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산하와 문화재

양반 가옥과 하회탈춤의 고장, 안동 하회마을 산책

모산재 2010. 8. 2. 08:19

 

장마 시기가 한참 지났건만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많은 한여름에 물도리동, 하회마을을 찾는다. 일곱 명의 동료들과 함께 휴가철을 맞이하여 정처없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탔다가 하회마을을 못 본 사람이 있다고 하여 이곳으로 향하였다. 다행히 이 날 비가 그쳤지만 차라리 비가 쏟아지는 게 낫겠다 싶게 후텁지근한 날씨는 숨이 막힌다.

 

 

 

5년만에 다시 만난 하회마을은 입구부터 낯선 모습으로 다가선다. 차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에서 멈춰서야 했다. 그리고 이 한적한 시골마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생뚱맞은 상가... 여기가 무슨 중국의 관광지인가 싶게 상업적 욕망이 둥지를 틀고 장터거리가 섰다.

 

어쨌거나 사대부촌 하회마을이 가져야 할 기품과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전 국민 자가용 시대에 이 전통마을 관광조차 이제 쇼핑의 한 품목에 속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쇼핑족들이 들렀다가 돌아갈 때에 식사라도 하고 반주 한 잔이라도 해야할 곳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이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행 중 반수는 그냥 주막거리에 주저앉고 만다. 이미 하회마을 골목길을 몇 번이고 밟아보았다는 이유이긴 하지만 이 주막거리가 없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몇 번이고 찾은 곳이지만 상가에서부터 심상찮은 변화를 느낀지라 주저앉길 유혹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하회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예전과는 달리 찻길과는 따로 강변 언덕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을 만들어 운치 있어 좋다. 하회마을과 맞은편 부용대의 절벽 사이를 흘러내린 화천(花川)의 물살이 태극으로 감아돌며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즐겁다.

 

 

 

 

 

 

강변길을 지나 마을 가까운 곳에 이르니 작은 장승공원이  있다. 대개의 장승이 다른 곳의 장승들과는 다를 바 없지만 앞쪽의 큰 장승은 하회탈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리고 마을로 이어지는 길 옆에는 흰 연꽃이 피는 연못을 조성해 놓았다. 우렁이가 많이 사는지 연잎자루에는 우렁이 알이 붉은 꽃럼 달려 있다.

 

 

 

 

 

※ 하회마을에 대하여

 

풍산 유씨의 씨족마을로 유운룡·유성룡 형제 대(代)부터 번창하게 된 마을이라고 한다. 낙동강 줄기가 S자 모양으로 동·남·서를 감싸 돌고 있고 독특한 지리적 형상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유씨가 집단 마을을 형성하기 전에는 대체로 허씨, 안씨 등이 씨족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유의 '하회별신굿탈놀이'로 유명한 이 마을은 크게 남촌과 북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유서 깊고 제법 크기를 갖춘 많은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다. 특히 별신굿에 쓰이던 탈들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제작 연대를 고려 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마을의 역사가 뿌리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양진당(보물 제306호), 충효당(보물 제414호), 북촌택(중요민속자료 제84호), 남촌택(중요민속자료 제90호), 옥연정사(중요민속자료 제88호), 겸암정사 (중요민속자료 제89호) 등 많은 건축들은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생활상과 발달된 집 구조 등을 연구하는데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할 수 없이 멋스러운 경치에 민속과 유교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정신 문화의 연구·보존·발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다.
<문화재청>

 

▶ 경주 양동마을 →http://blog.daum.net/kheenn/5911260

▶ 벌교 낙안읍성 →http://blog.daum.net/kheenn/13542569

 

 

 

기다리는 동료들을 생각하니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 후딱 사진만 찍고 돌아나오는 식의 답사로 이어진다. 몇 번이나 와 본 곳이라 낯선 곳은 없고 변화된 것도 별로 없다

 

 

 

 

■ 하동고택(河東古宅) 중요민속자료 제177호

 

제일 먼저 찾은 집은 마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하동고택이다.

 

 

 

 

하회마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하동고택(河東古宅)'이라 부른다. 초가지붕을 이고 선 대문이 맞이해 주는 이 집은 특이하게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와 안채 등이 모두 기와집이라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초가지붕 대문채에 기와집인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이유는 이 집을 지은 분이 후손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한 차례 융성하면 한 차례는 쇠락하므로 욕심을 내어 전부를 채우려 말고, 부족한 가운데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라."고 하는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안채 가운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모두 열린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사를 맡은 부녀자들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지은 것이라 한다.

 

건축은 지금의 예천군 용궁 현감을 지낸 류교목(柳敎睦) 공이 조선 헌종 2년(1836년)에 세웠고, 1953년 현재 소유자의 부친이 인수하였다. 전체 24칸의 활궁(弓)자형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채로 이어져 있는 민도리 집이다.

 

 

 

 

 

 

■ 화경당(和敬堂) 또는 북촌댁 중요민속자료 제84호

 

 

두번째로 찾은 집은 하회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인 북촌댁 화경당이다. 그런데 대문이 잠겨 있어 내부를 돌아볼 수 없어 아쉽다. 99칸 집으로 큰사랑채, 사랑채, 안채, 별당채, 사당, 대문간채를 두루 갖춘 사대부 집이며 북촌을 대표하는 큰 집이라 해서 '북촌댁'이라 불린다.

 

솟을대문 옆 벽체 담장을 황토 흙돌담 위에 검은 벽돌로 가지런히 쌓아 올려 만든 것이 인상적이다.

 

 

 

 

 

당호 화경당은 '화(和)'로 어버이를 섬기고 '경(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더불어 ‘적선지가積善之家’(착한 일을 많이 한 집)로 잘 알려져 있다.

 

300여 년의 세월을 품고 서 있는 큰 사랑채 뒤편의 소나무는 하회마을을 굽어 돌고 있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이다.

 

 

 

 

이 건물은 정조·순조 조에 초계문신과 예조·호조 참판을 역임한 학서 류이좌(鶴棲 柳台佐)의 선고(先考)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류사춘(柳師春)공이 정조 21년(1797)에 작은 사랑과 좌우익랑을 처음 건립하였다. 안채, 큰사랑, 대문간, 사당은 경상도도사를 지낸 그의 증손 석호 류도성(柳道性)이 철종 13년(1862)에 건립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 위에서 본 화경당(출처 : http://www.hahoe.or.kr/)

 

 

 

 

 

 

■ 양진당(養眞堂), 또는 입암고택(立巖古宅)보물 제306호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로 고려 건축양식인 사랑채와 조선 건축 양식인 안채가 공존하는 독특한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류종혜 공이 13세기 입향 당시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이 사랑채는 고려시대의 양식이다.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의 부친 입암 류중영 선생을 지칭한 것이고,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 '입암고택'과 '양진당'이라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 헛간의 구유(경상도 말로는 '구시'라고 한다.) - 소 여물통이라고 보면 된다.

 

 

 

 

 

 

■ 충효당(忠孝堂) 또는 서애종택 보물 제414호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 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선생이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 중기 전형적 사대부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사랑채 대청에 걸려 있는 ‘충효당(忠孝堂)’이라고 쓴 현판은 명필가였던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라고 한다.

 

 

 

 

서쪽을 앞면으로 긴 행랑채를 두고 안쪽으로 ㅁ자 모양의 안채와 一자형의 사랑채가 연이어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생활하면서 손님들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왼쪽에서부터 사랑방, 대청마루, 방, 마루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는 안주인이 생활하면서 집안 살림을 돌보던 공간으로 동북쪽에 부엌을 두고 ㄱ자로 꺾여서 안방, 대청, 건넌방이 있다. 또한 건넌방 앞에는 마루와 2칸의 온돌방, 부엌이 있으며 사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지을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어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 2세의 방문 기념 식수가 있다.

 

 

 

 

■ 작천고택(鵲泉古宅) 또는 유시주가옥 중요민속자료 제87호

 

 

'류시주가옥'은 현재 집주인 이름을 딴 것이나, 원래는 작천(鵲泉) 류도관 공의 호를 따 '작천고택(鵲泉古宅)'이라 불려왔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이며, 사랑방에서 안방으로 이어지는 앞마당에 작은 토담을 두어 사랑손님과 안채의 부녀자가 마주치지 않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건축 수법과 양식으로 미루어 조선 중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지금은 일(一)자형 안채만 남아 있는데, 갑술년(1934) 대홍수로 1채가 유실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숨막히게 푹푹 찌더니 작천고택을 돌아보고 나올 때 갑자기 비가 후두둑 듣기 시작한다.

 

늘 돌아보던 집만 돌아보는 것이 아쉽기만 한데 기다리는 일행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지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소나무 숲이 있는 강길을 걸으며 바라본 마을집들과 밭. 옥수수도 참깨도 내리는 비에 흠뻑 젖고 있다.

 

 

 

 

 

 

강가의 넓은 백사장 언덕에는 아름드리 솔숲이 마을과 강(화천)의 경계를 이루며 둘러싸고 있다. 부용대 바위절벽의 딱딱함을 완충해 주는 듯... 촉촉한 솔숲은 부드러운 풀밭을 거느리고 작은생명들이 깃들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자라 등딱지만한 커다란 큰갓버섯들이 자라나고 있다.

 

 

 

 

 

이 솔숲을 만송정(萬松亭) 솔숲이라고 한다. 맞은편 바위절벽 부용대의 거센 기운을 누르고 얕은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보하기 위해 조성한 인공숲이다. 풍기군수를 지내고 류성룡과 함께 하회마을의 기틀을 잡은 겸암 류운용이 손수 가꾼 숲인데 일만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정자라는 뜻의 만송정을 세웠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예전의 솔숲은 거의 사라지고 지금의 솔숲은 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 한다. 정자도 사라지고 없지만 다시 울창하게 우거진 솔숲은 옛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하회마을과 마주보는 부용대의 절경을 바라보며 잠깐 이런 생각에 잠겨본다.

 

이끼가 낀 검은 바위 절벽이 맞은편 넓게 펼쳐진 모래 사장과 대조를 이루며 절묘한 미감을 자아낸다. 밝고 부드러운 수평과 어둡고 강직한 수직의 대조에서 오는 미감이라고 하면 될까. 그 팽팽한 긴장의 공간 사이로 강물이 유유히 흘러간다. 모순인 것을 하나로 껴안아 부러드러면서도 강직하게 움직여 나가는 변증법, 그것이 바로 강물이라는 것!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가는 역사라는 것...

 

 

 

 

 

이곳 백사장에는 독특한 민속놀이가 전해져 오고 있다.

 

해마다 백중 다음날인 음력 7월 16일 밤이면 부용대와 만송정 솔숲 사이의 강에서는 하회줄불놀이가 벌어진다고 한다. 부용대 꼭대기에서 줄을 매어 불을 붙인 참나무 숯을 매달아 건너편으로 내려보낼 때 강물에 비치는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없어졌던 이 놀이가 최근 부활되었다고 한다.

 

 

부용대의 왼쪽 저 우거진 나무 숲 어딘가에 겸암정사가 숨어 있을 것이다. 겸암정사는 겸암(謙巖) 류운룡 선생이 명종 22년(1567년)에 세우고 후에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곳이다.

 

부용대 기슭, 화천 상류에 자리잡고 있어서 하회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마을 쪽에서는 낙엽 진 겨울 한 철을 제외하고는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 우뚝 솟은 정면의 부용대는 기운이 강하지만 북서쪽은 이렇게 지대가 낮아지면서 기가 허하다. 이를 보하기 위해 백사장에 만송정 솔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유장하게 흐르는 아름다운 화천 강물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걷다가 문득 '한반도 대운하'의 꿈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밀어부치고 있는 이명박 정권을 떠올리며 실소한다. 바로 이곳에도 보를 설치하려고 했던 그들 아닌가.

 

병산서원과 이곳 하회마을의 해수욕장보다도 더 아름다운 백사장을 파내고 수로를 만들겠다는 그들, 썩은 청계천을 콘크리트 청계천으로 만든 것이 '친환경'이라니 알 만한 것이다.

 

 

 

 

 

 

아, 그런데 옥연정사, 화천서원 쪽으로 사람을 싣고 나룻배가 강(화천)을 건너고 있다. 빛바랜 사진 속 추억의 풍경인 듯 아름답다. 동력을 달지 않고 삿대질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서 괜스레 고마운 마음이 든다.

 

 

전통 민속마을답게 예스럽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간사한 나그네 마음이다. 자신은 자동차로 부리나케 달려가면서도 말이다.

 

 

 

 

 

 

 

 

건너편 풍경을 클로즈업해 본다. 앞에는 옥연정사, 오른쪽 뒤로는 화천서원이 있다.

 

 

 

 

■ 옥연정사(玉淵精舍) 중요민속자료 제88호

 

 

처음에는 옥연서당(玉淵書堂)이라 했는데, 옥연(玉淵)은 정사 바로 앞에 흐르는 깊은 못의 색조가 마치 옥과 같이 맑고도 맑아서 서애 선생이 이름하였다.

 

 

 

 

선생은 이 집에서 임진왜란의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을 구상하고 저술하였다. 이 정사는 서애 선생이 학문을 하기 위해 세우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짓지 못했는데, 승려 탄홍(誕弘)이 10년이나 시주를 모아 선조 19년(1586)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 화천서원(花川書院)

 

 

부용대 동쪽기슭에 있으며, 겸암 류운룡 선생의 학덕을 흠모한 유림이 정조10년 경덕사(景德祠)를 세워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고종 5년 서원훼철령에 따라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가 1996년에 다시 세웠다.

 

 

 

 

 

 

이렇게 바쁘게 한 바퀴 휘휘 돌고 다시 주차장 부근 주막거리로 돌아오니 일행들 얼굴이 동동주 몇 사발에 대낮부터 불콰하다. 그래도 열심히 다녀온 놈 생각하느라고 남겨 놓은 한 잔 술 건네 준다.

 

이미 점심 때가 지나고 있어 점심이나 먹었으면 좋으련만 병산서원으로 가자며 탑승을 재촉한다.

 

 

 

 

※ 안동 하회마을 안내도

 

 

 

(출처 : http://www.haho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