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구천동 제1경 나제통문, 김환태 문학 기념비

모산재 2010. 9. 27. 17:57

 

8월 8일, 7명의 시커먼 남자들끼리 2박 3일 여름여행을 출발한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여행은 목적지가 없다. 그냥 남도지방으로만 정하고 가다가 누군가 가고싶어 하는 곳이 있으면 두말하지 않고 그곳을 찾는다.

 

누가 함양 상림을 보고 싶다고 하여 대진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또 누가 나제통문(羅濟通門)을 못 가봤다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 무주 IC를 나와 설천면 나제통문을 찾는다. 확인해보니 나제통문은 민주지산에 지근거리에 있으니 영남 땅과 가까운 곳이다.

 

 

 

▼ 나제통문과 그 주변 지도(다음 지도 검색)

 

 

 

 

 

 

● 구천동 제1경, 나제통문

 

나제통문은 무주 구천동 33경 중 제1경이다. 가늘고 길게 뻗은 석모산 산줄기 암벽을 뚫어서 만든 통문은 설천면 두길리 신두(新斗)마을과 소천리 이남(伊南)마을을 이어주고 있다. 통문의 높이는 5~6m 너비는 4~5m, 길이 30~40m 이다.

 

설천은 신라와 백제의 국경 지대로 한반도 남부의 동서문화가 교류되던 관문이었다. 통문 동쪽은 본래 신라 땅이었던 무풍현(茂豊縣), 서쪽은 백제 땅이었던 주계현(朱溪縣)이었는데, 조선시대에 합쳐서 무주현(茂朱縣)이라 하였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동서 두 지역의 언어와 풍습이 차이를 보인다고 하며, 설천 장날에 가보면 무주와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말씨가 다르다고 한다.

나제통문 왼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며 석모산이 솟아올라 있다. 나제통문이 있는 자리는 산줄기가 가장 가늘게 이어진 부분이다.

 

 

↓ 나제통문 휴게소

 

 

 

 

 

↓ 구천동 33경 중 제1경인 나제통문 안내판. 안내판을 장식한 대장승 표정이 재미 있다.

 

 

 

 

 

↓ 통문 앞에는 힘차게 굽이치며 흘러내리는 내를 건너는 운천교라는 다리가 놓여 있다.

 

 

 

 

 

 

↓ 통문의 길이는 30m 정도로 짧다.

 

 

 

 

 

조 선생이 터널 위 바위를 가리키는데 보니, 붉은 글씨로 새겨진 글귀가 있다. 저 낭떠러지에 누가 글을 새겼을까.

 

어렴풋이 보이는 구절을 읽어보니 '파주임풍(把酒臨風)', 북송의 문인이자 개혁가인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들어 있는 한 구절을 따 놓은 것이다.

 

 

 

 

 

그 구절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登斯樓也則 有心曠神怡 寵辱俱忘      이 누각(악양루)에 오르면 마음이 넓어지고 정신이 흐뭇해져 영욕을 모두 잊혀지고,
把酒臨風 其喜洋洋者矣                    술잔을 들고 바람을 맞으니 그 기쁨이 바다처럼 아득하여 끝이 없구나!

 

 

친구인 등자경이 파릉군(巴陵郡)의 태수로 좌천되어 온 이듬 해 악양루를 중수하였는데, 이 때 범중엄을 초빙하고 글을 부탁하여 나온 글이 '악양루기'이다. '악양루기'의 다음 시구는 천하의 명구로서 많은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先天下之憂而憂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고

後天下之樂而樂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포부를 물었을 때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대에서 바람을 쐬고 싶다)" 고 답한  증점(증자의 아버지)의  "浴乎沂 風乎舞雩"이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저 가파른 바위에까지 글을 새긴 풍류 선비가 누굴까 자못 궁금해진다. 그리고 정말 저 위에 올라 '술잔 들고 바람을 쐬'었으면 그만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느냐.

 

 

 

 

 

그런데 나제통문이 옛 신라와 백제의 관문라는 그간의 설이 전혀 사실 무근이라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통문은 삼국시대 때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인근 금광에서 금을 실어내고 농산물과 임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뚫었다는 설이 제기된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역사의 현장으로 교과서에까지 오르기도 했던 '나제통문'이라는 이름은 거두어져야 할 것인데, 아직도 논란이 확실하게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 운천교 아래를 흐르는 내. 덕유산(1594m)에서 흘러내린 구천계곡이 석모산을 끼고 북쪽으로 흐른다.

 

 

 

 

 

어쨌거나 이 자리가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던 국경지대인 것은 사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나제통문 앞을 흘러내리는 원당천 계곡은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 곳 깊은 물에는 '파리소'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시신의 핏물이 고여 파리가 들끓어서 유래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 김환태 문학 기념비

 

 

나제통문 앞 삼거리는 공원처럼 꾸며져 있는데, 거기에는 무주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보통학교 4년을 다닌 일제시대의 탐미주의 문예비평가 눌인 김환태(訥人 金煥泰, 1909~1944) 문학기념비가 섰다.

 

그의 고향은 이곳 무주로,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소학교를 다니다 13세에 전주고보에 입학하고 이듬해 서울 보성고보로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제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김환태는 인상주의 비평과 탐미주의 비평을 옹호한 비평가이다.

 

1934년 <문예비평가의 태도에 대하여>를 발표한 뒤, 잇달아 <예술의 순수성> <나의 비평태도> 등을 발표하여 순수문학을 적극 옹호하고 카프의 공리주의 문학을 배격하였다. <정지용론> <시인 김상용론> 등을 통해 예술파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는 한편, 이태준 ·김동리 ·최명익의 작품에 새로운 문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등 순수 문학정신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평론활동을 폈다.

 

한때 이광수의 소개로 안창호를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했고 시문학파와 구인회의 동인들도 사귀었다. 카프( KAPF)의 정치적·공리적 문학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구인회에 평론가로서는 유일하게 참가했다.

 

 

 

 

 

아놀드와 월터 페이터 이론의 영향을 받아 "대상을 실재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는 인상주의 비평을 주장했다. 이 비평 태도는 칸트의 미학사상인 '무목적의 합목적성'에 연결되는 것으로, 창작정신은 비평정신보다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비평이 창작을 지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단지 창작의 미적 효과를 찾아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여 '창작적 힘의 우위설 또는 비평적 힘의 열등성'으로 정식화했다. 이는 비평의 지도성·이념성·목적성 등을 내세운 카프에 대한 반박이자 배격의 선언이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많은 문예시평에 그대로 나타났고, 유진오와 김동리의 '세대론(世代論)'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순수시비(純粹是非)>를 발표하여 순수문학을 주장하는 김동리를 옹호하였다.

 

 

 

 

 

 

 

● 순국 의병장 강무경 부부 사적비

 

 

김환태 문학기념비 옆에는 의병장 강무경(姜武景) 동상이 서 있다.

 

호남 지역 의병장 강무경, 양방매 부부 의병의 공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강씨 문중에서 건립한 사적비이다.

 

 

 

 

 

1907년 군대 해산 뒤 심남일(沈南一)을 통수로 하고 전군장(前軍將)이 되어 전라남도 일대에서 크게 활약했다. 자세한 약력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필묵상(筆墨商)을 경영했다고 한다.

 

1907년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을 해산시키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이때 같은 지방 사람인 심남일이 의병을 일으키자는 통문(通文)을 보내자 의형제를 맺고, 김율(金聿)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1907년 김율이 죽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1908년 3월부터 10월에 걸쳐 강진 오치동,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두, 영암 사촌, 나주 반치, 능주 돌정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듬해 봄부터 작전과 전술을 바꾸어 낮에는 산 속에서 전투준비를 하고 남평(南平)·영암·보성 등지에서 일본군을 야습,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7월 장성 동치(洞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자, 순종이 내린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서 부대를 해산했다. 그뒤 봉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8월 26일에 심남일과 함께 체포되어 12월 광주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뒤, 32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