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덕궁 (2) 희정당, 대조전과 경훈각, 성정각·희우루와 관물헌

모산재 2010. 10. 27. 14:14

 

선정전을 바쁘게 돌아보고 나니, 나보다 앞서 갔던 일행들은 벌써 사라지고 없습니다. 후원은 3시부터 돌아보기로 예약되어 있다니 모두 그 쪽으로 이동해 간 모양입니다. 정전 옆에 자리잡고 있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이 있는 공간부터 다 둘어 보고 가는 것이 순서상 자연스럽겠지만 시간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희정당과 대조전, 그리고 성정각 등 선정전의 동쪽에 있는 내전과 동궁 등 전각들을 먼저 소개하고자 합니다.

 

 

 

선정전 동쪽, 맨 앞에는 선정전과 더불어 임금의 집무 공간이자 침실이 있었던 희정당(熙政堂)이 있고, 그 뒤쪽으로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이 있으며 그 뒤 북서쪽에는 대조전과 연결된 경훈각(景薰閣)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희정당 동편에는 성정각(誠正閣) 등 부속 건물이 있으며, 후원으로 가는 길 건너 그 동쪽으로는 담장을 경계로 왕세자의 처소였던 동궁과 창경궁이 접해 있습니다.

 

 

 

※ 창덕궁 안내도 (다음 지도 참조)  

 

 

 

 

임금과 왕비의 생활 공간이 있는 선정전 동쪽은 예전에는 마당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집들이 중첩되어 있어 궁궐에서 가장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들 건물들이 다 헐려 텅빈 마당만 남아 옛 모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앞글 http://blog.daum.net/kheenn/15853816 참조>

 

 

 

텅빈 마당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희정당 바깥 건물, 왼쪽에 푸른 기와지붕이 일부 보이는 건물이 선정전, 오른쪽에 일부 보이는 건물이 성정각입니다.

 

 

 

 

 

현재의 희정당과 대조전 일대는 원래의 모습과는 다릅니다.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에 대화재로 이전의 전각들은 모두 소실되고 1920년에 새로 지은 것들입니다. 화재로 궁중의 가구와 집기, 유물도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조선총독부와 협의하여 새 궁전을 "조선식으로 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결정하고, 경복궁에 있는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지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경복궁의 강녕전은 대조전으로, 교태전은 대조전으로, 건순각은 흥복헌으로, 만경전은 경훈각으로 지어진 것입니다.

 

 

대조전 후원 멀리 떨어진 곳에는 홀로 서 있는 건물이 보이는데 덕수궁에서 옮겨온 가정당입니다.

 

 

 

 

■ 조선 말기 임금의 집무 공간, 희정당(熙政堂)

 

 

앞글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선정당이 정조 이후부터 '혼전(魂殿)'으로 이용되면서 희정당이 임금의 집무실로 기능하게 됩니다.

 

 

희정당은 최고 위계인 '전'(殿)이 아니라 사대부가에서 쓰는 '당'(堂)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보다 편안한 업무 공간을 지향했던 임금의 뜻이 반영된 것인 듯합니다.

 

 

 

 

 

외곽 건물은 복원된 것인데, 동궐도의 모습과는 어딘지 달라 보이는 듯합니다. 인정전 용마루에 새겨져 있는 오얏문장이 금빛으로 문 위에 새겨져 있네요. 출입이 금지된 문 안쪽으로 '희정당(熙政堂)'이라는 당호가 보입니다.

 

 

 

 

 

희정(熙政)'이란 '화평하고 즐거운 정치'를 뜻하니 희정당이란 당호에는 모든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도록(萬姓咸熙) 다스리고자 하는 군주의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실제로 순조의 <어제희정당명>에는 "화락하고 느긋하며, 모든일이 잘 다스려지고, 모든 관리가 잘 단속되며 만백성이 모두 기뻐하도다. 이당에 이름을 지음에 임금의 뜻이 담겨 있으니, 매양 이 편액을 볼 때마다 그 뜻을 어찌 범상하게 여기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희정당을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불타 사라지고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17년 대화재로 사라졌고, 지금의 건물은 1920년 일제가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을 헐어서 옮겨 지어 놓은 것입니다.

 

 

↓ 희정당의 동쪽 측면

 

 

 

 

<동궐도>에서 희정당의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정면 5칸 규모의 건물이 높은 돌기둥 위에 서 있고, 건물 동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은 하월지(荷月池)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강녕전을 옮겨 지을 때 메워버려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희정당 남쪽에는 숙종 때(1687년) 세워진 제정각(齊政閣)이 있었는데, 천체를 관측하는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설치하고 임금이 천체를 관찰하여 하늘의 도를 본받기에 힘썼다고 합니다.

 

 

↓ 뒷마당에서 본 희정당 

 

 

 

 

현재 건물의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의 팔작지붕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습니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하고 주위는 복도입니다. 앞면 9칸 중 3칸은 응접실이며 김규진의 금강산도, 해금강도 등의 벽화가 걸려 있습니다.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나누었습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하였는데, 서양식 실내 장식과 함께 시대의 변화에 맞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희정당은 보물 815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희정당 내부 

 

 

 

 

시간에 쫓겨 사진을 제대로 담지 못하여, 문화재청 자료들로 대신합니다.

 

 

↓ 희정당 앞쪽

 

 

 

↓ 희정당 내부

 

 

 

↓ 희정당 복도

 

 

 

↓ 내부 벽 위쪽에 그려진 김규진의 금강산도

 

 

 

↓ 김규진의 해금강도

 

 

 

 

 

■ 왕비의 생활 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 대조전

 

 

희정당의 동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다 보면 골목의 맞은편 대조전 동쪽 높은 계단 위에 여춘문(麗春門)이라는 작은 문이 보입니다. '여춘(麗春)'은 '아름다운 봄'이라는 뜻이니 태양을 맞이하는 동문(東門)으로서 기능을 합니다.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의 동문 이름도 여춘문이지요.

 

 

 

 

 

 

대조전 뒷뜰, 지금도 남아 있는 경훈각 동쪽에는 지금은 사라져 버린 집상전(集祥殿)이라는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 지으며 집상전 자리로 물려 짓는 바람에 터조차 사라진 것이지요. 집상전은 대비의 처소라고 합니다.

 

 

<동궐도>를 보면 여춘문은 집상전(集祥殿)의 동쪽에 동서 방향으로 난 문으로 그려져 있어, 남향으로 난 현재의 문과는 방향이 전혀 다릅니다.

 

 

 

희정당의 후문이자 대조전의 남쪽 정문, 선평문(宣平門)은 말하자면 희정당과 대조전을 연결하는 통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평(宣平)'은 '화평(和平)을 세상에 펼친다.'는 뜻으로 중국 한나라의 장안성(長安城) 동문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높은계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을 함부로 볼 수 없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대조전(大造殿)은 내전의 중심으로 왕비의 생활 공간이자 임금과 왕비의 침전입니다.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부르지요. 대조전은 왕실의 대통을 이을 왕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좋은 날을 골라 임금과 왕비가 동침하는 장소입니다. '대조(大造)'는 '큰 공업(功業)을 이룬다'는 뜻인데, '지혜롭고 현명한 왕자를 생산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지붕을 하고 있는데, 대조전의 집채가 대지를 상징하는 곤전(坤殿)인 까닭에 하늘 높이 용마루가 솟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용으로 비유되는 임금이 잠자는 곳에 또 다른 용을 나타내는 용마루가 있으면 두 용이 충돌한다 하여 설치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대조전(大造殿)은 보물 816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조전은 인조 때 재건될 당시 45칸 규모의 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정면 9칸, 측면 4칸인 36칸으로 줄었습니다.

 

내부 공간은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왕비의 침전인 서온돌과 임금의 침전인 동온돌로 나뉘어집니다. 각 침실 측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었는데 이는 시종들의 처소입니다.

 

대조전은 태종 때(1405년)에 처음 지었는데 여러 차례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가 1917년에 또 화재를 당하여 1920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이 곳에 옮겨지으며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구조를 고쳤다고 합니다.

 

이 건물에서 성종(1494년), 인조(1649년), 효종(1659년), 철종(1863년),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926년)이 승하하였다고 합니다. 

 

 

 

대조전에는 희정당보다 훨씬 넓은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어 보기에도 훤합니다. 궁궐에서 갇혀지내는 왕비의 단조로운 생활을 배려하는 뜻에서 널찍하고 화려한 공간 구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주황색 기둥이 도드라져 보이는 대조전 맨 동쪽의 익각(翼閣)이 흥복헌(興福軒)인데, 이곳은 임금이 조정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홍복헌에서 바로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수치스런 어전회의가 열렸다고 합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지요.

 

 

 

 

 

내부에는 왕비가 사용하였던 의자와 침상이 보입니다.

 

 

 

 

 

 

대조전 서쪽을 돌아서 뒤켠으로 가니 또 하나의 전각이 보입니다. 경훈각(景薰閣)이라는 건물인데, 대조전의 부속건물로 대조전과 행각의 통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경훈각은 단층건물이지만, 원래는 2층 건물로 아래층을 경훈각이라 하고 위층은 징광루(澄光樓)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동궐도>에 보면 이 건물은 높은 월대 위에 우뚝 솟은 이층 누대로 청기와로 지붕을 덮어 몹시 화려한 모습입니다. '경훈'은 '경치가 훈훈하다'는 뜻이요 ‘징광(澄光)은 '맑은 풍광'이라는 뜻이니 이 건물은 아름다운 전망을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 볼 수 있겠지요.

 

순조가 쓴 '징광루명(澄光樓銘)'에는 "...가을 겨울엔 각(閣)에 머물고, 봄 여름엔 누(樓)에 머무니, 사계절 동안 머물기는 이 누각이 제일이다." 라고 예찬하는 글이 있습니다. 일층인 경훈각은 온돌방으로 이층인 징광루는 마루로 되어 있어서 가을과 겨울에는 따뜻한 경훈각을, 봄과 여름에는 시원한 누마루가 있는 징광루를 이용하기에 알맞았던 모양입니다.

 

높다란 징광루에서 내려다 보는 궁궐과 후원 숲의 풍경은 대단하지 않았을까요. 궁궐에 갇혀 지내는 답답함도 징광루에 오르면 시원스레 풀렸을 것입니다. 순조가 쓴 '징광루시(澄光樓詩)'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습니다.

 

"...원근을 조망하니 초목이 새로워 드높은 왕도에 서광이 감돈다....누각 주렴을 활짝 걷으니 궁전에 햇빛 높아 맑은 향기 흐른다."

 

 

그 아름다운 징광루 건물은 1917년 불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경복궁의 만경전(萬慶殿)을 헐어 단층으로 옮겨 짓고 오늘날의 경훈각으로 남은 것입니다. 화려한 옛 건물이 사라진 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단층건물이 그래서 더욱 단촐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경훈각 대청의 동쪽 벽에는 '조일선관도'가 , 서쪽 벽에는 '삼선관파도'가 그려져 있는데 대조전과 희정당의 그림과 같이 1920년에 제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 조일선관도는 순종을 떠오르는 해에 비유하여 표현한 그림이라고 한다.

 

 

 

 

경훈각 동쪽으로는 청향각(淸香閣)이 있는데 <동궐도>에도 보이지 않고 기록에도 없는 건물이라고 합니다. 대조전을 복구할 때 딸려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자세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집상전 혹은 대조전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보관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경훈각을 나오니 넓은 마당이 열립니다. 바로 선정전 뒷마당이자 희정당과 대조전의 서쪽 마당입니다. 인정전이 편전으로 쓰이던 시기 아마도 임금은 이 뒷문을 통하여 대조전으로 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정전 너머로 보이는 용마루가 있는 인정전 지붕이 보이네요.

 

 

 

 

 

동궐도를 보면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아래에서부터 희정당, 대조전, 높다란 이층 누대인 경훈각 등이 모두 현재의 건물과는 다르다. 일제시대인 1917년 대화재로 창덕궁 내전의 옛모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 세자의 공부방, 일제시대에 내의원으로 쓰인 성정각과 관물헌

 

 

성정각(誠正閣)은 희정당의 동쪽 언덕, 후원으로 가는 서쪽 길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성정(誠正)'이란 말은 '순수하게 집중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을 뜻하니, 세자가 머물며 공부하는 곳을 이른 이름입니다. 그러나 한때는 임금의 편전으로, 순종 때에는 내의원으로 쓰기도 한 공간입니다.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에 있지요.)

 

 

성정각의 남문은 영현문(迎賢門)입니다. '영현(迎賢)'이란 '어진이를 맞이한다.'는 뜻이니, 세자가 어진이를 맞아들여 공부에 힘쓰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임을 알 수 있지요. 영현문을 들어서면 단층건물이지만 동쪽에 ㄱ자 모양으로 2층 누각 희우루(喜雨樓, 또는 보춘정)가 이어져 있어 눈길을 끕니다.

 

 

성정각과 희우루(보춘정)

 

 

 

 

지금 영현문 안쪽 본채에는 현판이 붙어 있지 않고, '조화어약(調和御藥)', '보호성궁(保護聖躬)'이란 편액과 함께 마당에 약을 찧는 절구가 있어 내의원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것은 순종 때 일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성정각의 동쪽 누각에는 '희우루(喜雨樓)', '보춘정(報春亭)' 두 개의 현판이 각각 동쪽과 남쪽으로 달려 있습니다. '보춘(報春)'은 '봄이 옴을 알린다'는 뜻이니, 왕세자가 있는 동쪽을 의미하는 현판이라 할 수 있겠지요.

 

 

'희우루'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정조 임금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 54권 '희우루지(喜雨樓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정조 원년(1777년)에 매우 가물었는데, 이 누각을 중건하기 시작하자 마침 비가 내렸고, 또 몇 개월 동안 가물다가 이 누각이 완성되어 임금이 행차하자 다시 비가 내려 희우(喜雨)라는 이름을 지어 기념했다는 것입니다.

 

송나라 문인 소식((蘇軾)이 <희우정기(喜雨亭記)>를 지은 이래 정자의 이름으로 '희우'가 사랑받았는데, 이곳 창덕궁에는 주힙루 뒤편에도 희우정이란 이름의 정자가 있습니다.

 

 

↓ 남쪽에는 보춘정, 동쪽에는 희우루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희우(喜雨)'라는 말이 나왔으니 두보(杜甫)가 쓴 두 편의 시 '희우(喜雨)', '춘야희우(春夜喜雨)'를 감상하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비가 주는 아름다운 서정을 잘 표현한 시거든요.

 

 

南國旱無雨(남국한무우)     남쪽나라 가물어 비가 없더니
今朝江出雲(금조강출운)     오늘 아침 강가에 구름이 이는구나.
入空纔漠漠(입공재막막)     공중에 들어 조금 막막하더니
灑逈已紛紛(쇄형이분분)     어지럽게 흩날리며 시원스레 뿌리는구나. 
巢燕高飛盡(소연고비진)     둥지의 제비가 높이 날며 사라지고
林花潤色分(림화윤색분)     숲 속 꽃들은 비에 젖어 생기가 또렷하구나.
晩來聲不絶(만내성부절)     저녁에 돌아와도 소리 끊이지 않아
應得夜深聞(응득야심문)     밤 깊어도 빗소리 들리겠구나.
     -  두보, 반가운 비(喜雨)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 때와 철을 알아서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을 맞아 만물을 피어나게 한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바람 따라 가만히 밤에 들어와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세상을 적시지만 가늘어 소리가 없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은 구름과 더불어 어둡고
江船火燭明(강선화촉명)      강에 뜬 배엔 등불이 밝았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새벽에 붉게 젖은 곳 바라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꽃은 금관성에는 꽃만 무성하네.
 (* 금관성: 비단을 관리하는 관청이 있던 사천성 청뚜(成都)를 가리킴)
     -  두보, 봄밤의 반가운 비(春夜喜雨)

 

 

 

 

성정각 뒤편에 있는 관물헌(觀物軒)은 왕이 자주 머물면서 독서와 접견를 했던 곳으로 현재는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동궐도>에는 지금의 이름이 아니라 '유여청헌(有餘淸軒)'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 '집희(緝熙)'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관물헌

 

 

 

 

'집희(緝熙)'란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는 의미로 <시경>에서 "심원하신 문왕이여, 아! 계속해서 밝히시고 공경하시도다."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주자는 "집(緝)은 이어지는 것이요, 희(熙)는 밝은 것으로 또한 그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라고 하여 '임금(文王)의 밝은 덕이 계속하여 빛난다.'는 의미로 풀이하였다고 합니다.

 

경희궁(慶熙宮)에도 집희당(緝熙堂)이 있었는데, 영조는 '집희당시(緝熙堂詩)'를 지어 "이 전각은 옛날 세자의 집이라, 집 안에 훌륭한 작품들이 새롭구나. / 계속하여 밝게 빛나니, 어진 이를 높이어 날로 더욱 친하도다." 라고 읊었는데, 집희당은 본래 세자의 거처이고 그 뜻이 '계속하여 밝게 빛난다(繼續光明)'는 것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집희라는 현판에 '갑자년(甲子年)', '어필(御筆)'이라 덧붙여 기록되어 있는데, 재위 기간 갑자년이 들었던 영조·순조·고종 가운데 어느 임금이 썼는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고종이 즉위 원년인 15세의 나이로 글씨를 썼으므로 다소 서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은 1884년 갑신정변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이 고종을 강요하여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기게 하였다 환궁하면서 전망이 좋은 이곳을 작전본부로 삼게 됩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2,000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병을 물리치게 되고, 관물헌에 있던 고종은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왕묘(北關王廟)로 돌아감으로써 이른바 '삼일천하'는 막을 내립니다. 김옥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은 일본공사 일행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지요.

 

 

 

↓ 영현문 앞에서 본 성정각과 희우루. 왼쪽으로는 희정당과 대조전 진입로, 오른쪽으로는 후원가는 길이 있다.

 

 

 

 

 

성정각의 서쪽 문은 동인문(同仁門)인데, 원래 희정당의 동쪽 문으로 경사진 계단 위에 높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동인(同仁)'이란 '차별 없이 인애(仁愛)를 베풀어 준다'는 뜻인데, 인(仁)은 오행상 동쪽을 가리키는 덕목이니 동인문은 잘 어울리는 이름이지요.

 

 

그리고 관물헌의 동쪽문은 자시문(資始門)인데, 이 문은 원래 중희당(重熙堂)의 서쪽 문이라고 합니다. '자시(資始)'는 '만물이 힘입어 비롯한다'는 뜻으로 <주역>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일제가 중희당을 없애고 후원으로 가는 길을 만들면서 관물헌의 출입문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후원 관람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잠시 자시문으로 들어가 집희 마루에 걸터 앉아서 희우루를 감상하곤 합니다.

 

 

1782(정조 6)년에 건립되었으며 편액은 정조 임금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상궁으로 변장하여 이 문을 통해 피신했다고 합니다.

 

 

 

 

이제 성정각 동쪽으로 나 있는 길을 통해 후원으로 이동할 차례입니다.

 

 

 

 

<계 속>

 

 

 

 

 

 

 

더보기

※ 창덕궁의 역사, 전각 구조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 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 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문화재청>

 

창덕궁(昌德宮)은 동쪽으로 창경궁과 맞닿아 있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고궁이며,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한국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1997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의 송악산의 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다시 지어졌고,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제국에 의해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를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창덕궁은 태종 5년(1405년)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조선의 궁궐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1400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받은 태종이 재위 5년(140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지었다. 1408년 조선 태조는 이 창덕궁에서 죽었다. 태종 11년(1411년)에 진선문과 금천교, 이듬해에 돈화문에 이어 여러 전각이 차례로 들어서면서 창덕궁은 점차 궁궐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창덕궁은 500여 년 조선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임금이 거처한 궁궐이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으나, 조선 초기부터 여러 임금이 경복궁을 기피하여 창덕궁이 그 자리를 대신할 때가 많았다. 특히 태종은 왕위를 위해 이복동생을 죽인 곳인데다, 자신의 정적 정도전이 주동하여 건설한 경복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창덕궁의 위상은 임진왜란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선조 25년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에 있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선조 38년(1605년)부터 재건 준비를 시작하여 광해군 원년(1609년) 10월에 인정전 등 주요 전각이 거의 복구되었으며, 이때 공사가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공사가 진행되어 9월에 완료되었다. 이후 역대 왕들은 창덕궁에서 주로 정무를 보게 된다.

인조 반정으로 궁궐 대부분이 소실, 조선 인조 25년 1647년에 재건하였는데 인조는 한편 후원에 여러 정자와 연못을 조성하였다. 숙종 30년(1704년) 12월에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정조는 인정전에 품계석을 세우고 후원에 부용지를 중심으로 부용정, 주합루, 서향각을 세우고, 국내외 서적을 보관하기 위하여 열고관, 개유와, 서고를 지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는 의두합과 연경당을 지어 오늘날의 후원 모습을 마무리하였으며, 헌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낙선재, 석복헌, 수강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 말기에는 서구의 문물을 도입하면서 창덕궁에서도 서양식의 전등이나 차고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순종이 고종의 퇴위 후 이곳으로 옮겨 황궁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돈화문 앞에 도로가 생겨 창덕궁과 종묘가 갈라졌으며, 주요 전각 외의 여러 건물이 대부분 헐리는 등 궁궐이 크게 훼손되었다. 1912년부터는 창덕궁의 후원과 아울러 인정전(仁政殿) 등의 중심부와 낙선재(樂善齋) 등이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다.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같은 핵심 전각이 소실되었으며, 이 곳을 재건하기 위하여 1918년에 조선총독부와 이왕직에서는 경복궁 교태전, 가녕전과 그 앞의 동ㆍ서 행각을 헐어다 창덕궁으로 이건하였다. 1921년에 일제는 대보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 선원전을 지었다.

해방 이후에도 창덕궁은 한동안 그대로 방치되었으며, 주변에는 민가와 학교, 대형 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다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현재 창덕궁은 제한적으로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하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현재 창덕궁은 크게 인정전과 선정전을 중심으로 한 치조(治朝) 영역, 희정당과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침전 영역, 동쪽의 낙선재 영역, 그리고 북쪽 언덕 너머 후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덕궁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북쪽 응봉의 지형에 따라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정전인 인정전, 편전인 선정전 등 각 건물이 일정한 체계 없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어 평지에 세운 경복궁과 대비된다.

그러나 언뜻 보아 무질서해 보이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는 주변 구릉의 높낮이 뿐 아니라 그 곡선과도 조화를 잘 이루고 있으며, 풍수 사상에 따라 뒤에는 북악산 매봉이 있고 앞으로는 금천이 흘러 배산임수를 이루고 있다.

또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두고 뒤쪽에는 사적인 공간을 두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원칙에 따라 궁궐 앞에는 공적인 공간으로 궁궐의 으뜸 건물인 인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인 궐내각사(闕內各司)가 자리잡고 있고, 뒷부분에는 임금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인 임금과 왕비의 처소가 있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임금의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이다. 또 중희당, 연영합 등 세자의 거처는 '동궁(東宮)', 수강재와 같은 대비의 거처는 '동조'(東朝)라 하여 옛 법도에 따라 이들의 처소는 궁궐 동쪽에 두었다. 또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