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아름다운 황매산, 천혜의 황매평전에 인공 수목원이라니...

모산재 2010. 10. 11. 21:30

 

지리산에서 구룡계곡을 돌아본 뒤에 애타게 황매산을 보고 싶어하는 조 선생의 뜻에 따라 합천으로 향한다.

 

 

 

한여름의 산이 생각만큼 매력을 보여 줄 수 있을까 괜히 마음이 쓰이는데, 산청 차황을 지나 멀리 우뚝 솟은 황매산이 나타나고 그 품 아래 다랑이논 속에 그림처럼 앉은 신촌과 만암마을을 건너다 보면서 모두들 감탄사를 연발한다.

 

고향을 다녀오는 귀경길에 내 고향 반대편인 이곳을 호기심으로 몇 번 지나갔을 뿐이지만, 내 눈에도 이곳의 풍광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보기 힘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외할머니의 친정이자 어머니의 외가가 있는 마을이어서 더욱 정감이 가는데, 황매산의 남서쪽 천황재를 넘어서야 갈 수 있는 이 마을을 이곳 사람들은 '마느물'이라고 불렀다.

 

이삼십 년 전만 하여도 오지 중에서도 오지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황매산 개발 바람과 함께 환경부 '자연생태 우수마을'과 농촌진흥청 '장수마을'로 수차례 선정되기도 하는 등 오히려 유명세를 타는 마을이 되었다.

 

차를 세우고 마을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마을을 지나 곡선을 그린 다랑이논이 계단을 이룬 언덕을 거슬러 오르며 콘크리트 길은 황매산을 향해 꼬불꼬불 이어진다. 길은 곧장 황매산 베틀봉 아래에 있는 '단적비연수'의 영화 세트장, 영화주제공원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거기에 넓은 주자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능선까지는 '갈지(之)'자로 이어지는 임도로 걸어서 올라야 한다. 길가 수풀에는 가을을 알리는 풀꽃들이 군데군데 피었다.

 

 

 

↓ 갈퀴나물

 

 

 

 

 

임도를 따라 몇 분 걷다보면 눈 아래에 영화 세트장, '은행나무침대'의 속편인 '단적비연수'(2,000년)의 촬영장이 환하게 펼쳐진다.

 

 

 

 

'단적비연수'는 남녀간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 판타지적 설화를 바탕으로 최진실, 설경구, 이미숙, 김윤진 등이 주연한 영화다. 영화가 끝난 뒤 산청군은 영화에 쓰였던 31채의 원시부족 가옥을 복원하고, 10여 개의 풍차와 은행나무 고목, 대장간, 봉화대, 풍차, 칼, 활, 벽화 등 1,000여 점의 소품과 영화관련 자료들을 모아 이곳에 국내 최초의 영화주제공원을 만들었다.

 

 

 

 

'단적비연수'는 그렇게 대중들에게는 쉽게 잊혀져 간 영화이지만, 이 영화 주제공원으로 오히려 화려하게 부활한 듯 황매산을 찾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마도 1천m에 가까운 고산 초지와 어울린 세트장의 원시적 풍광이 영화보다도 더 많은 상상력을 도발하기 때문 아닐까...

 

이 세트장은 이후 '천군, MBC 드라마 '주몽'과 태왕사신기, KBS 드라마 '바람의 나라' 등의 촬영 장소로 활용되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야 어쨌든 황매산은 각종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MBC 드라마 '주몽'에서 해모수가 거처하던 곳이 바로 이 황매평원이었고, '태극기 휘날리며'의 주 촬영지이기도 했다. KBS 드라마에서는 '전우'에 이어 '자유인 이회영'도 이곳에서 촬영을 마쳤다고 한다.

 

 

 

 

보기엔 허름한 세트장이지만 애초 이 영화 세트장 조성에 총 40여 억 원(산청군 10억 원, 영화사 30억 원)이나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훼손된 세트장 리모델링에 2억여 원이나 들었고 시설물 정비와 관리인 인건비로 매년 6천 600만 원의 지출이 있다고 한다. 황매산을 찾는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볼거리가 있어서 좋은 일이지만, 가난한 지자체가 감당하기에 버겁지 않을까 괜스레 걱정된다.

'단적비연수'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기획하고 45억 원이라는 당시로선 최고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흥행에도 비교적 성공했지만, "유치하고 어색한 판타지", "극장에서 잠든 유일한 영화" 등 혹평을 받았다. "비극적 운명을 강요하는 신에 맞서 싸우는 '적'의 캐릭터와 구도가 신선하고 박진감이 있다."는 평도 없진 않았지만...

 

 

↓ 술패랭이

 

 

 

 

↓ 선이질풀

 

 

 

 

↓ 마타리꽃

 

 

 

 

 

능선 위에는 예전에 없었던 전각, 성문의 형태로 보이는 건물이 하나 생겼다.

 

 

 

 

 

↓ 꽃을 피운 마

 

 

 

 

 

다가서 보니, 성문의 형태로 지었지만 전망대로 쓰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전망대로 올라서자 서늘한 고산 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온다.

 

 

↓ 남서쪽 능선

 

 

 

 

 

 

능선은 합천군 가회면(오른쪽 사면)과 산청군 차황면(왼쪽 사면)의 경계를 이루는데, 산청군에서 능선을 따라 '산청군'이라고 새긴 깃발을 세워 놓았다. 저런 깃발이 왜 필요할까...

 

 

 

 

 

시원스런 전망과 아늑하고 평온한 초지 능선의 풍경에 동료들은 대만족을 표한다.

 

더 왼쪽 끝 살짝 보이는 정상까지 올랐으면 좋으련만, 한사코 산을 오르는 것을 겁내니 그것이 아쉽다.

 

 

 

 

 

능선을 넘어서자 황매평전이 펼쳐진다.

 

아마도 KBS 드라마 '전우'를 촬영하고 있는지 대형 텐트가 여럿 설영되어 있고, 배낭을 멘 군인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풍경이 예전의 풍경이 아니다. 아름다운 초지 평원에는 커다란 도로가 여러 갈래로 나 있고 가로수를 심어 놓았다. 

 

 

 

 

무슨 야외 극장을 만드는지 반원형의 마당이 조성되었다. 멀리 능선의 비탈면은 초지를 파헤치고 밭고랑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산허리를 파헤치고 있는 굴착기가 눈에 들어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에 합천군이 2010년 신규사업으로 '황매산 수목원 조성사업'을 하기로 하였다고 산림청의 심사를 확정 받았다고 한다. 보도된 사업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전국 유일무이한 초지를 숲으로 복원하는 사업으로 타 지역 수목원과는 차별화되는 표고 1,000m의 산 정상부 구릉지역
▶ 황매산 정상일원 면적 96ha에 사업비 60억이 투입하여 2010년부터 2013년까지 4년간에 걸쳐 조성되며
▶ 주요사업으로는 자생초화류, 암석원, 계곡림, 열매원, 고유침유수림, 양치식물원, 산림습원, 산책로, 관리사무소, 산림연구실인 온실 등 다양한 테마를 소재로 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숲을 조성한다.

 

 

황매평전은 습지와 너덜지대 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어서 그 자체로 다양한 생물군들이 어우러진 온전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을 밀어버리고 인위적으로 식재한 수목원을 만들겠다니... 게다가 산림청의 심사를 받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몇 해 전 추석 때의 황매산 모습. 자연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황매산보다 더 아름다운 황매산은 없다.

 

 

 

 

 

 

천혜의 자연인 황매산을 개발하려는 이유를 합천군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황매산 군립공원은 모산재와 함께 전국의 등산객이 즐겨 찾고 있으며, 매년 5월이면 철쭉 군락 장관을 즐기기 위해 매년 60만여 명의 탐방객이 찾고 있는 천혜의 관광명소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탐방객이 늘어나는 추세에 2013년 수목원 조성사업 끝나고 황매산 군립공원을 연접해서 가로지르는 함양↔울산 간 고속도로가 완공되는 2015년도에는, 200만 명 이상의 탐방객이 황매산을 찾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어 전국의 새로운 명소가 될 것이다.

 

 

결국 관광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황매평전을 인위적인 수목원을 포함하는 공원으로 바꾸겠다는 뜻이다.

 

 

 

가을이면 귀하디 귀한 물매화와 앉은좁쌀풀이 풀섶에 숨어서 피고 있다. 이곳을 포크레인으로 파내고 산림습원, 산책로, 관리사무소, 온실 등을 만들어서 "다양한 테마를 소재로 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숲을 조성한다."고?

 

그런데 이미 도로를 넓히고 주차장을 만들면서 물매화, 앉은좁쌀풀 등 희귀 풀꽃들이 자생하던 곳도 모두 까뭉개지고 포장되고 말았다. 해마다 가을 만나던 이들 여린 풀꽃들의 서식지가 자동차들이 차지하고 콘크리트 마당으로 변한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 참으로 고통스럽다.

 

 

 

↓ 작년 추석 때 만났던 황매평전의 물매화

 

 

 

 

 

↓ 3년 전 추석에 만났던 앉은좁쌀풀

 

 

 

 

 

비록 수십 년 전 한 개인의 탐욕으로 울창한 수림이 있던 이곳이 파괴되어 목장을 위한 초지로 변했을지라도 황매평전은 또다시 자연 그 자체의 강인한 복원력으로 또다른 모습의 초지 생태계를 상당히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오히려 그런 곳을 철쭉제 관광사업을 위해 지나치게 산철쭉만 식재하며 초지 생태계를 파괴한 것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가을에 능선의 사면에 흐드러지게 피는 쑥부쟁이와 구절초, 용담, 억새의 절경도 봄의 철쭉에 못지 않은데, 지금 이 아름다운 풍경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이 황매산을 왜 찾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자연이 펼쳐진 황매평전은 지리산 세석평전보다도 더 아름답다. 황매평전은 전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희귀한 고산 초지평원이거늘, 그 초지를 밀어내고 전국 어디를 가도 흔하고 흔한 인공적인 수목원과 시설물들이 들어선다면 누가 황매산을 찾고 싶을까.

 

굳이 수목원을 조성하려면 생태계의 보고인 이 황매평전이 아니라, 생태계를 그대로 살릴 수 있는 다른 지역을 선정하는 것이 황매평전도 살리고 수목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도 더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아름다운 황매산, 천혜의 자연 공원 황매평전에 인공 수목원이라니! 자연 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황매산보다 더 아름다운 황매산은 없다. 내 고향 황매산을 제발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두라. 황매평전에 제발 도시의 공원을 옮겨 놓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