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실상사 극락전, 증각대사응료탑과 탑비, 수철화상능가보월탑과 탑비

모산재 2010. 5. 12. 13:30

 

2010년 4월 24일, 오후

 

 

 

담장을 벗어나 산기슭 방향으로 걷다보면 연꽃이 자라는 연못 너머로 담장에 둘러싸인 극락전이 나타난다. 담장 밖에 따로 다시 담장을 두르고 세워진 절집이 워낙 외딴 곳에 치우쳐 있어 그 존재를 알지 못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솔숲을 이룬 야트막한 언덕을 배경으로 연못 곁에 흙돌담장을 두른 절집 풍경은 고향집처럼 정겹다. 봄기운 가득 받아 뜰과 나무에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들이 싱그럽다.

 

 

 

 

 

일주문 형태를 가진 문으로 들어서면 극락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마당에는 요사채를 지을 것인지 목수들이 목재를 다듬고 있다.

 

 

 

 

 

극락전은 원래 이름은 홍척국사와 수철화상의 부도가 있어 부도전(浮屠殿)이었으나, 요사채를 수리한 뒤 부도전(扶道殿)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832년(순조 32)에 극락전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원래 건물은 정유재란 때 불타고 1831년에 중건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종 때 함양 출신의 양재묵과 산청 출신의 민동혁이란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실상사에 불을 놓아 건물들을 태웠고, 후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하였다.

 

 

극락전 요사채는 1932년에 영원사(靈源寺)에서 옮겨 세운 것으로, 지리산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셨는데, 좌우에 있던 목조보살상은 몇 년 전에 분실하였다고 한다. 

 

 

 

 

 

■ 증각대사 응료탑(보물 제38호)과 탑비(보물 39호)

 

 

극락전 바깥 앞뜰에는 거북돌 하나가 연못을 향해 엎드려 있다. 보물 39호인 증각대사 응료탑비(凝蓼塔碑)인데 비몸돌이 사라지고 거북받침돌(귀부)과 머릿돌(이수)만이 남아있다. 비의 주인공은 실상사를 세운 고승 증각대사이다.

 

흔히 귀부는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만 이것은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표현하였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 귀부는 용의 머리가 아닌 거북의 머리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 극락전 바로 문 앞에 자리잡고 있다.

 

 

 

 

증각대사의 사리를 모신 묘탑인 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극락전 옆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 문화재청 자료

 

 

이 묘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으로 8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각 면의 조각들은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에 새긴 삼중의 연꽃잎은 또렷하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門)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보물 33호)

 

 

극락전 담장 바깥 서쪽에는 증각국사 사리탑과 많이 닮은 탑비가 있는데,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이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묘 이름을 능가보월탑(楞伽寶月塔)이라 내리었다고 한다.

 

탑은 팔각원당(八角圓堂)을 기본형으로 삼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부도탑으로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높이는 3m로 특히 옥개석에서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각하였으며, 탑신부 각 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양각되어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살짝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지붕돌 윗부분은 모두 없어졌다.

 

 

 

■ 실상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보물 34호)

 

 

탑비의 높이는 2.9m이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 받침돌이 거북 모양이 아닌, 안상을 새긴 직사각형인 점이 특징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이렇게 극락전과 묘탑, 탑비를 모두 둘러 보고 나니 벌써 시간은 오후 3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있으니 말로만 들었던 지리산 둘레길을 돌아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백무동 종점에서 보았던 지도로 둘레길의 위치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걸 확인하였으니 무작정 길을 찾아 가기로 한다. 아마도 만수천 건너편 산기슭을 따라 둘레길이 나 있을 것이리니...

 

 

 

만수천 둑방길에서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는 청년을 만난다. '실상사작은학교' 교사인 듯하다. 길을 물어보니 짐작했던 대로 둘레길은 강 건너 산기슭으로 나 있다고 한다.

 

 

 

 

 

실상사 바로 옆(왼쪽 건물)에 있던 학교는 건너편 산기슭으로 옮겼으며 지금은 방과후 학교 시설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실상사 주변과 만수천 강둑에는 몰려 다니는 아이들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오른쪽 건물은 지역생태 농업센터이다.

 

 

 

 

 

 

인월까지는 13킬로미터쯤이라고 하는데 서너 시간으로 갈 수 있을는지... 어쨌든 처음으로 가보는 지리산 둘레길을 향해 만수천을 건너 바쁘게 오르막 산길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