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함양 (4) 화림동계곡의 선비 문화, 군자정 · 영귀정 · 거연정

모산재 2010. 10. 4. 19:48

 

동호정을 뒤로 하고 금천을 끼고 벋어 있는 국도를 거슬러 2km가량 더 오르면 또 하나의 멋진 경치가 펼쳐진다. '새들(鳳田)'이라 부르는 마을 앞 계곡에는 거연정, 군자정, 영귀정이라는 정자들이 소리를 지르면 들릴 만한 거리에 흩어져 있다.

 

 

숲이 우거진 개울 너머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살짝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화림계곡 탐방 안내도를 보니, 황암사라는 사당에서부터 람천정, 경모정을 거쳐 영귀정, 거연정에 이르는 계곡 언덕길을 따라 탐방로가 만들어져 있다. 바쁘지 않게 탐방로를 따라 걸어 봤으면 좋으련만 8명이나 되는 동행들을 설득하기가 어디 쉽겠는가...

 

 

 

 

 

↓ 화림동 계곡 탐방 안내도

 

 

 

 

 

동호정을 떠날 때 후두둑 듣기 시작하던 비가 제법 젖을 만큼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쓰고 길 아래로 내려서니 강가의 너럭바위 위에 쪼그리고 앉은 듯 자그마한 정자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 온다.

 

 

 

 

 

● 일두 정여창을 기념하여 세운 군자정(君子亭)

 

 

화림계곡에서 가장 작은 정자, 군자정(君子亭)은 화려한 단청을 자랑하는 동호정과는 달리 나뭇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기둥과 난간 등 모두 목재인 건물 부재가 오랜 비바람에 풍화되어 모두 까맣게 탔다.

 

 

정자 마루와 계단에는 울긋불긋 원색의 옷을 입은 동네 주민들이 자리하고 있어 고색창연한 정자와 부조화스런 풍경을 이루고 있다.

 

 

 

 

 

암반 위에 주춧돌 없이 세운 중층 누각 건물인 군자정은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지만 칸 사이의 간격은 두팔로 벋으면 닿고도 남을 만큼 좁다. 동호정처럼 아래층 기둥은 울퉁불퉁한 재목을 그대로 대강 다듬어 세웠고, 위층의 네 기둥 바깥쪽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원래 마루는 우물마루였으나 후에 장마루로 교체되었다.

 

 

군자정은 1802년 정선 전씨 입향조인 화림재 전시서 공의 5대손인 전세걸, 전세택이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 일두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는데 이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으나 내용을 알 수 없다. 

 

정여창 선생은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5현이라 불리는 분이다. 군자정이 있는 새들(봉전)은 정여창 선생의 처가가 있던 마을로, 선생이 현재 군자정이 세워진 유영대에 자주 들렀다 한다.

 

 

군자정의 천장. 대들보, 중들보, 중도리 등이 정교하게 짜여져 지붕을 받치고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전세걸 찬으로 '주부자 군자정시(朱夫子君子亭詩)'를 새긴 현판이 정자에 걸려 있다. 초서로 쓴 글 알아보기 쉬지 않은데, 군자정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관련 있는 듯하다.

 

倚杖臨寒水    지팡이를 짚고 차갑게 흐르는 물가에서
披襟立晩風     옷깃을 풀어헤치고 서서 저녁 바람을 맞네.
相逢數君子     서로 만난 여러 군자들이
爲我說濂翁     나를 위해 염옹에 대해 설하네.

 

 

염옹(濂翁)은 연꽃을 군자에 비유한 '애련설(愛蓮說)'을 쓴 이로 <태극도설>, <주자전서> 등을 써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송나라의 사상가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 1017년~1073년)를 가리킨다.

 

 

 

군자정 바로 아래쪽에는 음식점이 있는데, 넓게 들어선 그늘막과 그 속에서 식도락을 즐기며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풍경을 정자와 함께 바라보는 것이 그리 편치 않다. 정자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자연 친화의 영귀정(永歸亭)

 

 

군자정 건너편 바위 절벽을 끼고 푸른 담소를 이룬 남계천이 흐른다. 바위절벽에는 '영귀대(永歸臺)'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 위로 정자가 보인다. 영귀정(永歸亭)이라는 정자다.

 

이 땅에는 '영귀정(詠歸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흔해 경북에만 둘이나 있을 정도... 이언적이 세운 경주 양동마을의 영귀정이 그 하나이고, 유성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가 세운 의성 서변리의 영귀정이 그 둘이다. 그리고 울진 금매리에도 영귀정 터가 남아 있으니 조선시대 영귀정은 인기 있는 정자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정자의 이름이 '영귀(詠歸)'가 된 것은 아마도 <논어 > '선진(先進)'편의 다음과 같이 유명한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자로, 증점, 염유, 공서화 등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의 포부를 물었을 때 모두 정치적 경륜을 펼치겠다고 답하는데 유독 증점(증자의 아버지)만이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늦은 봄철에 봄옷을 갈아입고 5∼6인의 어른과 6∼7인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고 싶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者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에 공자는 오여점야(吾與點也, 나는 증점과 같다)" 라고 답하였다.

 

 

 

 

 

영귀대 왼쪽, 밝게 빛나는 건물은 최근에 새로 지은 부속정자이고,

 

 

 

 

오른쪽 숲속에 가려져 있는 정자가 바로 영귀정이다. 팔각 정자이다.

 

 

 

 

거연정 앞을 가로지르는 봉전교에서 내려다본 영귀정

 

 

 

 

 

시간에 쫓기지 않으면 탐방로를 통해 둘어 보았으면 좋으련만 생략하고 거연정으로 발길을 돌린다.

 

 

 

 

 

● 선비의 처세를 생각하게 하는 거연정(居然亭)

 

 

군자정에서 100여 미터를 올라가면 금천을 가로지르는 다리, 봉전교(鳳田橋)가 나타난다. 봉전교를 건너다 내의 위쪽을 바라보면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정자가 나타난다. 바로 거연정(居然亭) 이다.

 

내 가운데에는 커다란 여러 바윗돌이 한 덩어리가 되어 섬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2층 정자가 세워졌고 짙푸른 물 위로는 철제 무지개다리가 걸려 있다. 그리고 정자 앞 바위 틈에는 몇 그루의 소나무가 지키고 섰다.

 

 

 

 

전재학의 '거연정기'에 "영남의 빼어난 경치는 삼동(심진동, 원학동, 화림동 등 덕유산 남쪽에 형성된 세 고을)이 최고가 되고, 삼동의 경승은 화림동이 최고가 되나니, 화림동의 경승은 이 아름다운 곳에 세운 이 정자를 최고라 할 것인 바"라 기록하고 있듯, 금천 내 가운데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는 거연정의 아름다움은 최고라 할 만하다.

 

 

 

 

 

그런데, 정자의 이름 '거연(居然)'은 무슨 뜻을 가진 것일까.

 

한자 사전에는 '거연'의 뜻을 '슬그머니. 쉽사리' 등으로 풀이해 놓았다. 오늘날 중국어에서도 이 말은 사용되고 있는데, 그 뜻은 '뜻밖에. 생각 밖에. 의외로'등이니 앞의 의미와는 많이 다른다. 그런데 거연정의 '거연(居然)'이 이런 속된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닐 터...

 

그 의미는 '거연정기'에서 비춰지고 있는데, 잠시 뒤에 살펴보기로 하자.

 

 

 

 

 

거연정은 맨 처음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 선생이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지을 때 그 곁에 억새를 엮어 만든 정자였다고 한다.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고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대원군의 철폐령으로 서원은 철폐되었고, 이에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정자를 다시 지었다고 한다. 1901년에 중수하였다.

 

 

 

 

 

거연정으로 건너는 길은 이 무지개 다리가 유일하다. 무지개다리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로 향하는 이 다리를 '화림교(花林橋)'라 하고 흐르는 물을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의 '방화수류천(訪花隨柳川)이라 부르며, 여덟 개의 못과 여덟 개의 정자가 있다고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 불렀다.

 

 

 

 

 

 

↓ 거연정 편액과 판벽으로 방을 둔 내부 모습

 

 

 

 

 

구한말 최고의 유학자라 일컬어지는 은진(恩津)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선생의 현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얼핏 보기에 한자가 비슷해서 '송병준'으로 읽히기 십상인데, 송병선 선생은 조선인 창씨개명 제1호인 매국노 송병준(宋秉畯)과 똑 같이 송시열의 9대손이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삶의 궤적은 정반대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송병선은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 현량(賢良)을 뽑아 쓸 것, 기강을 세울 것 등의 십조봉사(十條封事)를 올린다. 이어서 을사늑약에 대한 반대운동을 계속 전개하려고 하였으나 경무사 윤철규에게 속아서 납치되어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으로 강제 이송된다.

그해 음력 12월 30일 국권 피탈에 통분하여 을사오적의 처형,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로써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다. 선생이 자결하자 시비로 있던 공임(恭任)이 따라서 자결하여 세간에서 의비(義婢)라고 기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무주 설천면에는 서벽정(棲碧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선생이 낙향하여 머물며 영·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고,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송병선 선생의 흔적은 영호남의 산과 물이 있는 곳곳에 발견되고 있다.

 

 

↓ 거연정의 현판들

 

 

 

 

 

'거연'의 의미를 전재학의 '거연정기(居然亭記)'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서산사(西山祠)의 옛터 서쪽 물 위의 반석에 정자를 짓고 편액을 써서 '거연(居然)'이라 한 것은 주자의 시 '거연천석(居然泉石)'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그 천석의 아름다움과 운림(雲林)의 화려함은 이 정자에 이르는 사람들마다 보고 감상할 것이요, 또한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은 기암괴석이나 숲이 없는 다만 아름다운 곳의 유람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샘물과 바위와 함께 거처한다'라는 '거연천석(居然泉石)'의 참뜻을 이 글로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이 말의 의미를 찾다가 결국 <주역>에까지 이른다.

 

 

 

 

음이 자라고 양이 사그라드니 군자는 피하고 숨는(숨을 둔=遯) 때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늘은 군자요 산은 소인인데 소인은 욕심 때문에 자리를 떠나지 못하지만 군자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괘 속에 "居然泉石 不踏紅塵 嘉遯生涯 意味陳陳"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자연(샘과 돌)에 거처하며 세속(홍진)을 밟지 않으니 아름답게 물러나는 생애의 의미가 진진하다."로 풀이되는 말이다.

 

'거연(居然)'은 선비와 군자가 어떻게 처세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 주는 말이다.

 

 

 

 

비는 여전히 가늘게 내리고 있는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지 풍경이 어두워지고 있다. 화림동계곡을 벗어나야 할 시간.

 

여행 계획이 없는 우리, 어디로 가야 할까. 조 선생이 내 고향에 있는 황매산으로 가길 원하는데, 나는 지리산 구룡계곡을 꼭 가보고 싶어진다. 결국 내 의견을 좇아 일단 지리산 입구 인월로 향한다. 올봄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을 때 인월에서 먹었던 돼지갈비가 생각이 나서 그 집으로 일행을 자랑스럽게 모셨는데 어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후회막급이다.

 

모텔도 바가지 요금이어서 근처 산장여관으로 숙소를 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방 안에서 맥주 잔을 돌리며 여행 첫날의 회포를 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