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함양 (3) 화림동 계곡, 농월정과 동호정

모산재 2010. 10. 2. 16:17

 

함양 상림을 구경한 다음 화림동계곡(花林洞溪谷)의 정자들을 둘러보기로 한다. 

 

 

 

안의면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는 26번 국도를 달리다보면 멀리 황석산(1,190m)과 기백산(1,331m)이 우뚝 솟아 있다. 영남과 호남을 가르며 소백산맥의 줄기를 형성하는 이들 산자락 속에 농월정으로 유명한 화림동계곡과 용추폭포로 유명한 용추계곡이 숨어 있다.

 

 

 

용추계곡, 화림동계곡, 거창의 원학동계곡을 합쳐 화림 삼동(三洞)이라고 부르는데, 특히 황석산의 화림동계곡은 영남 정자의 진수를 보여 주는 계곡이다.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비단 같은 물결, 금천(錦川)이 흘러내리면서 멋진 너럭바위와 담과 소를 만들며 계곡 곳곳에 세워진 정자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수만 년을 흘러내린 금천의 맑은 물살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너럭바위들! 그 너럭바위는 때로는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쉼터가 되었다가 움푹 패어서는 소를 이루고 끊어진 듯 깎인 곳에서는 작은 폭포를 이룬다. 너럭바위를 감돌아 흐르는 시냇물은 수정처럼 맑은데 손과 발을 담그면 온 몸의 세포를 일깨우는 듯한 청량한 기운에 감전된다.

 

 

 

 

 

● 농월정(弄月亭)

 

 

↓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농월정의 옛 모습(출처 : 무주군청 홈페이지)

 

 

 

 

 

화림동 계곡의 아래쪽에 자리잡은 농월정(弄月亭)은 화림동 계곡 최고 정자였지만, 2003년 가을 불터 버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이 고장 출신 지족당 박명부(知足堂 朴明榑, 1571~1639) 선생이 예조참판으로 재임 중 병자호란을 만나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게 되자 척화파였던 그는 1637년 고향 함양으로 돌아와 은거하면서 '농월정'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몇 차례 중건을 거쳐 1899년 완성된 이 정자는 물에 잠겨도 썩지 않는 밤나무로 12지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소나무 우거진 숲을 등지고 달이 비치는 작은 웅덩이 '월연(月淵)'을 안고 있는 너럭바위 월연암을 굽어보고 있었다던 농월정, 옥처럼 맑은 물이 굽이치고 흘러내리는 청량한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에 휘영청 뜬 달과 월연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술잔에 뜬 달을 마시는 풍류를 즐길 수 있었던 곳! 이름 그대로 음풍농월로 유유자적하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잘 나타내 주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농월정'이나 '월연' 등의 이름에는 단순히 음풍농월의 의미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속에는 어두운 시대 현실 속에 밝은 달과 같은 정신이 되고 싶었던 박명부의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장복추의 농월정 중건기'에 잘 나타나 있다.

 

 

 

 

연못 위의 밝은 달은 무진장(無盡藏)이라 가져도 다 함이 없으니 읊고 희롱함을 게을리 하지 않으리니 아! 달이 사람인가 사람이 달인가! 저 바다 밑에서 나오는 기상을 완연히 보고 천심(天心)에 이르니 맑은 의미를 얻었을 것이다.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선비 노중련(魯仲連)이 무도한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한다면 "동해로 걸어 들어가 죽겠다(連有踏東海而死耳)"고 맹세하였다고 하는데, 후세에 이태백은 이런 노중련을 기려 "바다 속에서 밝은 달이 되어 떠올라 하루 아침에 광명을 열었네(明月出海底 一朝開光輝)"라고 노래하였다고 한다. 진나라와 연나라를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뒤 모든 상을 물리치고 은사(隱士)의 삶을 살았던 노중련은 무도한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선비정신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 중건기는 노중련을 기린 이태백의 시를 떠올리게 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달'은 바로 박명부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것임을 알 만하다.

 

 

 

농월정 앞 바위에는 '지족당 장구지소(知足堂 杖銶之所)' 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를 짚고 거닐던 곳' 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제 농월정은 볼 수 없다. 2003년 추석 무렵 누군가의 방화로 농월정은 불타 사라지고 주춧돌만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 동호정(東湖亭)

 

 

농월정에서 3km 정도 더 올라가면 서하면 황산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앞을 흐르는 금천을 굽어보며 동호정(東湖亭)이 자리잡고 있다.

 

 

 

흘러내리던 금천이 잠시 머뭇거리며 푸른 담소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마당처럼 넓고 아늑한 너럭바위 섬이 앉았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등에 업고 의주에서 신의주까지 피란하였던 동호 장만리(章萬里)를 기리기 위하여 1895년 건립한 정자라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2층 누각의 팔작지붕 건물로 화림동계곡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정자이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81호로 지정되었다.

 

 

 

 

동호정을 지탱하는 1층 기둥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를 그대로 건조하여 사용하였으며,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통나무를 도끼로 찍어내서 투박하게 만들었다.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 등 영남지방의 서원 누각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이다.

 

정자의 2층 마루는 원래는 우물마루였으나 지금은 장마루가 깔려 있다.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멀대로 받쳐 팔작지붕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다. 지붕을 떠 받치는 서까래가 2중으로 된 겹처마 형식이다. 지붕을 보수하면서 서까래를 새 재목으로 바꾸어 놓은 탓으로 일부에만 단청이 남아 있어 묘한 느낌을 준다.

 

 

들보와 도리, 주포의 화려한 단청이 눈길을 끈다. 일반 정자에서 보기 쉽지 않은 화려한 단청, 다양한 형상의 문양들이 보인다.

 

 

 

 

대들보 위를 가로지르는 중도리는 청룡과 황룡이 마주보고 있는 형상으로 새겼는데, 청룡은 여의주를 황룡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이 재미 있다. 대들보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마주보고 으르렁거리고 있다. 황룡 청룡 위로는 각각 두 마리의 원앙(?)이 등진 모습을 새긴 중보를 얹어 놓았다.

 

그 외에도 대들보와 중보, 도리와 중도리, 처마도리, 주포 등에는 각양 각색의 꽃무늬와 다른 문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 전국의 어느 정자가 이처럼 화려한 단청을 가졌을까...!

 

 

 

 

 

 

동호정(東湖亭) 앞 푸른 담소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 물을 '옥녀담(玉女潭)'이라 한다. 그리고 옥녀담을 가두듯 물 가운데에 마당처럼 펼쳐진 넓은 너럭바위를 '차일암(遮日巖)'이라고 부른다. 계곡 가운데 펼쳐져 햇살에 노출된 바위인건만 '해를 가린 바위'라니 무슨 듯일까... 아마도 물 건너 숲 때문에 생긴 이름이 아닐까 싶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풍경이 아름답다.

 

 

 

 

 

 

↓ 차일암에서 바라본 동호정 풍경

 

 

 

 

 

동호정 바위 위에 새겨진 웅덩이들

 

 

 

 

 

 

 

너럭바위 위에는 시가를 읊조리고 노래하는 곳이라고 해서 '영가대(詠歌臺)', 거문고와 피리를 부는 바위라 해서 '금적암(琴笛岩)' 등으로 명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 차일암 아래쪽에서 바라본 동호정 풍경

 

 

 

 

 

 

 

 

차일암 너럭바위 위에 앉아서 풍광을 즐겼으니 시 한 수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조선 중기의 문신 박장원(朴長遠:1612~71)의 시문집 <구당집(久堂集)>에 실려 있는 '유차일암(遊遮日巖)'이라는 5언율시를 소개해 본다. 번역된 것이 없어 내 맘대로 풀이한 것이니 헤아려서 보시기를...

 

 

遊遮日巖(유차일암) 차일암에서 노닐다

信美花林洞(신미화림동)     참으로 아름다운 화림동을
殘春忽此行(잔춘홀차행)     지는 봄에 문득 이렇게 찾았네.
山風琴自響(산풍금자향)     산바람에 거문고 소리 절로 울리니
溪鷺句還成(계로구환성)     골짜기의 해오라기가 날아와 시구를 이루네.
冷石能醒酒(냉석능성주)     차가운 바위는 술을 깨게 하고
淸流可濯纓(청류가탁영)     맑은 물은 갓끈을 씻을 만하다.
歸時有餘興(귀시유여흥)     돌아갈 무렵에 여흥이 이는데
落日聽簫聲(낙일청소성)     저무는 해에 퉁소 소리 들리는구나.

 

 

박장원은 암행어사로 명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암행어사 박문수'로 유명해진 박문수의 증조부이다. 그의 약력에는 함양 땅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 차일암을 언제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월정 월연암을 노래한 '유월연암시동행(遊月淵巖示同行)'이란 시도 함께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