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합천 황계폭포에서 남명과 문무자의 발자취를 만나다

모산재 2010. 10. 12. 15:12

 

까마득히 칼 능선을 이루는 산세와 아늑하게 넓은 황매평전을 바라보며 동료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황매평전에 여러 갈래의 큰길이 나고 포크레인으로 파헤쳐 인공 시설을 만드는 걸 보면서 심란해짐을 어쩔 수 없다. 나라가 온통 삽질공화국이 되니 이 멋진 심심산골의 고원까지도 인공 조림과 시설물로 채우지 못해 안달이다.

 

 

 

황매산을 본 다음 황계폭포로 가기로 한다. 꽤 훌륭한 폭포이지만 지역 내에서만 알려져 있을 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차황에서 하금으로 난 새 도로를 따라 합천호 곁을 지난다. 합천호를 보지 않은 사람들인지라 몹시 궁금해 하는데, 사실 합천호만큼 흉물은 없어 보여 주기가 민망하다.

 

주변 산들이 사질 땅이어선지 합천호는 좀처럼 물이 가득찬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 물이 빠진 경계면은 언제나 벌건 맨땅을 드러내고 있어 보기에도 흉하다.

 

 

합천호가 생기기 전 봉산에서 대병, 대병에서 용주로 흘러내리는 황강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강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으리라. 들판이 거의 없는 계곡에 바위를 돌아 여울이 되고 소(沼)가 되어 굽이치는 황강. 출렁다리로 강을 건너는 풍경이 멋지고, 물가 바위에서 낚시꾼들이 은빛 비늘 반짝이는 은어떼를 낚아채는 풍경이 넉넉했던 황강. 아마도 합천호가 생기지 않았으면 황강은 전국적인 레저 명소가 되었을 것이다.

 

 

 

합천댐을 지나 금성산과 악견산 허굴산 사이에 자리잡은 삼산(三山)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며 지나자마자 갑자기 길은 가파른 산길이 되어 꼬불꼬불 내려선다. 고원의 들판을 지나 다시 산이 되어 내려서는 풍경은 신기한 것이다. 울진의 불영계곡이나 지리산의 구룡계곡이 그러한 것처럼...

 

 

아슬아슬한 고갯길을 다 내려서면서 길은 곧게 이어진다. 대병면의 고원 들판에서 용주면의 낮은 들판으로 내려 선 것이다.

 

그곳에 황계폭포로 가는 샛길이 나타난다. 주차장이 없으니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워두고 걸어 들어간다.

 

 

 

폭포에서 내려오는 개울길을 따라 200여 미터쯤 가면 내를 막아 만든 작은 보와 산 사이의 아늑한 숲길이 이어진다. 폭포까지는 500m쯤, 걸어 10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시원해야 할 폭포 계곡이 너무 더워서 놀란다. 합천댐이 생긴 이래로 합천은 일기예보의 초고온 지역과 최저온 지역의 단골 고장이 되어버렸다. 고여 있는 합천호는 열 저장고가 되었고, 합천댐 아래 강물이 말라버린 넓은 백사장은 어마어마한 복사열을 만드는 제조기가 되어 버린 탓이다.

 

 

 

숲길을 지나면 길목에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 김녕 김씨 후손들이 황계폭포 입구에 세운 '자연정(紫煙亭)'이란 이름의 정자다. 폭포 입구의 황계마을은 현재 김녕김씨를 중심으로 50여 호가 사는 마을이다.

 

 

 

 

'자연(紫煙)'은 '붉은 안개(내)'를 이름이니, 이 정자 이름의 내력은 이백의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의 첫구 일조향로생자연(日照香爐生紫煙)'에서 따온 것이리라.

 

 

이백의 시를 보자.

 

 

日照香爐生紫烟(일조향로생자연)     해가 향로봉을 비추니 자줏빛 안개 일어나고
遙看瀑布掛前川(요간폭포괘전천)     멀리 폭포를 바라보니 냇물을 걸어 놓은 듯하네.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나는 듯 흘러 곧장 삼천 척을 떨어지니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지.

☞ 시의 제 2행 '遙看瀑布掛長川'으로 쓴 것이 많은데, '遙看瀑布掛前川'이 맞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선비들은 황계폭포를 즐겨 여산폭포에 비유했다고 한다. 평지의 작은 폭포인 황계폭포가 어찌 웅장한 오로봉(1,358m)에 150m 높이를 자랑하는 3단 폭포인 여산폭포에 댈 수 있을까마는, 황계폭포가 주는 감흥조차 어찌 폭포의 규모에 갇힐 수 있었겠는가.

 

 

자연정 바로 곁에는 황계폭포를 노래한 남명 조식 선생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는 '황계폭포(黃溪瀑布)' 2수 중의 두번째 시이다.

 

 

 

 

懸河一束瀉牛津     달아맨 듯 한 줄기 물이 은하수처럼 쏟아지니
走石飜成萬斛珉      구르던 돌이 만 섬 옥으로 변하였다네.
物議明朝無已迫      내일 아침엔 사람들 논의 그리 각박하진 않으리
貪於水石又於人      물과 돌 탐내고서 사람까지 탐낸다고 해서.

 

 

이백의 '망여산폭포' 시가 절로 연상되는 작품이다.

 

남명 선생은 삼가 외토리에 태어나고 살았는데(지금은 생가터와 그가 제자들을 양성하던 뇌룡정이 남아 있다) 제자들과 같이 종종 황계폭포를 찾았다고 한다. 남명은 황계폭포를 노래한 시를 4수나 남기고 있는데, '황계폭포'시 2수와 '유황계증김경부(遊黃溪贈金敬夫)'시 2수가 바로 그것이다. 

 

 

 

자연정을 지나 한 굽이 돌아들면 이내 계곡을 울리는 폭포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금방 넓은 소(沼) 위에 펼쳐지는 2단 폭포, 황계폭포의 장관이 나타난다.

 

 

 

 

 

그런데 폭포의 모습보다 '위험', '수영금지'라는 경고문을 만국기처럼 단 풍경이 먼저 눈에 띄어 정신을 사납게 한다. 물이 깊어 워낙 익사 사고가 잦은 곳이라 심정은 이해되지만, 폭포를 온통 무당집처럼 원색의 경고문으로 둘러 놓은 것은 눈살 찌푸려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합천이 자랑하는 합천 8경 중 제 7경으로 꼽히는 경승지를 저렇게 '무대뽀' 식 경고문으로 도배를 해야 했을까. 합천군 관리들의 둔감한 문화 감각이 안타깝다.(※ 합천 8경 : 가야산, 해인사, 홍류동계곡, 함벽루, 황계폭포, 매화산(남산 제일봉), 황매산 모산재, 합천호와 백리 벚꽃길)

 

 

 

황계폭포는 삼산 중 가장 높고 큰 허굴산(682m)에서 발원한 물이 삼산 들판을 지나 20여 미터 높이의 절벽 위에서 떨어지면서 생긴 폭포이다.

 

폭포는 2단으로 되어 있다. 위쪽의 폭포는 벼랑으로 낙하하는 직폭(直瀑)이라면, 아래쪽의 폭포는 20m 정도의 높이로 바위 절벽의 비스듬한 경사면을 타고 흐르는 와폭(臥瀑)이다.

 

 

 

 

 

 

비가 많았던 올여름이지만 이곳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았던 모양, 폭포의 물줄기가 많이 가늘다. 계곡에는 물때가 끼어 있고 나뭇가지 등 쓰레기들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닌다. 수량이 많으면 환상적인 모습을 보이련만 가뭄이 아쉽다.

 

아래쪽 소 주변 공터에는 물놀이 익사사고를 막기 위해 여러 개의 확성기를 달아 놓았다.

 

 

 

 

 

아래쪽의 와폭을 지나 직폭으로 올라서면 비로소 폭포다운 폭포를 보게 된다.

 

그리 큰 폭포는 아니지만 폭포 주변의 암반이 워낙 육중하고 물줄기 위쪽의 절벽이 지붕처럼 튀어 나와 있어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위의 폭포는 12m 정도의 높이로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허공으로 쏟아 붓듯 떨어진다. 폭포 아래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서도 될 정도로 벼랑이 안쪽으로 깊이 패어 있다.

 

 

 

 

 

보기에는 그렇게 깊어 보이지 않은데, 폭포 밑 소는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가도 닿지 않을 정도로 깊으며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럼에도 해마다 익사 사고가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물의 깊이가 결코 만만치는 않은 모양이다.

 

 

 

 

 

 

폭포의 오른쪽 절벽 위에는 음각된 '황계비폭(黃溪飛瀑)'라는 글씨가 보인다. '황(黃)'이라는 글자가 마모되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리고 한쪽 벽에는 이렇게 다녀간 흔적을 남긴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황계폭포를 찾은 선비 중에는 남명 선생 외에도 박지원과 함께 한문 단편을 많이 남긴 문무자 이옥(文無子 李鈺, 1760~1812) 선생도 있다.

 

 

그가 남긴 '관폭기(觀瀑記)'라는 글은 황계폭포를 돌아본 여행기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완역 이옥 전집>에서 본 글의 한 부분을 소개해 본다.

 

 

이옥 선생은 이른봄에 날씨가 무척 화창하여 사람들이 한번 가서 놀자고 권하는 이가 많아 음력 이월 초 이튿날, 그러니까 3월 초쯤 되는 봄날에 12명의 동료와 함께 '감떡 40개와 청어 50마리'를 싸 들고 황계폭포를 향해 길을 떠났던 모양이다. 고개를 넘고 시내를 건너고, 마을을 지나면 술을 사먹고 주막에서 밥을 사 먹으며 드디어 폭포에 도착한다.

폭포에 도착해 보니 큰 바위가 우뚝 솟아 병풍처럼 둘렸는데, 높이가 십여 길 정도나 되고 폭포가 바위 위에서 날아 내린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폭포가 거쳐 오는 길에 옛날에는 돌부리가 있어 마치 기름장수가 기름을 쏟아붓는 것 같았다. 폭포 물이 멀리 날아가 더욱 기이하였는데 주민들이 감사와 고을 원이 놀러오는 것을 괴롭게 여겨 그것을 쪼아 무너뜨렸다."고 한다. 지금도 쫀 흔적과 다녀간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 슬프다 벼슬아치가 명승지에 누를 끼치는 것이 많다.

폭포 옆에 있는 펑퍼짐한 돌 위에 앉아서 사람을 마을에 보내 술을 사 오게 하여 마셨다. 마른 고기와 곶감으로 안주하며 서로 바라보며 즐거웠다.

 

 

폭포의 원래 모습이 지금과는 달랐음을 알 수 있고, 권력을 가진 관리들의 민폐가 자심했음을 알 수 있다.

 

 

문무자 이옥은 시속의 변화나 개인의 서정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소품(小品) 글로 이름난 문인이었는데, '괴이한 문체'라는 이유로 1792년 정조에 의한 문체반정의 첫 직격탄을 맞고 사룩문(四六文) 50수를 지어야 하는 벌을 받고 충청도 청양과 경상도 삼가현(三嘉縣, 지금의 합천군 삼가면)으로 유배되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황계폭포를 찾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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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무자(文無子) 이옥(李鈺, 1760~1812)에 대하여

 

이단적인 문학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 한문단편에서는 박지원과 맞먹는 경지에 이르고, 민요시 개척에서는 정약용과 함께 가장 앞선 성과를 보여주어 한문학 혁신의 2가지 방향을 주도했다.

정조의 문체반정에 따르지 않았다. 동문 강이천(姜彛天))이 "붓 끝에 혀가 달렸다"고 평할 만큼 자기식의 글쓰기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특히 40살을 넘어가는 네 달 동안은 유배지의 토속과 세상물정과 속담과 같은 지방문화에 세밀한 보고의 글들을 많이 남겼다.

실록(實錄)에는 이때 그가 소설 문체를 써서 선비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으므로 정조가 문체를 개혁한 뒤 과거를 보게 했다고 나와 있다. 정조는 "성균관의 시험 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에 관련되는 답이 있으면 전편이 주옥같을지라도 하고(下考)로 처리하고, 이어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해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 조금도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고  할 정도로  글쓰기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을 하였다. 빼어난 재능에도 미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문무자는 끝내 불온한 문체를 이유로 과거를 통과하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과거에서도 문체를 고치지 못하자 그는 영남 삼가현(三嘉縣)에 이적(移籍)되었으며, 뒤에도 같은 문제로 다시 삼가현에 머물러야 했다.

그 뒤로는 본가(本家)가 있는 경기도 남양에서 저작 활동에 힘썼다. 그는 유기론(唯氣論)의 사고체계를 갖고 가치의 원천을 이(理)가 아닌 기에서 찾았다. 그래서 성현의 도리나 고문(古文)의 규범을 벗어나 현실을 직접 경험하고 인식해야 진실에 이른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겪은 바를 그대로 나타내면 고전적인 명문(名文)과 겨룰 만한 새로운 문학이 이룩될 수 있다고 했다.

 

 

 

 

황계폭포 구경을 마치고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합천 읍내로 향한다.

 

고향이라 노모가 계시는 집에서 하룻밤을 유했으면 좋으련만, 몸이 그리 편하지 않은 어머니께 부담이 클 것 같아 용기를 내지 못한다. 북적대는 오리고기집에서 저녁을 먹고 황강 가에 자리잡은 '일해공원'으로 바람을 쐬러 나선다.

 

밤인데도 숨막히는 더위는 한풀 꺾임이 없다. 합천댐 덕(?)을 합천 읍민들이 톡톡히 보는 게 아닌가 싶다.

 

 

3.1 독립운동 기념탑 앞에 '일해공원'이라 새긴 표석을 보는 기분이 참 얄궂다. 함께 걷는 동료들 앞에서 민망해진다. 언제부턴가 합천은 부끄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민주주의를 압살한 학살자를 기리는 공원을 만드는 이 어처구니 없는 고을이 내 고향이라고 누구에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합천의 자랑스런 역사까지도 부끄럽게 만드는 '일해'공원이라는 이름. 3.1운동 기념탑이 민망해 하는 듯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섰다.

 

 

 

 

 

 

다수 합천군민의 의사에 반하여 '일해'라는 공원 명칭을 붙여 두고두고 합천을 욕되게 만든 '심의조 전 합천군수와 당시의 군의원'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 황계폭포를 노래한 남명의 다른 시들

 

 

합천은 남명의 숨결이 유난히 많이 배인 곳이다. 그가 살았던 삼가 외토리에는 지금도 그가 제자들을 양성했던 뇌룡정이 남아 있고, 합천 팔경의 하나인 함벽루나 해인사 홍류동 계곡, 용주의 황계폭포에도 그의 발자취는 남아 있다. 남명 선생의 '황계폭포(黃溪瀑布)' 두 수 중 첫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投璧還爲壑所羞(투벽환위학소수)     구슬을 던지는 것이 도리어 골짝에 부끄럽네,
石傳糜玉不曾留(석전미옥부증류)     암벽에 전하는 싸라기 구슬 머물러 있지도 않으니.
溪神謾事龍王欲(계신만사용왕욕)     계곡의 신은 일에 게으르나 용왕이 하고자 하여,
朝作明珠許盡輸(조작명주허진수)     아침에 만든 명월주를 다 싣고 가도록 허락한다네.

 

 

남명은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제자들과 이곳을 찾아, 제자 김경부에게 주는 시 '유황계증김경부(遊黃溪贈金敬夫)' 2수를 남겼다.

老夫頭面已霜乾(노부두면이상건)     늙은이 머리 이미 서리가 말랐는데
木葉黃時上得山(목엽황시상득산)     나뭇잎 물들었을 때 산에 올랐네.
雙栢有枝柯幹好(쌍백유지가간호)     두 그루 잣나무의 가지와 줄기 좋으니
莫言庭際秀芝蘭(막언정제수지란)     뜰에 지초와 난초 빼어났다고 말하지 말게나.
莫恨秋容淡更疏(막한추용담갱소)     가을 정경 조촐하다 한스러워 마라.
一春留意未全除(일춘류의미전제)     봄이 남긴 뜻 아직 모두 가시지는 않았어라.
天香滿地薰生鼻(천향만지훈생비)     하늘의 향기 땅에 가득차 그 향기 코끝에 생겨나
十月黃花錦不如(십월황화금불여)     시월의 국화꽃에는 비단도 비기지 못할 것이리라.

 

이 시는 황계폭포에서 놀면서 제자인 경부 김우굉(金宇宏:1524-1590)에게 준 시이다. 김우굉은 남명과 퇴계의 문인으로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보우의 주살을 상소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 그 밖의 다른 작품들

 

백사장과 강물이 아득하게 펼쳐진 합천 황강가의 그림 같은 정자 함벽루에는 다음과 같은 남명의 시구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喪非南郭子(상비남곽자)     남곽자 같이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해도
江水渺無知(강수묘무지)     흐르는 강물 아득하여 끝을 모르겠도다.
欲學浮雲事(욕학부운사)     얽매임 없는 뜬구름을 배우고자 하여도
高風猶破之(고풍유파지)     가을바람 불어와서 흩어버리는구나.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남곽자가 책상에 기대앉아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쉬며 멍하니 있는데, 마치 그 배필을 잃은 것 같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열자의 친구 남곽자는 아무 것도 보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듣지 않았고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으며 정신조차 있지 않은 것 같았다고 하는데, 열자는 이를 완전함의 최고 단계라 하였다.

 

어지러운 시대에 남명은 어떤 것에도 구애됨이 없이 순수한 몰입을 통해 의연히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는 남명이 두류산(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자신의 마음을 노래한 다음 시에서도 볼 수 있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천석들이 커다란 종을 보시게.
非大㧄無聲(비대검무성)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나도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될까.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고 서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