(왼쪽)

 

 

 

 

 

그런데 중희당은 1891년 고종의 명에 따라 이전하였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중희당과 연결된 육각누각인 삼삼와(三三窩), 칠분서(七分序), 세자의 서재로 소주합루라고도 불렸던 승화루(承華樓)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복도로 연결되어 서고와 도서실로 이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경술국치를 당하기 몇 개월 전, 승화루는 일본 경찰들이 상주하는 창덕궁경찰서가 되어 버립니다.

 

 

 

관물헌 뒤쪽 담장을 돌아선 곳에서 가이드는 후원을 돌아보는 순서를 알려줍니다. 연경당→불로문→부용지와 주합루→애련지→관람지와 존덕정→옥류천 순입니다.

 

 

 

※ 연경당, 애련지, 부용지 일원 안내도(다음 지도 참조) 

 

 

 

  

아름드리 나무들이 가득한 숲 사이로 난 길이 너무 아름답고 상쾌합니다. 가다보니 오른쪽 골짜기 아래 숲 사이로 부용지와 부용정, 어수문과 주합루 풍경이 나타납니다. 연경당을 먼저 들른 다음 이곳으로 다시 내려올 것입니다.

 

 

 

 

 

 

 

■ 효명세자가 순조를 위해 지은 사대부가 양식의 전각, 연경당

 

그리고 금방 연경당에 도착합니다.

 

연경당의 공간 배치도를 먼저 살펴보기로 합니다. 검색을 통하여 찾은 자료인데 출처를 놓쳐 버렸습니다.

 

 

< 연경당 공간 배치도 >

 

 

 

1. 장락문(長樂門)  2. 장양문(長陽門)  3. 수인문(修仁門)  4. 안채(內堂)  5. 통벽문(通壁門) 

6. 연경당(演慶堂)  7. 선향재(善香齋)-서재  8. 농수정(濃繡亭)

 

 

문간채에 있는 장락문(長樂門)을 들어서면 마당 하나를 지나 오른쪽으로 사랑채로 통하는 장양문(長陽門)과 왼쪽으로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修仁門)이 있습니다. 사랑채로 들어가는 장양문은 솟을대문인데 안채로 통하는 수인문은 낮은 평대문으로 되어 있어 남녀에 따른 양식에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연경당은 외부적으로는 담장으로 안채와 분리되어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편에는 서재인 선행재와 농수정이라는 멋진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경당은 사랑채로서 남자의 공간이며 내당은 여자의 공간이 되며 선향재(善香齊)는 서재이며 수학 공간입니다.

 

연경당(演慶堂)은 1828년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요청하여 진장각(珍藏閣)이 있던 자리에 사대부가의 형태로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순조에게 존호(尊號)와 경례(敬禮)을 올리는 경축 의식을 거행할 곳으로 건축했다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경사(慶事)가 널리 퍼진다'는 뜻의 '연경(演慶)'이란 당호가 정해진 것입니다. 이곳에서 효명세자는 어머니인 순원왕후의 생일 축하 진작(進爵:술잔을 올리는 의식) 행사와 각종 정재(呈才:궁중 행사용 춤과 노래) 공연을 거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안동김씨 세도에 휘둘리던 순조는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청을 시키고 이곳 연경당에서 지냈다고 합니다.

더보기
※ 진장각(珍藏閣) : 열성(列聖)의 어제(御製) 어필(御筆)과 루판(鏤板)을 보관하던 곳이다. 진장각(珍藏閣)은 창덕궁 영화당(暎花堂) 동북쪽 어수당(魚水堂) 뒤편의 산기슭에 있었는데 규장각을 완공한 후 서남쪽에 어진과 왕실 물품을 모셔두는 봉모당(奉謨堂)으로 이안(移安)하였다고 한다.

 

궁궐 안의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연경당은 단청을 하지 않았고, 구조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기둥 위에 공포를 두지 않은 민도리집으로 사대부가의 형태를 엄격히 지킨 가옥입니다. 그래서 연경당은 19세기 단촐하고 아담한 사대부가의 아름다움을 원형대로 보여주는 대표적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사대부 집을 모방하였다고 하지만 건물 규모는 99칸을 훨씬 넘어 모두 120여 칸이나 됩니다. 연경당(사랑채) 14칸, 내당(內堂: 안채) 10칸 반, 선향재(善香齋) 14칸, 농수정(濃繡亭) 1칸, 북행각(北行閣) 14칸 반, 서행각(西行閣) 20칸, 남행각(南行閣) 21칸, 외행각(外行閣) 25칸으로 모두 120칸입니다.

 

더보기
※ 백골집(白骨집)

 

일정한 색채나 문양을 더하는 단청은 건물의 권위나 특정한 기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인데, 세종실록이나 경국대전에는 사가(私家)의 단청을 금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단청이 없는 상류층의 주택이나 민가 건물을 백골집(白骨집)이라 부릅니다. 당시의 상류 주택을 모방하여 지은 연경당(演慶堂)도 순수한 백골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일부 대신들이 사가에 단청을 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고 합니다만 지금 전하고 있는 양반가옥들은 모두 백골집입니다.

 

 

 

 

그런데 <동궐도>에 그려진 연경당과 현재 연경당의 위치와 모습이 아주 다릅니다. 아래의 동궐도를 보면 주합루와 서향당의 북쪽에 멀리 떨어진 현재의 연경당과는 달리, 연경당이 주합루와 서향각 서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또한 건물 구조가 ㄷ자형으로 되어 있고 안채 사랑채 구분도 없는 등 전각의 구조와 배치도 아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동궐도>에 그려진 연경당이 실제로는 진장각(珍藏閣)이며, <동궐도>를 그린 화원이 새로 지은 연경당을 미처 그리지 못하고 진장각을 그린 데다 '연경당'이라고 써 넣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영우 교수는 <창덕궁과 창경궁>이란 책을 통해 기존 학계와는 다른 주장을 폅니다. 한영우 교수는 <궁궐지> 등의 기록을 토대로 이것이 진장각이 아니라 헌종 대 이후 새로 지은 연경당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처음 지었던 연경당은 없어지고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그 후에 새로 지은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더보기
※ 조선의 마지막 희망, 효명세자 ('gauriyang'이라는 필명을 쓰는 분이 네이버 오픈 백과에 올린 글입니다.)

 

조선왕조에서 세자 시절 아깝게 요절한 인물 중에서도 가장 아쉽고 아까운 인물을 꼽자면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를 꼽을 수 있습니다.

앞선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과거와 근래에 이르러 그나마 알려진 인물들 이지만, 마지막으로 꼽은 효명세자는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인물입니다. 그는 역사에 추존 익종대왕으로 기록 되어 있으며, 정조의 손자이자 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순원왕후 김씨 입니다.

순조 9년(1809) 8월 9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출생 하였으며, 이때 부모의 나이는 순조 20세와 순원왕후 21세 였습니다. 순조와 순원왕후의 첫 아이이자 장자로 태어난 익종은 태어난 순간부터 원자로 명명 되었고, 순조 12년인 1812년 6월 2일 휘(이름)를 대라 정하고 7월 6일 4세의 나이로 왕세자로 책봉 되었습니다.

실로 효명세자의 탄생은 조선의 축복이었습니다. 현종과 명성왕후 슬하에 숙종대왕이 탄생한 이후로 150 년여 만에 왕후의 몸에서 난 적통 왕자였으니 순조의 기쁨은 말로다 표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왕세자 책봉문에서 표현된 순조의 감격은 여느 군왕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아, 원자 너의 모습이 준수하고 영명하다"로 시작하는 어버지의 책봉문은 어질고 현명하게 자라 세자이며 아들의 본분을 다 하길 바라는 아버지의 바람과 기대를 한껏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세자는 그에 부응하는 성장을 합니다. 여느 역대 세자와 비교해도 빠른 학습능력을 보였고, 용모에 있어서도 조부인 정조대왕을 빼 닮아 갔으니 순조는 먹지 않아도 배부른 심경으로 아들의 성장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11세가 된 순조 19년(1819) 3월 20일 관례를 경현당에서 행하였고, 그해 10월 11일 조만영의 딸로 세자빈을 삼아 책빈례를 행하였으니 세자빈 조씨의 나이 세자보다 한 살 많은 12세였습니다.

순조 27년(1827) 2월 순조는 자신의 병을 핑계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합니다. 순조의 나이 불과 38세의 한창 나이였으나 어린 시절부터 왕의 격무와 안동김씨 세도의 등쌀에 시달렸던 순조는 무기력증과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11세의 어린 나이에 명군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는 재위 초반에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친정 이후에는 아버지 정조가 자신의 후견인으로 내세워 준 장인인 김조순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정순왕후는 정조대왕의 정치적 적대관계로서 정조대왕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고 순조 재위 초년 천주교 탄압이라는 껍질을 쓴 신유박해를 통해 노론 적대 세력이며 정조대왕 친위세력인 소론과 남인을 대거 숙청 하니, 그 수가 무려 500인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등극 하자마자 그런 피바람을 목격 했으니 순조의 정신적인 충격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 탓인지 순조는 그 말년에 이르기까지 기를 펴지 못하고 정순왕후가 사망한 후에도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를 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순조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효명세자 뿐이었습니다. 군주로서의 자질이 남다른 세자에게 일찌감치 정치를 가르쳐 자신의 사후에는 더욱 영향력을 확대하길 바라는 순조의 마음이었습니다.

19세의 나이로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는 불과 4개월 만에 김조순의 아들인 김유근과 조카 김교근 등을 유배 보내고 사간을 통해 김씨 일족의 비리를 탄핵하는 등 세도세력을 약화 시키는 쾌거를 이룹니다.

세자의 청정을 통해 몰락했던 남인과 소론이 정계로 복귀 시켰고, 그간 세도 세력을 위해 자행 되어 온 과거제의 비리와 부정을 혁파 하고자 관련자에 대한 문책과 벌을 엄히 하였으며,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대리청정기간 3년 동안 무려 50회의 과거제를 시행 하는 등 인적 쇄신에 힘을 쏟게 됩니다.

특히 민생에 관심이 많던 세자는 자주 미행을 하게 되는데 그 길에 우연히 만난 박규수와의 인연은 군신지간을 넘어 친동기와 같은 우애로 발전하게 됩니다. 박규수는 북학파의 창시자이며 실학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로 초기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효명세자와 박규수는 북학과 실학을 함께 연구하며 개혁의 불씨를 함께 지폈습니다. 효명세자 사후 박규수 역시 은거에 들어가는데 그런 그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무려 50년 후인 고종 연간이었습니다.

개혁을 시도했던 효명세자는 그 방법으로 기존의 군주들과는 차별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바로 노래와 춤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한 것입니다. 효명세자는 조선의 예악을 정립하는 것이 왕실의 권위와 전통을 내세우는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순조와 순원왕후를 위한 연회를 11차례나 마련함으로서 연회에 참석한 대소신료들에게 왕실의 건재함과 왕권의 신성함을 내세웠습니다. 1827년 9월 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존호를 올리면서 첫 연회를 열었고, 1828년 6월 순원왕후의 40세 축하연을 또한 개최 하였으며, 가장 화려하고 세심하게 신경 쓴 1829년의 사순연은 세자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메이드 인 세자의 연회였습니다. 사순연이란, 아버지 순조의 40세 생신과 즉위 30주년을 함께 기념하는 연회로서 여러모로 의미 있는 연회였습니다.

순조 28년 11월 효명이 직접 아버지 순조에게 사순연을 열 것을 주청하였고, 순조의 허락을 받은 세자는 곧바로 진찬소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대대적인 연회 준비를 시작합니다. 전국에서 당대 최고의 기녀 85명을 선발 하였고, 한 달 동안 10여 차례에 이르는 예행연습에 직첩 참관 하여 진행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때에 궁궐에 천한 기녀들이 돌아다니고 세자가 직접 무대를 참관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세도 세력들이 공식적으로 불만을 터뜨립니다. 대사헌 박기수 등이 1829년 1월 10일 이를 비판 하는 주장을 했으나 진노한 세자가 박기수 등을 유배 보내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는 사순연을 통한 세자의 계획이 비단 연회 개최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순연은 1829년 2월에 시작하여 6월에 이르기 까지 총 6회에 걸쳐 진행 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순연에 선보일 춤과 노래를 세자가 직접 창작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궁중무용으로 유명한 '춘앵전'(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 옷을 입고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은 바로 효명세자가 창작한 노래와 무용입니다.

     곱기도 하구나 달아래 걸어가는 그 모습
     비단 옷소매는 춤을 추듯 바람에 가벼이 날리도다 - '춘앵전' 중

무산향 '(효명세자가 만든 독무로 침상 모양의 대모반이라는 이동 무대 위에서 추는 춤.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의 기쁨을 표현), 가인전목단 (목단 꽃을 꽂은 꽃병을 가운데 두고 그 꽃을 꺾으면 추는 춤) 등을 만들었고, 고구려와 신라의 춤을 복원하는 등 한국사를 통틀어 예악에 있어서는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업적을 남깁니다.

세자는 시를 짓는 재능도 탁월하여 여러 수의 시를 남겼는데 특히 아버지를 향한 효심과 정국에 대한 포부 등을 담은 시가 많습니다.

     봄 못이 맑으니 꽃 그림자 곱기도 해라.
     온 산천 붉어 비와 이슬을 머금으니
     우리 임금 깊은 덕이 창생에 미쳐 이 같이 고르구나.  - 효명세자 작 '춘당대' 중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구름을 일으키고 나와 안개를 토 하더라.
     이 용이 만물을 키워 내리니
     능히 사해의 물을 움직일 것이다. - 효명세자 작 '잠룡'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었던 세자는 시를 지어 아버지께 바치고, 존호를 지어 바쳤으며 부모를 위해 11차례나 연회를 베푸는 등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훗날 세자가 돌연 사망하자 이에 세자에게 효명이란 시호가 지어 진 것도 세자의 효심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왕권의 강화와 부모님에 대한 효심의 발로로서 연회를 기획했던 세자는 연회 다음날 익일회작이라 하여 연회를 지휘한 신하들을 불러 개인적인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들 신하의 대부분은 세자 개인의 친위 세력들이었습니다. 이 친위 세력들은 대부분 반 세도세력이었던지라 정치 회동적 성격이 매우 강했습니다.

또한 전 연회의 호위를 금군이 아닌 세자 개인의 친위부대에게 맡김으로서 군사적으로도 자신의 세력이 매우 우월함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할아버지 정조가 화성 연회를 베풀 때 군사적 우월함을 내세웠던 것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세자의 도발이 세도세력에게는 큰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1830년 윤 4월 22일 세자가 돌연 각혈하자 궁궐에 초비상이 걸렸습니다. 그 전까지 세자의 건강은 문제가 없었고 각혈은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순조가 약원에 숙직을 명하였고 종묘와 경모궁 등에 기도를 명하였습니다. 내의원의 탕제가 병에 효험이 없자 세자는 자신의 탕제를 직접 처방하였습니다. 정조의 경우 자신의 병이 갑자기 악화되자 스스로 처방하였던 전례가 있었는데 정조와 효명 모두 독살을 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 1일 측근 정약용을 입시케 하여 처방과 탕제를 맡겼으나 때는 너무 늦었습니다. 세자는 5월 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향년 22세의 나이로 승하합니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은 3년에 불과하였지만, 세자가 내보인 포부와 개혁의 강도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세자의 사망 후 순조는 모든 의욕을 상실합니다.

그 해 9월 15일 4세 된 세자의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하였고, 4년 후인 1834년 11월 13일 순조가 경희궁 회상전에서 향년 45세의 나이로 별다른 업적 없이 승하합니다.

효명의 아들인 헌종이 등극한 1834년,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숭하였습니다. 고종이 익종의 양자로서 등극한 후에는 수차례에 걸쳐 양아버지인 효명에게 존호를 올렸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이후인 광무 3년(1899)에는 문조 익황제로 묘호를 추상하였습니다.

효명세자는 군주 등극하지 못하고 죽어서야 왕이 되지만, 그의 대리청정 3년은 조선왕국을 희망에 부풀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채 펴보지도 못하고 져버린 꽃이 었으나 그 붉음 만큼은 누구라도 돌아보게 할 만큼 찬란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 연경당은 정치공간이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즉위하여 순조의 증조할아버지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가 15세 되는 해에 수렴청정은 거두어졌지만 정순왕후는 이로부터 1년 후에 승하하고 만다. 또 순조가 수렴청정을 벗어나 직접 나랏일을 보는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이때부터 순원왕후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을 통해 안동김씨 출신의 영의정, 좌의정 및 유력자들을 몰아내고 자신의 측근들로 왕권을 강화하는 권력기반을 갖추는 정치적인 역량을 보였으며 또한 예술적인 면에서도 조선말까지 전해오는 50여 종의 궁중 정재(춤과 노래) 중 30여 종에 가까운 정재를 창작하거나 새롭게 만든 들어내는 탁월한 업적을 이루었다.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정조처럼 선왕의 능을 자주 참배하였다. 세자의 능행은 한편으로는 백성이 직접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써 올리는 상언이나 꽹과리를 쳐서 호소하는 격쟁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민심을 파악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군사훈련을 통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권을 장악하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효명세자가 2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둠으로써 대리청정은 3년 3개월 만에 끝이 나고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8세에 즉위를 한다. 그런데 헌종 역시 후사가 없어 종실에서 철종을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됨에 따라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약 60년을 지속하게 되었다.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순조는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자신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비로 삼는다. 그러나 풍양 조씨 역시 민생안정에는 관심도 없고 권력을 확대만을 위해 안동 김씨와 싸움만 머리 터지게 벌인다.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싸움박질을 한심해 하던 순조는 대신들이 상대방을 비난하는 데만 몰두한다고 한탄한다.

순조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고 세운 또 다른 계획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일이었고 효명세자는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한다. 안동 김씨를 잘 견제하던 효명세자는 순조 30년 윤사월 22일 객혈을 하며 앓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던 효명세자는 병석에 누운 지 보름도 안 된 5월 6일 타계한다. 효명세자 역시 정조의 죽음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약원에서 계속 달여올리는 약에 직접 처방을 한 것도 정조와 다를 바가 없다. 발병하기 직전까지 전곡 관리를 철저하게 하라는 엄명을 내리고 정사를 멀쩡하게 돌보던 22살의 젊디젊은 세자가 병석에 누운 지 13일 만에 죽은 것이다.

효명세자의 죽음은 다시 안동 김씨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했고 순조는 그들의 그늘에서 숨을 죽이고 살 수밖에 없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와 민란으로 대변되는 순조대는 11세 어린 소년이 통곡하면서 왕위에 오른 순조 자신에게나 조선으로서도 혼란과 혼탁으로 얼룩진 시대였다."외척인 풍양 조씨를 배경으로 효명세자가 안동 김씨의 세도를 누르면서 순조를 위해 지은 집이 연경당이다."

사학자 한영우의 이야기이다. "순조는 연경당에 머물며 효명세자를 후원해 세도정치를 극복하려던 원대한 정치적 포석을 지녔던 것이다."
<cafe.daum.net/ghdcjsgidry/Nndr/8 에서 부분 인용>

 

 

 

 

연경당 대문 앞에는 작은 개울이 흘러 바로 아래에 있는 연못으로 흘러듭니다. 작은 연못 아래에는 애련지라는 좀 더 큰 연못이 있습니다. 서북쪽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연경당 앞을 지나 동쪽으로 흘러 애련지로 들면서 명당수의 기능을 합니다.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를 지나면 연경당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아, 돌다리를 건너기 전,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는 특이한 모양의 괴석 하나가  눈에 띕니다. 그 받침돌 사면엔 토끼 모양의 짐승이 새겨져 있습니다. 장락문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상징으로 보입니다.

 

 

 

 

 

연경당의 정문, 장락문(長樂門)입니다.

 

 

 

 

 

‘장락(長樂)'은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 뜻입니다. 받침돌에 토끼를 새긴 괴석이 상징한 것처럼 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으로 풀이하기도 하고, 한비자>에 "존엄한 군주의 지위를 가지고 충신을 제어하면 오랜 즐거움이 생기고 공명을 이루게 된다."라고 한 구절과의 연관된 것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나중에 돌아보게 되는 낙선재의 대문 이름도 똑같은 '장락문(長樂門)'이더군요.

 

 

 

 

정문인 장락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사랑 마당으로 이어지는 장양문(長陽門)이 동쪽으로 보입니다. 연경당의 사랑채 문으로 행랑채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지은 솟을대문입니다.

 

 

 

 

'장양(長陽)'은 '볕이 오래 든다'는 뜻이니, 남성의 공간의 사랑채가 바로 양기(陽氣)가 가득한 공간임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장양문 서쪽, 안채로 이어지는 평대문인 수인문(修仁門)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지요. '어진 품성을 닦는 문'이니 여성성을 강조한 것이지요.

 

 

 

 

장양문을 들어서자 넓은 마당 안쪽에 연경당(演慶堂)이 보입니다. 연경당은 이곳의 건물군 전체의 이름이면서 사랑채의 당호이기도 합니다. 연경당이라는 당호를 달고 있는 사랑채는 주인의 일상거처로 이곳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고, 또 문객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는 열린 공간입니다.

 

 

 

 

사랑채 마당 담밑에는 몇몇 괴석이 보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살짝 보이는 건물이 서재인 선향재입니다.

 

사랑채인 연경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홑처마 집입니다. 사랑채 처마 밑으로는 안채로 통하는 널문을 두어 주인이 드나들 수 있게 꾸미고 사랑채의 동쪽 끝으로는 마루를 한층 높여 시원하게 꾸민 누마루를 만들었습니다.

 

 

연경당을 동쪽에서 본 모습입니다. 뒤쪽으로 안채와는 담으로 막혀 있는 듯 보이지요.

 

 

 

 

 

이 담장을 '내외담'이라고 부르는군요. 사랑채의 마당 서쪽으로 안채와 공간을 나누고 있는데, 이 내외담에는 '통벽문'이라는 일각문을 두어서 필요시에 통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사랑채 동쪽으로는 서재인 선향재(善香齋)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향'이란 '좋은 향기'이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책의 향기를 대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재이기도 하지만 문인들을 맞이하기도 하는 곳이었답니다. 14칸짜리 일자형 건물인데, 가운데 큰 대청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이 건물은 햇빛을 가리기 위한 차양지붕을 내어 달아 놓은 것이 특이합니다. 선향재의 바로 앞에 기둥들을 세우고 맞배지붕을 덮어 차양을 만들었는데, 가로로 단 차양문을 도르래를 이용하여 작동하도록 끈을 연결하여 놓았습니다.

 

 

 

 

 

몇 년 전 문화재청이 목조건물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더 잘 보존된다고 하여 이곳에서 문화재보호재단으로 하여금 전통차를 파는 행사를 벌이게 허용하기도 한 일이 있었지요.

 

 

 

선향재 뒤 담장 곁, 3단으로 올린 높은 대 위에는 멋진 단칸 정자가 하나 솟아 있습니다.

 

농수정(濃繡亭)이란 이름의 이 정자는 아름다운 창살이 눈길을 끕니다. 겹처마로 나래를 편 듯한 사모지붕 위에는 큰 절병통을 얹은 모습이 창덕궁의 정자들 중에 가장 당당한 위풍을 자랑한다고 평가됩니다.

 

 

 

 

 

농수정 계단 아래 왼쪽(북쪽)에는 높은 문이 서 있네요. 이곳을 나서면 바로 관람지와 그 주변 승재정 등의 정자로 길이 이어집니다.

 

 

 

연경당 뒷마당으로 이동합니다. 연경당 뒷모습과 함께 왼쪽으로 선향재가 보입니다.

 

 

 

 

 

위 아래  두 사진은 모두 연경당의 뒷뜰에서 본 모습입니다. 위쪽 사진은 선향재가 있는 동쪽의 바깥채이고 아래쪽 사진은 서쪽 방향의 안채 부분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는데, 사랑채의 도리는 둥근 재목을 썼고 안채의 도리는 네모난 재목을 썼다고 합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남자가 거처하는 공간은 하늘(양)을 상징하는 둥근 재목을, 여자가 거처하는 공간은 땅(음)을 상징하는 네모난 재목을 쓴 것이랍니다.

 

 

 

 

 

 

안채는 안주인의 방인 안방과 큰 마루, 며느리 방인 건넌방, 부엌간, 찬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경당 안채에서는 부엌이 따로 없고 반빗간으로 별채에 따로 지었다고 합니다. 부엌간 자리에는 안방에 불을 때는 함실아궁이와 여름을 보내는 누다락을 두었습니다.

 

 

서쪽마당에서 본 안채의 모습입니다.

 

 

 

 

 

서쪽에서 안채를 들여다보면 작은 방들이 사랑채까지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 앞마당과 뒷마당에 담장을 치고 담장 중간에 문을 두어 통로를 두었지만 내부로는 그냥 통할 수 있도록 해 놓은 것이지요.

 

 

 

 

 

안채의 앞마당로 들어섭니다. 사랑채나 안채나 모두 정면 대청마루를 넓게 잡고 앞에 좁은 퇴를 둔 형식으로 지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안채 마당에는 앙부일구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마당 가운데에는 샘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오른쪽 담장 중간에 사랑채 마당으로 통하는 일각문이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연경당 구경은 모두 끝났습니다.

 

안채 마당에 있는 평대문, 수인문으로 나옵니다.

 

연경당 앞으로 나오니 남동쪽에 작은 연못이 나타나고 그 아래로 애련지가 보입니다.

 

 

 

 

 

여기서 연경당의 아름다움에 대해 미술사학자인자 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 선생이 쓴 <연경당에서>란 글을 참고로 소개합니다.

 

더보기
※ 혜곡 최순우(兮谷 崔淳雨, 1916~1984)

 

미술사학자이자 미술평론가로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낸 분이다. 개성박물관에 근무했으며 당시의 관장 고유섭(高裕燮)의 감화로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1948년 서울국립박물관으로 전근하여 보급과장·미술과장·수석학예연구관·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구 중앙청 청사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순직했다.

 

 

연경당에서

 

아마도 왕자의 금원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으니 어디인가 거추장스러운 위엄이나 호사가  물들었을 것 같기도 하고 궁원다운 요염이 깃들일 성도 싶지만 연경당에는 도무지 그러한 티가 없다. 다만 그다지 넓지도 크지도 않은 조촐한 서재차림의 큰 사랑채 하나가 조용하고 밝은 뜰에 감싸여 이미 태고적부터 있었던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놓여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수다스러운 공포도 단청도 그리고 주책없는 니스칠도 일체 속악한 것이 발을 붙일 수는 없는 곳이다. 다만 미끈한 굴도리 팔작 입에 알맞은 방주 간결한 격자 덧문과 용자 미닫이 그리고 순후하게 다듬어진 화강석 댓돌들의 부드러운 감각이 조화되어서 이 건물 전체의 통일된 간결한 아름다움을 가누어 주고 있는 듯싶다.

정면 여섯 칸 측면 두 칸 반의 큼직한 이 남향 판 대청마루에 앉아서 보면 동에는 석주를 세운 높직한 마루방 서에는 주실인 널찍한 장판방 서재가 있어서 복도를 거치면 안채로 통하게 된다. 지금은 모두 빈 방이 되었지만 보료와 의자 등속 그리고 문갑·연상·사방탁자·책탁자·수로 같은 세련된 문방 가구들이 알맞게 이 장판방에 곁들여졌을 것을 생각하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지금 아마 그만치 반실이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연경당이 세워진 것은 순조 28년(1826)이다. 이 무렵은 추사 선생이 40대에 갓들어선 창창한 시절이었고 바야흐로 지식인 사회는 주택의 세련과 문방정취에 신경을 쓰던 시대였으니 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이만 저만한 만족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으레 지내 보면 이 연경당의 아름다움은 5월보다 11월이 더 좋다. 어쩌다가 가을소리 빗소리에 낙엽이 촉촉이 젖는 하오, 인적도 새 소리도 끊긴 비원을 찾으면 빈 숲을 등진 연경당은 마치 젊은 미망인처럼 담담하고 외롭다.

알맞게 무겁고 미끄러운 기와지붕의 곡선 사뿐히 고개를 든 두 처마끝이 자연에서 번져와서 자연 속으로 이어진 것 같은 이 연경당의 고요 속엔 아마도 가을의 정기가 주름을 잡는 것일까.

낙엽을 밟고 뜰 앞에 서면 누구의 슬픔인지도 모를 적요가 나를 엄습해 온다. 춘녀사(春女思) 추사비(秋士悲)라 했는데 나의 이 슬픔은 아마도 뜻을 못 이룬 한 범부의 쓸쓸한 눈물일 수만 있을 것인가.

나는 가끔 이 연경당이 내 것이었으면 하는 공상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곧잘 나의 평생 소원은 연경당 같은 집을 짓고 그 속에 담겨 보는 것이라는 농담을 해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 숨김없는 나의 현실적인 소망이면서도 또한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전한 꿈이기도 하다.

세상에 진정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마 세상에는 정말 못 잊을 집도 다시 있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 육간 대청에 스란치마를 끌고 싶었던 심정과 그 밝고 조용한 서재의 창가에서 책장을 부스럭이고 싶은 심정이 이제 모두 다 지나간 꿈이라면 나는 아마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여인과 연경당의 영상을 안고 먼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된다는 말이 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연경당은 충분히 아름답고 또 한국 문화의 결정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한국과 한국 사람이 낳은 조형문화 중에 우리가 몸을 담고 살아온 이 주택문화처럼 실감나게한국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또 없고 그 중에서도 가장 세련된 예의 하나가 바로 이 연경당인 것이다.

민족의 이름으로 세련시켜온 한국의 주택 이천년사는 아마도 이 아름다운 결정체 하나를 낳기 위해서 존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 불로문(不老門)과 의두합(기오헌)

 

 

이제 부용지와 주합루로 향합니다.

 

왼쪽으로 애련지를 끼고 내려서는 길, 불로문(不老門)이라는 돌문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하나의 통돌 판석을 ㄷ자 모양으로 깎아서 세운 문,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운 것이랍니다. 세로판석에 돌쩌귀 자국이 남아 있는데, 원래는 나무문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리고 아래쪽(동쪽)에도 또 하나의 불로문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용지와 주합루에서 본다면 이 두 곳의 불로문을 지나 연경당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로문 안쪽, 왼편 남쪽 언덕으로는 몇 채의 전각이 보입니다.

 

 

 

 

 

담장을 따라 왼쪽으로 이동하면 전각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 금마문(金馬門)이 나타납니다.

 

 

금마문은 중국 한나라의 궁궐 미앙궁(未央宮)에 있던 문으로, 문 옆에 동으로 만든 말이 있어 금마문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또 '금마'는 한나라에서 책을 갈무리하던 곳의 이름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마문 안의 전각은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1809∼1830)가 독서를 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기오헌(寄傲軒)과 의두합(倚斗閤)이라는 이름의 소박하고 단촐한 건물입니다. 그러니까 금마문은 효명세자가 수많은 책을 비치하고 독서하던 의두합과 관련된 이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순조의 대리청정을 했던 효명세자는 할아버지 정조의 개혁 의지를 이어받아,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약화된 왕권을 세우기 위해 주합루(규장각) 근처에 이 전각을 짓고 독서를 했던 것입니다. 독서와 사색을 위해 궁궐 내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하고 있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의두(倚斗)’'는 '북두성에 기대어 서울의 번화함을 바라본다.'는 뜻이며, '기오(寄傲)’는 ‘거침없이 호방한 마음을 기탁한다’는 뜻입니다. '기오'는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남쪽 창에 기대어 호방함을 부려 보니, 무릎 겨우 들일 좁아터진 집에서도 편안함을 알겠노라.(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입니다.

 

 

※ 의두합과 불로문, 애련지 일원

 

 

 

 

부근에는 창덕궁이 보유한 네 천연기념물 중 하나인 뽕나무(천연기념물 제 471호)가 있다고 합니다만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칩니다. 창덕궁 홈페이지에 있는 이미지를 대신 소개합니다.

 

 

 

뽕나무를 키워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는 일은 농업과 함께 나라의 근본이 되는 일이었고 궁궐에서도 장려되었습니다. 세종 5년 (1423년) 잠실을 담당하는 관리가 임금께 올린 공문에는 "경복궁 안의 뽕나무 3천590주와 창덕궁 안의 뽕나무 1천여 주와 밤섬의 뽕나무 8천280주로 누에 종자 2근 10냥을 먹일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올 정도니까요.

 

 

 

 

 

■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

 

불로문 북쪽에 있는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은 숙종 때(1692년)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라고 합니다.

 

숙종은 <애련정기(愛蓮亭記)>에서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에 이러한 연꽃을 사랑하여 새 정자의 이름을 애련정이라 지었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애련지는 부용지와 달리 가운데 섬이 없는 네모꼴의 연못으로, 사방을 장대석으로 쌓아올렸습니다. 연경당 앞을 지나 흘러내려온 개울물을 폭포처럼 떨어지게 하였습니다. 원래는 연못 옆에 어수당(魚水堂)이라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애련정은 단칸 사모지붕집으로 일반 건물에 비해 추녀가 길며 추녀 끝에는 잉어 모양의 토수가 있습니다. 물 기운으로 불 기운을 막는다는 음양오행설에 기초하여 지었으며, 네 기둥 가운데 두 기둥은 연못 속에 주춧돌이 잠겨 있습니다.

 

‘애련’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의 유학자 주돈이가 쓴 '애련설(愛蓮設)'이라는 시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애련설'에 대해서는 →http://blog.daum.net/kheenn/15852527 참조)

 

 

이제 부용지와 주합루로 이동합니다.

 

 

 

<다음 글에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