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창덕궁 (1) 돈화문, 금천교, 진선문, 인정문, 인정전, 선정전

모산재 2010. 10. 22. 20:26

 

동호인 모임이 있는 날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창덕궁을 찾았습니다. 그 옛날 대학시절, 95번 버스를 타고 돈화문 앞을 지나 종묘와 비원 사이로 난 길을 지나 수없이 다녔건만, 개방되지 않은 곳이라 무심히 보아 넘겼던 곳. 정작 개방된 뒤에도 찾아볼 기회를 가지지 못하다 이번 동호인 모임에서 창덕궁을 간다기에 얼씨구나 하고 따라 나섰습니다.

 

더구나, 일반에게 개방되지 않은 후원 관람을 예약해 두었다고 하니, 덕분에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을 처음으로 방문하면서 풀 코스로 돌아보게 되었으니 복이 터졌습니다.

 

 

담장 너머로 창덕궁 궁궐 지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잡은 식당, '비원칼국수'라는 곳에서 점심으로 칼국수를 맛나게 먹은 다음 돈화문으로 향합니다.

 

 

 

 

 

담장 안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드리 회화나무들이 이무기처럼 용틀임하며 도열해 섰고, 돈화문 지붕 추녀 마루에는 잡귀와 흉액의 범접을 막는 잡상(雜像)이 쪼르르 앉았습니다.

 

잡상은 소설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들과 도교의 잡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당사부(삼장법사), 손행자(손오공), 저팔계, 사화상(사오정), 이귀박(허리의 앞과 뒤에 뿔이 난 짐승), 이구룡(두 개의 입을 가진 용), 마화상(말의 형상), 삼살보살(보살상), 천산갑(뒤통수에 뿔이 있는 짐승), 나토두(작은 龍의 얼굴형상)등이 그들인데, 건물의 격에 따라 3, 5, 7, 9, 11의 홀수로 올려진다고 합니다.

 

 

 

 

 

창덕궁에는 천연기념물이 넷이나 되는데, 돈화문 안쪽에 심어진 여덟 그루 회화나무는 그 중 하나입니다. 중국 궁궐 건축의 기준이 되는 <주례(周禮)>에 따라 심은 것이라 하는데, <주례>에는 왕이 삼공(三公)과 고경대부(孤卿大夫) 및 여러 관료와 귀족들을 만나는 장소인 외조 중에서 삼공의 자리에 회화나무를 심어 표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출처 : 창덕궁 홈페이지>

 

 

 

화려한 이층 누각,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 앞으로 갑니다.

 

태종 때인 1412에 처음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이 지금까지 남았습니다. 현존하는 궁궐 정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인데, 웅장한 5칸 규모로 된 유일한 문입니다. 보물 제 38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돈화(敦化)'는 사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대덕돈화(大德敦化)'에서 따온 것으로 '큰 덕으로 백성들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고 있습니다.

 

궁궐의 정문이면서도 창덕궁 서남쪽 모서리에 자리잡은 것이 의아스러운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궁궐 정면에 북악의 매봉 지맥이 이어지는 곳에 종묘가 있어 그곳을 침범하여 문을 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한 정궁인 경복궁과 가까운 곳이기도 하고 대문에서 내당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배치하기 위한 선택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원래 돈화문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날마다 인경(人定)을 울려 정오와 통행 금지 시간임을 알리고, 새벽 파루(罷漏)에는 북을 쳐 통행 금지 해제를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 월대 앞 도로에 갇혀 함몰된 듯한 땅에서 바라본 돈화문

 

 

 

 

 

지금의 돈화문 밖 모습은 옛 모습과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궁궐 등 건물 앞에 돌로 쌓은 널찍한 대를 월대(月臺)라 하는데, 돈화문은 남쪽으로 길게 뻗은 두 단의 월대 위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돈화문 앞으로 도로가 나고, 거기에 거듭 포장되면서 돈화문은 높아진 도로에 갇힌 모습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의 월대는 도로면보다 낮아져 마치 땅에 파묻힌 것을 발굴해 낸 듯 가련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제는 강제병합 직후인 1912년 창덕궁과 종묘 사이 지맥을 끊는 도로를 계획하였으나 순종이 반대하여 건설이 미루어졌는데,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바로 공사가 강행되어 1932년에 도로가 났다고 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맥을 건드리지 않으려 궁궐 정문조차 서쪽 모퉁이에 만들고 인정문 바깥뜰까지 반듯하게 만들지 못했는데 일제가 폭거를 저지른 겁니다. 창덕궁 너머 창경궁은 아예 동물원으로 만들어 버린 일제였지요.

 

또 돈화문 양 옆에 궁궐 문을 지키는 관청인 수문장청(守門將廳)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리고 월대 앞에는 임금이 가마를 탈 때 딛고 올랐던 두 개의 노둣돌과  가마를 올려 놓는 두 개의 목마도 있었다고 합니다.

 

 

↓ 함께 한 사람들. 미인들이 많지요. 찍사인 나는 언제나 빠집니다.

 

 

 

 

창덕궁 서쪽 담장을 따라 남쪽에는 금호문(金虎門), 북쪽에는 경추문(景秋門)이 있는데, 돈화문은 임금의 출입이나 국가의 큰 행사 때 쓰이던 상징적인 문이었으므로 평소에 신하들은 금호문으로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추문은 평소에 닫혀 있다가 군사를 동원할 때에만 쓰였다고 합니다.

 

 

↓ <서울 성곽과 궁궐, 종묘 위치도>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곧장 들어가다 직각으로 방향을 틀며 금천교(錦川橋)라는 다리가 나타납니다.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라는 금천교는 비단(錦)같이 맑은 내(川)가 흐른다 하여 붙은 이름이라고 하는데, 정작 내의 이름은 '禁'천입니다. 이 내를 건너면 지엄한 임금이 계시는 곳이니 궁인들이 얼씬거릴 수 없는 터부의 공간임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두 개의 아치 위에 올려진 난간석이 견고하고 장중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건축학적 가치가 큰 이 다리는 보물 제17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홍예와 홍예 사이를 메꾸는 역삼각형 돌을 '청정무사(蜻蜓武沙)' 또는 '잠자리무사'라 하는데, 도깨비 얼굴이 부조되어 벽사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아래에는 해태상이 보인다. 반대편(북쪽)에는 거북상이 있다.

 

 

 

 

 

 

금천교는 돈화문보다 한 해 이른 1411년에 축조되었습니다. 궁궐 입구에는 풍수지리상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놓았는데, 금천은 나쁜 기운이 건너지 못하게 하여 궁궐을 보호한다는 주술적인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궁궐을 드나드는 관리들이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금천교의 네 모서리에 산예(狻猊)라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석수들이 조각된 것도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리 아래쪽 가운데 교각 남쪽에는 해태상, 북쪽에는 거북상을 배치하여 수호신으로 삼았고,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 쫓는 도깨비 얼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辟邪)의 의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동궐도>를 보면 지금의 금천교가 예전의 모습과 달라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리의 윗면이 반원형으로 무지개다리 형태로 되어 있던 것이 지금은 거의 평평한 모습으로 바뀌었네요. 언제 어떤 연유로 지금처럼 바뀌었는지 어디에도 설명이 없어 아쉽습니다.

 

 

↓ <동궐도> 돈화문과 금천교 부근 풍경

 

 

 

 

 

금천교를 건너면 궁궐로 들어서는 진선문(進善門)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태종과 영조 때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이 와서 북을 울리도록 하였다는 신문고(또는 등문고)가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그야말로 선정(善政)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치 않으나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건물은 일제 통감부 시절인 1908년 탁지부 건축사무소에 의해 인정전 개수공사로 헐려 사라져 버렸는데, 1996년에 복원을 시작하여 1999년에 완공하였습니다. 현판 글씨는 서예가 정도준이 썼다고 합니다.

 

 

 

 

 

돈화문 주변에서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건물은 돈화문과 금호문, 금천교 정도... 진선문과 행랑, 내각과 옥당의 행랑, 어도 등은 모두 1991년 이후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선문을 지나면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의 바깥뜰이 사다리꼴로 길게 펼쳐집니다. 이 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극도로 단순화되고 절제된 공간으로, 정전인 인정전으로 통하는 인정문과 궁궐의 깊숙한 영역으로 통하는 숙장문이 있는 연결 공간입니다. 궁중의 깊은 곳으로 들어서며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게 되는 공간이라고나 할까요...

 

 

인정문 안쪽으로 정전인 인정전 이층 지붕이 보인다.

 

 

 

 

이 곳은 인정전의 바깥 행랑과 더불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어, '인정전 외행랑 뜰'이라고 부릅니다. 마당 모양이 불균형한 사다리꼴을 이룬 까닭은, 돈화문의 위치와 마찬가지로 동쪽 숙장문 바로 뒤에 종묘로 이어지는 지맥을 건드리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입니다.

 

 

대궐 본전인 인정전(仁政殿)으로 들어서는 인정문(仁政門)은 보물 8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인정(仁政)'이란 '어진 정치'를 펼친다는 뜻이니, 조선 군주의 통치 이념을 반영한 이름입니다.

 

 

 

 

 

인정전 외행랑 뜰과 인정전 마당을 연결하는 인정문(仁政門)은 왕이 즉위식을 거행한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임금이 세상을 뜬 후 엿샛날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데, 임금이 나와서 조회하는 궁궐의 으뜸 건물인 정전의 정문에서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례에 따라 이곳 창덕궁 인정문에서 연산군,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순조, 철종, 고종이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인정문(仁政門)을 통해 인정전 마당으로 들어서면 세 단으로 된 월대 위에 서 있는 장중하고도 화려한 이층 누각 인정전(仁政殿)이 보입니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창덕궁 내의 유일한 국보 건물(225호)입니다.

 

 

 

 

 

인정전(仁政殿)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웅장한 중층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아 통칸으로 트여 있어 실제로는 1층 건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인정전은 궁궐의 으뜸되는 건물로 왕실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의식을 치르는 공간이었으므로, 크고 높고 화려하게 지은 것입니다.

 

태종 때인 1405년에 처음 세워졌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10년 중건하였으나, 순조 때인 1803년 다시 소실되어 이듬해에 재건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인정전 지붕 하얀 용마루에는 구한말부터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으로 쓰였던 오얏꽃 문양 다섯 개가 고른 간격으로 늘어서 용마루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양은 원래는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데 언제 어떤 연유로 설치되었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곳 외에도 덕수궁 석조전의 정면과 측면, 창경궁 장서각 등에 이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대한제국은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성씨인 '오얏 리(李)'를 본 따 오얏꽃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인정전의 월대를 오르는 계단 중간에는 답도(踏道)가 있습니다. 뜻풀이로는 '밟는 길'인데, 임금이 이 돌을 밟고 지나는 것이 아니라 가마를 탄 왕이 그 위로 지나가는 길입니다. 평평한 돌에 도드라진 문양, 구름 속을 나는 봉황 한 쌍이 새겨져 있습니다. 인정전은 월대 위에 서 있으며 봉황이 조각되어 천상의 세계로 묘사되는데, 이는 임금의 신성한 권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답도의 문양을 보려고 임금만이 지날 수 있는 답도에 무심코 들어섰다 관리인에게 한 소리 들었습니다. 회색 팻말이 있는 것도 못 보고...

 

 

 

 

 

석수의 표정이 재미있지요.

 

 

 

 

 

내부를 들여다봅니다. 임금의 자리인 어좌(御座), 용상이 있고, 그 뒤로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병풍인 일월오봉도가 있습니다. 어좌 위에는 닫집이 있어 위엄을 더합니다. 천장 한가운데는 봉황 한 쌍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서 담지 못하고 맙니다.

 

 

 

 

 

지금은 쪽마루가 깔려 있지만 인정전 바닥은 원래 진흙으로 구운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1908년 무렵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등을 달고, 서양식 가구를 들이며 유리창문과 커튼 등 서양식 실내 장식이 도입되면서 마루로 바뀌었다 합니다.

 

 

 

 

 

내부를 보고나서 인정전 월대에 서서 넓은 마당을 내려다봅니다. 마당에는 반듯반듯한 박석이 질서정연하게 박혀 있고, 가운데에는 정일품에서 종구품까지의 품계석이 양쪽으로 도열해 있습니다.

 

창덕궁의 정전(政殿)인 이곳은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국가의 중요 행사를 거행했던 공간입니다. 품계석에 맞춰 동쪽에는 문관이, 서쪽에는 무관이 중앙을 향해 도열해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데, 눈 앞에는 일본인 관광객 한 무리만 가득합니다.

 

 

 

 

나무 한 그루까지 사실적으로 그린 <동궐도>를 보면 원래의 박석은 품계석 안쪽 어도는 반듯한 네모진 모양이지만 그 바깥은 일정한 모양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드나드는 이들이 몸가짐을 조심스럽게 갖도록 다듬지 않은 울퉁불퉁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이 박석을 모두 걷어내고 잔디를 깔아 버렸다고 합니다.

 

근래에 복원한 박석은 거의 균일한 네모 모양으로 지나치게 곱게 다듬어져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이지 않나요. 복원을 하면서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해 아쉽게 느껴지네요.

 

 

↓ 동궐도 중 인정전 부분

 

 

 

 

 

동쪽 회랑에서 바라보니 인정전의 모습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입니다. 이제 인정전을 다 보았으니 임금님의 집무실이 있는 동쪽의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정전인 인정전의 동쪽 회랑 바깥에 남향하고 있는 선정전(宣政殿)은 이름 그대로 임금이 정사를 펼치던 편전(便殿), 말하자면 임금님의 일상적인 집무실입니다. 인정전과 같이 의식을 위한 공간이 '정전'이라면, 선정전처럼 일상 업무를 위한 공간은 편전(便殿)이라 합니다.

 

선정문을 들어서면 좁은 뜰이 있고 바로 선정전으로 이어집니다.

 

 

 

 

 

선정전은 정전인 인정전에 비해서는 아주 작은 건물이며 마당도 아주 좁습니다. 다만 지붕은 푸른 유리기와로 되어 있어 위엄을 보이는데, 이 건물은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로 보물 81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선정전 앞쪽으로는 지붕과 기둥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가 있어 인정전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돌출된 전면 복도는 정조 임금이 돌아가신 뒤부터 선정전이 혼전(魂殿)으로 쓰인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선정전은 정조의 혼전으로 쓰인 이래 순조, 헌종, 철종 등 역대 임금의 혼전으로 쓰였고, 그래서 전면에 정자각(丁字閣)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혼전으로 빈번하게 쓰이면서 선정전은 편전의 기능을 잃게 되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이 대신 편전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 선정전 옆모습(위키백과에서 인용). 편전 앞에 복도가 이어져 정자각과 같은 구조를 보인다.

↓ 정조 이후 혼전(魂殿)으로 사용된 흔적인데 이 부분은 근래에 복원된 것이다.

 

 

 

 

 

선정전 내부 모습입니다. 인정전에 비해서 공간이 아주 작습니다. 임금은 일월오악도를 배경으로 중앙에 앉고 그 좌우로 문관과 무관이 자리잡으며 한쪽에는 사관(史官)이 앉아 국사에 대한 모든 논의를 세세히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임금은 여기서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고 학문을 토론하며, 중국과 일본의 사신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왕비나 왕족들과 크고 작은 연회를 열기도 하였답니다.

 

 

 

 

 

선정전 바닥에는 지금은 마루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방전(方專)이라는 네모난 벽돌이 깔려 있었다고 합니다. 언제 마루로 변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의 선정전은 선정전만 원래의 모습으로 남아있고 선정전 앞의 정자각과 선정문, 그리고 선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모두 최근에 복원된 것이라 합니다.

 

 

선정전과 희정당 앞마당은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정원과 함께 시원스레 넓은 마당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러나 원래 이곳에는 궁궐에 필요한 일들을 담당하던 온갖 건물들이 선정전을 겹겹이 에워싼 모습으로 들어서 있었다고 합니다.

 

 

↓ 맨 왼쪽에 푸른 지붕을 한 선정전 일부가 보인다. 정면은 희정당이고 그 뒤로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이 있다.

 

 

 

 

선정전 바로 앞에는 임금을 호위하는 일을 맡은 선전관청(宣傳官廳)과 임금을 모시는 내시가 있던 장방(長房)이 자리 잡고 있는 마당이 동서로 길게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선전관청 바로 아래 마당에는 사관이 머물던 우사(右史)와 당후(堂后)가 있으며, 마당 중간에는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보관하는 문서고(文書庫)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사와 당후가 있는 마당의 바로 남쪽 마당을 중심으로 은대(銀臺)와 상서성(尙書省)이 있었는데 이는 도승지를 비롯하여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일을 담당하던 승정원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그 외에도 승정원의 다락인 육선루,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의 악기를 보관하는 악기고,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임금의 옳고 그름을 아뢸 일이 있을 때 모이던 대청(臺廳) 등이 사방으로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 <동궐도> 일부. 인정전 동쪽에 선정전이 있고 선정전 앞쪽으로 수많은 관청 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그림으로 보면 선정전 앞마당이 복원된 지금보다 훨씬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사, 당후, 은대, 대청이 있는 마당 오른쪽에는 장방, 활과 화살촉을 관장하는 궁방(弓房), 왕의 식사와 궐내 음식 공급 등을 담당하였던 사옹원(司甕院) 또는 주원(廚院), 생선과 채소 공급을 맡았던 공상청(供上廳), 문서 처리와 연락 등 행정 실무를 맡았던 서리방(書吏房),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사무를 보던 정청(政廳), 대은원(戴恩院),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는 등촉방(燈燭房),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임금을 알현하는 것에 관한 일을 맡은 사알방(司謁房), 임금의 식사를 비롯한 궐내의 더운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 궐내의 잡무를 맡았던 내시의 내반원(內班院) 등이 각각 작은 마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기관들이 선정전을 둘러싸고 모인 까닭은 물론 임금의 편의와 관련된 것이지만, 임금의 거처를 여러 겹으로 에워쌈으로써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임금을 보호하는 기능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관청이 있는 전각이 모두 사라지고 빈 마당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일제 36년을 거치며 궁궐이 철저히 훼손된 탓이겠지요.

 

 

 

 

<계 속>

 

 

 

 

※ 창덕궁 안내도

 

 

 

 

 

 

더보기

※ 조선 시대 궁궐의 역사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4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이로써 정궁 경복궁에 이어 이궁 창덕궁인 양궐 체제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그리하여 많은 임금들이 창덕궁에서 거처하면서 함께 거처하는 식구들도 늘게 되었다. 따라서 성종때 이르러서는 세분의 대비를 위해서 창경궁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창경궁은 원래 수강궁(세종대왕이 상왕 아버지 태종을 위해서 지은 곳)이라는 곳에 몇 개의 건물을 더 만들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창경궁은 창덕궁 옆에 위치하여 창덕궁의 부속 역할을 많이 하였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된다. 일 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선조는 창덕궁을 재건하게 된다. 이는 경복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하지 못하다는 판단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리하여 창덕궁은 1610년 광해군때 다시 지어져서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70여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의 역할을 하고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이었으나 그 후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왕이 궁궐을 떠나 잠시 경유하는 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덕수'란 말은 궁궐 자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궁궐에 사는 고종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1907년 일본의 압력에 의해 타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덕수궁이다).

광해군은 즉위한 후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그리고 그 앞쪽 지금의 새문안길 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대에 바뀐 이름이다)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 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고 인조가 왕이 된다. 인조는 광해군 대에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도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후기 내내 지속되었다.

조선 후기의 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 초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와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고종 대에 왕이 궁궐을 옮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894년 국내에서는 농민전쟁이 일어나고 대외적으로는 이를 핑계삼아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달도 못 되어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이른바 갑오경장을 실시하게 하는 등 계속 우리나라에 압력을 가하였다. 고종과 그 비인 명성왕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마우라의 지휘 아래 일본 군인, 자객들을 동원해 경복궁에서 명성왕후를 살해한다. 이를 을미사변(1896년)이라 한다.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보려 고종은 같은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이로써 정궁인 경복궁이나 이궁인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1년만에 궁궐로 돌아온다(1897년). 그러나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경운궁이라고 칭하고 그곳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경복궁에서 왕비가 일본인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았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곳을 택한 것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다(1897년).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1905년-1906년에 대부분의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한편 경희궁은 광해군때 지어진 뒤 여러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일제의 강점으로 뜯겨나가고 헐리고 해서 그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으며 오직 궁궐지의 기록에 의해서 찾아볼 수 밖에 없다.

일제 강점기 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다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 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초대가 되는 셈이다.

-<창덕궁 홈페이지 http://www.cd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