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서산 상왕산 개심사, 아담하고 소박하여 편안한 절

모산재 2010. 10. 20. 13:54

 

아침부터 날씨는 흐렸고 개심사 까까운 서산나들목을 들어설 때는 금방이라도 폭우가 쏱아질 듯 하늘은 잔뜩 찌푸린 모습이다.

 

차창 밖에는 삭발한 스님의 머리를 닮은 구릉들이 이어지고 있다. 삼화목장이다. 1960년대 후반 권력자 김종필씨에 의해 만들어지고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에 의해 강제 헌납된 뒤 여러 번 주인이 바뀌어 지금은 농협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구릉 곳곳에서 소떼들이 어슬렁거리며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나들목을 나와 골짜기로 들어서면 신창저수지라는 제법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초지가 구릉을 이룬 목장과 저수지가 어울린 풍경을 바라보며 산사를 찾아가는 것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다. 차가 들어서지 못하던 십 수 년 전 이 길을 걸어서 가던 때의 여유롭던 느낌이 떠 오른다.

 

 

 

일주문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개심사로 향한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 개심사가 자리잡고 있는 상왕산은 코끼리(象) 형상을 가진 산이어서 상왕산이라 부른다.

 

 

 

 

 

 

일주문을 지나 얕은 골짜기로 곧게 난 길을 얼마간 가다보면 가파른 산길로 들어서게 된다. 구불구불 솔숲으로 난 오솔길을 오르며 걷는 것은 개심사를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하지만 빗방울조차 툭툭 듣는 후텁지근한 날씨에 습하고 어두운 숲길을 오르자니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하다.

 

 

 

10여 분 오르다 보면 절집이 나타난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석축으로 둘러싸인 길다란 직사각형의 연못이다. '경지(鏡池)'라고 부르는 이 연못은 개심사의 상징과도 같은데 절터의 가로 너비와 같은 폭으로 조성되어 마치 성 밖의 해자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연못 가운데에는 긴 외나무 다리가 놓여 있고 절을 찾는 이들은 대개 이곳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렇게 커다란 연못을 조성한 이유는, 코끼리 형상의 산인 상왕산 중턱에 자리잡은 개심사이므로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라 하니 풍수지리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심사는 상왕산 골짜기에 서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비탈진 구릉을 정지하다 보니 넓은 대지를 확보하기 어려워 좌우 폭이 넓다. 가람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尋劍堂)과 무량수전이 있고 정면에 안양루가 있는 모양새다.

 

 

절터는 3단 가량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맨 아래에는 경지가 있고, 2단에는 안양루(安養樓)가 서 있으며, 안양루와 무량수전 사이에 좁은 가설문을 통해 절마당으로 이어진다.

 

 

 

연못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해탈문, 안양루, 심검당, 대웅전의 차례로 발길이 이어진다.

 

 

 

 

 

 

 

전면에 '상왕산 개심사(象王山開心寺)'라고 씌어 있는 건물은 안양루(安養樓)이다. '안양루'란 누각 현판은 안쪽에 걸려 있다. '안양(安養)'은 '극락세계'를 뜻하니 안양루는 극락세계로 들어서는 누각이다. 그래서 대웅보전과 마주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절에서 일반적인 2층 문루 형식이 아닌 단층 건물로 되어 있다. 종루로 의식 법구인 법고와 목어 · 운판이 보관되어 있다.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라는 예서체 편액은 근세의 서화가 해강 김규진(金圭鎭)의 필체라고 한다. 김규진은 해인사 일주문의 '가야산해인사'라는 편액을 쓴 분이기도 하다.

 

 

 

 

 

안양루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인 본생담(本生譯)을 주제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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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규진(金圭鎭, 1868~1933)에 대하여

 

한국의 근대 서화가.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에 모두 묘경을 이루었고, 산수화 ·화조화를 잘 그렸으며 특히 난죽은 절묘하였다. 사군자(四君子)도 즐겨 그렸고 글씨는 대자(大字)를 특히 잘 썼다.

호 해강(海岡) ·백운거사(白雲居士) ·취옹(醉翁) ·만이천봉주인(萬二千峯主人) 등 10여 개가 있다. 평남 중화 출생. 어려서부터 외삼촌인 이희수(李小南)에게 글씨를 배우고 18세 때 청나라에 유학하여 8년간 서화의 명적(名蹟)을 연구하였다. 영친왕 이은에게 서법을 가르쳤다. 1902년경 일본에 가서 사진 기술을 익혀 한국 최초로 사진술을 도입하고 어전(御前)사진사가 되었다.

1915년 5월에는 '서화연구회'라는 3년 과정의 사설 미술학원을 열어 후진양성과 전람회를 개최했다. 이때 학생들의 교재로 <서법요결 書法要訣>·<난죽보 蘭竹譜>·<육체필론 六體筆論>등을 펴냈다. 한편 안중식(安仲植) ·조석진(趙錫晋)과 함께 서화협회 창립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조선총독부 미술전람회의 서예부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근대 서화 계몽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계속하다가 66세로 죽었다.

서예의 각체에 두루 능하며 특히 활달한 대필서로 이름을 날렸다. 금강산 구룡연의 20m에 달하는 미륵불예서, 내금강의 천하기절(大下奇絶) 초서, 법기보살(法起菩薩) 해서 등 각서(刻書)가 남아 있고 전국의 궁전·사찰·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겼다. 그 중에서도 해인사의 '가야산해인사'(伽倻山海印寺), 부벽루의 '금수강산'(錦繡江山), 서울의 '보신각'(普信閣), '희정당대조전'(熙政堂大造殿) 등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그린 벽화 <총석정절경 叢石亭絶景>과 <금강산만물초승경 金剛山萬物肖勝景>이 있는데 화려한 색채와 사실적 묘사로 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문인화가답게 호방한 필치가 돋보이는 묵죽(墨竹)이 뛰어나며 근대적 화풍이 엿보이는 <폭포>·<말>등의 작품도 있다.

 

 

 

경지 건너 경내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2층짜리 범종각인데, 안양루 앞마당 끝에 있다. 구부러진 나무 기둥을 사용한 것이 눈길을 끄는데, 심검당의 휘어진 목재와 조화를 이루게 하려는 배려로 보인다.

 

하지만 화려한 사모지붕과 무성의하게 설치한 난간, 콘크리트로 지은 아래층 등이 부조화스럽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안양루 우측면 옆에 샛문처럼 붙어 있는 해탈문을 지나 절마당을 들어선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전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때 산불로 소실된 것을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 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지붕이 가벼운 맞배지붕에는 흔히 단순한 주심포 양식을 쓰는데, 이 건물은 지붕이 무거운 팔작지붕에 흔히 적용하는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어 맞배지붕 건물임에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개심사 대웅전은 몇 채 남아 있지 않은 임진왜란 이전의 건물로, 건물 양식상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이전해 가는 과정 상의 절충 형식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대웅전 편액의 글씨에 대해서는 확인되는 바가 없는데, 다만 브티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송시열의 문인이던 조선 후기의 문신 민정중(閔鼎重, 1628~1692)에 대한 기재문에서 민정중의 작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대웅전이라면 석가모니불을 모신 것이 당연할 터인데, 개심사의 본존불은 아미타불이다. 주불인 아미타불 좌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관음보살 입상, 오른쪽에 지장보살 입상을 모셨다. 우리의 법당에서 주불은 앉고 협시불은 서 있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그렇다면 이 전각의 명칭을 극락전이라고 해야 맞을 듯한데 대웅전이라 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이 아미타불은 국내 최고의 목불로 알려지며 작년(1989년) 9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공식 명칭)은 형상이 단정하면서도 중후하며 알맞은 신체비례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조각기법도 매우 정교하고 세련되었다. 뚜렷하면서도 엄숙한 모습의 이국적 얼굴, 왼쪽 어깨에 몇 가닥의 짧은 종선으로 처리된 옷 주름과 그 아래로 자리 잡은 겹O형 주름 등은 조각예술의 극치로 평가되고 있다.

 

1274년에 중수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상이나 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불좌상 등과 시대양식을 공유하면서도, 이들 상보다 훨씬 건장하고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고려후기 목조불상 가운데 가장 완성도 높은 불상으로 평가된다.

 

 

복장 유물 내의 기록으로 불상의 제작 연대가 중수연대인 1280년보다 앞선 시기라는 것이 밝혀졌다.

 

후불벽화는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로 <관무량수경>의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극락세계의 여러 모습을 16가지 다른 장면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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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경변상도(觀經變相圖)

 

정토삼부경 중 〈관무량수경〉에 의하여 극락세계의 여러 장면을 16가지로 관상하는 방법을 그림으로 쉽게 표현한 것이다. 일반적인 도상은 아미타 정토변상과 마찬가지로 아미타삼존 및 성중(聖衆)을 중심으로 극락정토의 경관을 그리고 그 좌우와 아래에 관경서분변상(觀經序分變相)과 16관변상(十六觀變相)을 그렸다.

관경서분변상은 인도 마가다국의 아자세(阿闍世) 태자가 왕위를 찬탈하고자 부왕인 빈비사라(頻毘沙羅)를 유폐시키고 모후 위데희[韋提希]마저 죽이려고 했을 때 이를 구제하기 위해 영축산의 석가가 왕비 앞에 나타나 정토에 대한 교설을 설하게 되었다는 설화를 그린 것이다.

16관변상은 왕비가 극락정토를 관상하기 위한 단계로서 청한 16관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일상관(日想觀)·수상관(水想觀)·지상관(地想觀)·수상관(樹想觀)·지상관(池想觀)·총관(總觀)·좌상관(座想觀)·상상관(像想觀)·신관(身觀)·관음색신관(觀音色身觀)·세지신상관(勢至身想觀)·보관상관(普觀想觀)·잡상관(雜想觀)·상배생상관(上輩生想觀)·중배생상관(中輩生想觀)·하배생상관(下輩生想觀) 등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관경변상도는 정토신앙의 유행과 함께 중국에서 시작되어 돈황 벽화에도 그 예들이 남아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당대(唐代)에 〈관무량수경소 觀無量壽經疏〉의 내용을 그린 것으로 16관상을 13관과 구품왕생으로 전개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관경변상도는 대부분 고려 말기에 그려진 것으로 대표적인 작품은 일본 교토[京都] 다이온 사[大恩寺] 소장의〈관경서분변상도〉(1312)를 비롯하여 교토 지온인[知恩院] 소장의〈관경변상도〉(1323)와 후쿠이 현[福井縣] 사이후쿠 사[西福寺] 소장의〈관경변상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 작품인 지온인 소장의〈구품왕생도〉는 내용은 비슷하지만 구도에서 16관 가운데 상·중·하 3배관(三輩觀)을 강조한 것이 다르다.

 

 

 

대웅전 왼쪽에는 초기의 요사채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심검당(尋劍堂)이 있다. 그리고 심검당 건물 왼쪽에는 덧집으로 울퉁불퉁 구부러진 나무를 그대로 다듬어 기둥으로 세우고 단청이 없는 거칠고 소박한 건물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자연을 닮은 편안한 이 건물의 매력에 끌려 절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심검당은 '검을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검'은 지혜를 상징한다. '심검'은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無明)의 풀을 벤다.'는 뜻이니, 심검당은 명상을 통해 지혜를 닦아 집착에서 벗어나는 곳이다. 심검당 왼쪽문 위에는 설선당(說禪堂)이라는 또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 안양루 옆 처마 아래에서 본 심검당과 대웅전 일부

 

 

 


 

대개의 절에는 심검당이 적묵당(寂默堂)을 마주보고 있지만, 개심사에는 적묵당은 없고 그 자리에 무량수각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위치한 무량수각은 승방으로 현재 요사채와 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도 개심사에는 보물 제 1264호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이 있다.

 

영산회괘불탱은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할 때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모니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화면 중앙에 서 있으며 둥근 얼굴, 비대한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옷에는 둥글고 변형된 덩굴무늬가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고, 석가모니불 뒤의 광배에는 모란 줄기와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석가모니불의 머리 광배에는 일곱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으며, 옆으로는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석가를 협시하고 앉아 있다. 석가의 몸통 주변에는 8구의 화불이 좌우로 앉아 있으며 맨 아래 다리 양쪽으로 제석천과 범천이 손을 모은 자세로 석가를 향해 서 있다.

 

 ↓ 범천                                                             ↓ 제석천

 

 

     

 

 

이 괘불탱은 조선 영조 때(1772)에 그려진 것으로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라 한다. 비현실적인 신체 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 주홍부전나비

 

 

 

 

 

 

작고 아담하면서도 소박한 절, 개심사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갑자기 유명해졌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에 계곡 하나 변변히 거느리지 않은 작은 절집을 찾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다.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절집'이란 찬사는 이제 개심사를 소개하는데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되었지만, 개심사의 아름다움은 지나치게 평가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경내 입구의 긴 연못이 아름답고 자연 그대로의 재목을 살린 절집의 질박함이 독특한 미감을 자아내는 것은 평가할 만하지만,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물이 흐르는 시원한 계곡 하나 곁에 두지 못한 절집에 그리 운치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 개심사 더 보태기 +++

 

개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의자왕 14년인 654년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할 당시에는 개원사(開元寺)라 했는데, 1350년(고려 충정왕 2)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라 했다고 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1484년(성종 15)에 중창되어 몇 번의 보수를 거쳐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작은 절이지만 개심사는 근대 한국불교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는 경허스님(1849~1912)이 두문불출 정진하던 참선도량이기도 했다. 그리고 신여성으로 근대 화가였던 일엽스님(나혜석)이 이곳에서 수행을 했으며, 그 때 비구니들의 수행터로 세운 요연선원(了然禪院)이 남아 있다. 무량수각을 돌아 명부전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으로 요연선원(了然禪院)이 보인다. 특이하게도 양철지붕에 목재 기둥,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문을 한 일본식 건물이다. 

일엽스님이 이름을 붙인 '요연(了然)'이 무슨 뜻일까? 일목요연이란 말이 있듯이 '분명하고 명백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 '요연'이란 말은 경허 선사의 참선곡(參禪曲)에 나온다. 그렇다면 이 요연선원은 경허스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의 본질을 분명하게 깨닫는 수행처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지옥과 천당이 본래 공(空)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받고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인연 따라 넓은 세상으로 나가 빈 배같이 떠돌면서
인연 따라 중생을 제도하면 부처님 은덕에 보답하는 길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