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함양 (2) 아름다운 함양 상림(上林), 역사인물공원 유감

모산재 2010. 9. 29. 23:22

 

점심 식사를 마치고 함양읍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상림(上林) 으로 향한다. 상림은 함양읍 서쪽을 흐르는 위천(渭川)강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인공숲이다.

 

 

상림은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 선생이 지금의 함양 땅인 천령군 태수로 있을 때 조성되었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위천이 함양읍 중앙을 흐르고 있어 홍수의 피해가 극심하였다고 하는데, 최치원 선생이 둑을 쌓아 강물을 지금의 위치로 돌리고 그 둑을 따라 나무를 심어서 지금까지 이어오는 숲을 조성하였다. 길이 약 1.6km에 너비는 80~200m, 넓이는 6만여 평 규모다.

 

강기슭과 하천 부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강둑에 조성한 숲을 '호안림(護岸林)'이라 한다. 함양 상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멋진 호안림이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라고 불렀으나 이 숲의 가운데 부분이 홍수로 무너짐에 따라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상림만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상림 뒤쪽으로는 대규모 연꽃 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흥취를 더한다. 연꽃밭의 남쪽에서는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사운정(思雲亭) 부근에서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상림의 안쪽에서 접근했는데,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사운정(思雲亭)이라는 정자이다. 더위를 피해 찾은 주민들이 정자에 올라 앉아서 휴식을 즐기고 있다.

 

1906년에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정자로 처음에는 '모현정(慕賢亭)'이라 부르다가 '사운정(思雲亭)'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운(雲)'은 '고운(孤雲)'을 뜻하는 것으로 '사운정'은 곧 '고운 선생을 그리워하는 정자'라는 뜻이겠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 사운정(思雲亭)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은 12살 때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6년만인 18세 되던 해에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중국에서 관리로 일하다가 황소의 난을 만나 종사관으로 수행하며 '토황소격문'을 써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이 때 쓴 글들이 <계원필경>으로 엮어졌다. 28살 때(885년) 신라로 돌아온다.

 

894년 골품제의 모순과 국정 문란 등을 해결 하기 위하여 진성여왕께 시무10조를 올려 아찬이란 벼슬에 올랐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포부가 뜻대로 펼쳐지지 않는 시대를 한탄하며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逍遙自放)하며 지낸다. 그 사이 전북 태인과 정읍, 충남의 서산을 거쳐 천령군(지금의 함양군)태수를 지내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지냈는데, 이 때의 심경을 잘 나타낸 '재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란 시가 유명하다.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첩첩 바윗돌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를 울리니
人語難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지척의 사람들 말소리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常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故敎流水盡籠山 (고교류수진롱산)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그의 자가 '고운(孤雲)'이었던 것처럼 그의 만년의 삶은 그야말로 '외로운 구름'이었던 것 같다.

 

 

 

사운정 뒤쪽에는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文昌侯 崔先生 神道碑)가 서 있다.

 

 

 

 

신도비(神道碑)란 죽은 이의 평생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을 가리킨다. 신도(神道)는 묘 앞에서 입구까지 낸 길을 말하는데,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의 벼슬아치의 무덤 남동쪽으로 난 신도의 입구에 신도비를 세운다.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천령군(지금의 함양군) 태수로 부임하여 뇌계(위천수)의 홍수로 농토와 가옥이 유실됨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물을 돌려 숲을 조성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1923년에 경주최씨 문중에서 세운 비다. 최치원 선생이 손수 지리산과 백운산에서 활엽수를 캐어다가 방풍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문창후'는 고려시대인 1023년에 내려진 시호이다.)

 

 

 

 

천 년을 훨씬 뛰어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숲인지라 한낮인데도 상림 숲길은 컴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성하게 우거졌다. 신록이 돋아나는 숲길은 얼마나 싱그러울까, 단풍이 흐드러진 가을 숲길은 또 얼마나 환상적인 빛깔일까, 잎새가 진 겨울 숲길은 또 얼마나 한적한 풍경일까 싶다.

 

 

 

숲길을 따라 거닐고 있거나 돗자리를 깔고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가족과 연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숲길을 걷다가 뜻밖에도 가는장구채 하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고산에 가까운 계곡에서나 보던 꽃을 이런 평지의 숲에서 만나니 신기하다.

 

 

 

 

 

확인해 보니 상림에는 120여 종의 풀과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주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개서어나무, 갈참나무, 느릅나무 등을 비롯하여 91속 116종류의 초목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 나무는 54속 70종이고 풀은 37속 46종류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숲이 우거지다 보니 버섯도 가지가지로 흔하게 자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상림은 가장 역사가 오래된 인공 자연학습장이라 할 수 있겠다.

 

 

 

 

상림의 한쪽으로는 자연스럽게 물길도 내어 놓아서 숲의 습기를 알맞춤하게 조절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상림 숲에는 뱀이나 개미 같은 벌레가 전혀 없다고 한다. 숲 한쪽으로는 연꽃을 심은 대단위 늪지이고 또 한쪽은 위천이라는 내가 흐르는데, 이렇게 무성하게 우거진 숲속에는 뱀이나 개미 같은 벌레가 없다는 말이 의아스럽기만 하다.

 

 

어쨌거나 효성이 지극했던 최치원 선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뱀을 보고 놀란 어머니를 위해서 최치원이 주문을 왼 다음부터 뱀이 사라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위천이 바라보이는 숲 한쪽 탁 트인 공간에는 '새천년 역사인물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함양군은 상림과 인접한 이곳에 2001년 역사인물공원을 조성, 최치원 등의 흉상을 설치하면서 상림 내에 산재해 있던 역대 군수 등의 비석을 역사인물공원으로 옮겼다.

 

 

예로부터 '좌안동 우함양'이라 불릴 정도로 영남을 대표하는 선비의 고장인 함양 땅에는 이름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인물들을 기려 조상을 세웠는데, 인물 공원의 중심에는 최치원 상이 자리잡고 있고 그 양쪽으로 조선시대 이후의 선비 상들이 도열해 있다.

 

 

 

 

 

새천년 '역사인물공원기'에는 새로운 천년을 열어가는 기념 사업으로 최치원(崔致遠), 김종직(金宗直), 유호인(兪好仁), 정여창(鄭汝昌) 등 열한 분의 발자취를 밝히고 그 얼을 계승하고자 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역사인물공원기(歷史人物公園記)

 

 

 

 

지리산과 덕유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숭고한 사상과 고귀한 정신으로 다벌골에 빛을 발한 선현들을 영원히 기리고자 고운선생의 애민정신이 깃든 이곳 상림에 흉상(胸像)을 세워 만민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옛 부터 우리 함양은 좌 안동 우 함양이라 불리어온 영남의 대표적 선비고장으로 역사를 통하여 훌륭한 인물이 수 없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 열한 분 최치원(崔致遠), 조승숙(趙承肅), 김종직(金宗直), 양관(梁灌),유호인(兪好仁), 정여창(鄭汝昌), 노진(盧桭), 강익(姜翼), 박지원(朴趾源), 이병헌(李柄憲), 문태서(文泰瑞) 등을 이곳에 모셔 그분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밝혀 그 얼을 계승코자 새로운 천년을 열어가는 기념사업으로 역사인물공원을 조성하였다.

이곳에 모신 분들은 해외에 국위를 떨치고 깊은 학문을 쌓은 인물과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고 고고한 선비정신을 실천한 인물, 새로운 학문이나 기술을 연구보급하여 나라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 효제충의(孝悌忠義)로 존경을 받은 인물, 혁신적 사상가로서 새로운 사상과 문화의 꽃을 피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이 고장에 헌신봉사함으로써 후손들의 사기진작과 긍지를 갖게 한 인물들이다. 나라와 고을을 지키고 빛낸 선현들의 고귀한 얼과 기백을 이어받아 그분들의 생활과 선비정신을 배우고 익혀서 혜안(慧眼)을 열어 나라의 기둥이 되고 빼어난 선조들의 후손으로서 보람된 삶을 누리고자 함이로다. 서기2001년 11월

 

 

↓ 고운 최치원 상

 

 

 

 

↓ 점필재 김종직 상

 

 

 

 

김종직(1431~1492)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영남학파의 종조이다. 문하생으로는 정여창 ·긴굉필 ·김일손 ·유호인 ·남효온 등이 있다.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그가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죽은 후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 뇌계 유호인 상

 

 

 

 

유호인(1445~1494) 선생은 김종직에게 사사한 조선 전기의 문인이다.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시 ·문 ·서에 뛰어나 당대 3절(絶)이라 불리었고, 성종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으며 당시 4대 학파 중 사림파에 속하였다.

 

 

↓ 일두 정여창 상

 

 

정여창(1450~1504) 선생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리학의 대가로서 경사에 통달하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주로 하였다. 1504년 죽은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되었다.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 <진수잡저(進修雜著)> 등의 저서가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태워 없애 그 유집(遺集) 일부가 정구(鄭逑)의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 속에 전할 뿐이다.

 

 

 

 

연암 박지원 상

 

 

홍대용·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하였다.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랴오둥·러허(熱河)·베이징 등지를 여행하고 쓴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통하여 청나라의 문물을 소개하고 당시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비판과 개혁을 논하였다. 특히 자유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허생전>, <양반전>, <호질> 등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 당시의 양반계층 타락상을 고발하고 근대 지향하는 새로운 인간상을 창조함으로써 많은 파문과 영향을 끼쳤다.

 

 

 

 

 

 

목숨도 지푸라기처럼 여겼던 강직한 영남 사림의 전통을 이어온 고장 함양. 함양만은 아니겠으나 오늘날 영남의 문화 속에서 이런 자랑스런 조상들의 정신을 이어받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으니 다만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역사인물 공원 내에는 이곳에서 사또를 지낸 이들의 송덕비와 선정비들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이렇게 늘어서 있다. 나도 모르게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탐관오리들의 수탈로 점철된 조선 후기, 백성들은 먹고살 길이 없어서 도적이 되고 견딜 수 없어 민란이 끊임이 없었던 시기에 이곳 사또들만 유난히 백성들을 사랑하고 선정을 펼쳐 백성들로부터 저렇게 많은 송덕을 받았단 말인가...?

 

 

 

 

 

미심쩍은 마음에 자료를 찾아보다가, 그럼 그렇지...! 이 비석들 속에 탐관오리로 악명을 떨친 조병갑(趙秉甲) 선정비가 있었다.

 

비석의 이름이 가관이다. '군수 조병갑 청덕(淸德) 선정비(善政碑)'! '악덕(惡德)'도 모자랄 판에 '청덕(淸德)'이다. '폭정'이 아니라 '선정'이다. 조병갑이 누구인가. 전라북도 고부군수로 백성들을 탄압하고 착취하여 동학농민운동(1894년)을 유발시킨 장본인 아닌가. 만석보(萬石洑)를 증축하며 강제 노역시키고 임금도 주지 않고, 수세(水稅)를 징수 착복하였으며, 무고한 사람에게 죄목을 씌워 재산을 착취하는 한편, 태인군수를 지낸 부친의 비각을 세운다고 금품(1000냥)을 강제징수하는 등 온갖 폭정을 자행한 인물이 바로 조병갑이다.

 

이런 조병갑이란 인물의 선정비가 이 역사인물공원 안에 버젓이 서 있었으니, 개결한 선비정신을 자랑해야 할 공원이 탐욕의 권력을 자랑하는 공원이 될 수밖에! 그런데 3년 전인 2007년에 조병갑의 이 비석 대형 해머로 파손된 채로 발견되었다. 31기의 비석 가운데 11기의 지붕돌이 함께 바닥에 떨어진 모습으로...

 

조병갑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고 한다.

 

"조선말 조병갑 군수는 유민을 편케 하고 창고를 헐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엄했기에 그 사심 없는 선정을 기려 고종 24년(1887년) 비를 세웠다."

 

'선정비'라는 것이 어떤 존재인지 알 만한 것이다.

 

 

 

함양군이 '역사인물공원'의 참뜻을 살리고자 한다면, 옥석을 가려 선정비라는 낯 간지러운 비석들은 이 장소가 아닌 공간에 따로 모아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송덕비와 선정비가 그 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밝힌 안내판과 함께.

 

 

 

 

공원 한쪽에는 의병 권석도(權錫燾) 장군 동상이 서 있다.

 

 

 

 

합천군 대병 출신인 그는 함양에서 성장하였는데 을사늑약 뒤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우다 검거되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광복 5개월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고향인 합천군 대병면 장단에는 그의 공적비가 있다.

 

 

 

 

공원의 변두리에는 박지원의 한문소설 중의 하나인 <열녀함양박씨전>의 실제 모델인 밀양박씨의 정려비가 서 있어서 눈길을 끈다.

 

 

 

 

 

 

<열녀 함양박씨전>은 연암이 57세로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 남편의 삼년상을 치른 뒤에 자결한 한 여성의 죽음에 느낀 바가 있어서 지었다고 한다.

 

 

먼저 소설의 서문에서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와 '개가한 자손은 정직(正職)에 임명하지 않는다.'는 국전(國典)으로 말미암아 벼슬과 무관한 서민사회에서까지도 개가하지 않는 풍조가 하나의 습속이 되어 수절 과부가 지나치게 많고 여자들의 수절을 강요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본문의 내용은 연암이 직접 경험하였던 순절(殉節)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대대로 아전을 지낸 하찮은 집안의 딸로 태어난 박씨는 19세에 함양의 아전에게 시집 갔으나 그가 본디 병이 있어 성례한 지 반 년이 못 되어 죽고 만다. 박씨는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른 뒤 며느리의 도를 다하여 시부모를 모시다가 남편의 대상날에 약을 먹고 자살한다.

 

 

작품의 일종의 열녀전 형식으로 씌어졌지만, 서술 시각은 남편을 따라 죽은 함양 박씨의 열행을 칭송하기보다는 순절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가득하다. 여성을 남성과 대등하게 보고자 했던 연암의 의식은 <광문자전>이나 <허생전>, 그리고 <양반전>과 <민옹전>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 밀양박씨 정려비

 

 

 

 

 

 

 

 

 

※ 상림 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