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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 여행

중국 산동 (12) 쯔보(치박) / 주촌 옛 상업 거리, 대덕통표호, 대염방

by 모산재 2010. 9. 20.

 

연예광장 앞 큰길(絲市街)로 잠시 걷다가 금방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상업 금융시장인 은자시장(銀子市場) 거리이다.

 

'은자(銀子)'는 '은돈'을 가리키니, 은자시장은 금융 거리라 할 수 있다. 청나라 초기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은자시장임을 증명이나 하듯 길 가운데 마름모꼴의 나무판에 '은자시장(銀子市場)'이라고 적어 놓은 미니 목조 패방이 나타난다. 골목길 양쪽으로는 육중한 벽돌집들로만 이어지고 있어 다소 엄숙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는 따더퉁(大德通)을 비롯한 여러 사금융 업체가 분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번성했을 때는 사금융 업체가 100개가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가 무너지고 난 뒤 1920년대에는 대덕통(大德通)· 대덕항(大德恒)· 삼진원(三晋源)· 금생윤(錦生潤) 등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대덕통표호(大德通票號)'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로 들어선다. 섬세한 목조건물의 외관이 예사롭지 않은데, 이곳에서 가장 알려지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입간판에는 '표호전관(票號展館)'이라고 적혀 있어 전시관임을 알리고 있다.

 

 

↓ 오른쪽 앞에 '대덕통표호(大德通票號)'가 있고, 뒤쪽에 '대염방가방(大染坊家坊)'이라는 상호가 펄럭이고 있다.

 

 

 

'표호(票號)'는 청나라 시대 중기 이후 번성했던 환업무(換業務)를 주로 한 상업 금융 기관을 뜻한다. 쉽게 표현하면, 현금을 은으로 은을 현금으로 바꿔 주는 현금 거래소이다. 표호 중에서 산시성(山西省) 출신의 상인, 곧 진상(晉商)이 경영한 산시표호(山西票號)가 유명하다고 한다.

 

대덕통표호는 산서 기현의 부유한 상인 교치용(喬致庸)이란 사람이 세웠다고 한다. 청나라 말기 참기름을 운반해서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상무가 가짜 기름을 섞어 판 것을 알고 모두 회수하여 최고급 참기름을 내주며 크게 신용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 으뜸이요, 의리를 지키는 것이 버금이며, 이득을 취하는 것은 세번째이다." 라고 자신의 직업윤리를 표방한 상인이었다. 

 

 

 

 

그런 그의 직업윤리를 나타내는 듯 내부에는 큰 글씨로 쓴 믿을 '신(信)'자가 액자로 걸려 있다.

 

 

 

그렇다고 순수한 윤리관으로만 사업을 크게 일으킬 수는 없다. 번창의 뒤에는 권력 관계 또한 크게 작용하였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고 서태후가 산시성으로 도망쳤을 때, 교씨 집안의 대덕통 표호의 장궤였던 고각(高珏)은 즉시 대덕통 내부를 깨끗이 꾸미고 서태후와 광서제의 행궁으로 만든다. 그리고 궁한 처지가 된 서태후에게 10만 냥을 쾌척하였다.

 

나중 서태후는 각 성의 독부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돈을 모두 산시표호에 맡겨서 운영했고, 이로써 대덕통 표호는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 전시된 각종 화폐들

 

 

 

후원에 세워 놓은 독특한 문양.

 

엽전의 네모꼴 구멍 '입구(口)'자를 공통 획으로 하여 만든 조어가 재미 있다.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오직 족함을 알 뿐이다." 라는 말이니 이는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고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라.'는 뜻이다. (일본 료안지 가레산스이 정원 우물에에도 이 구절을 같은 문양으로 새긴 것이 있었다.)

 

 

 

↓ 후원 2층에서 본 뜰 풍경. 목조인 건물 앞쪽과는 달리 회색빛 벽돌로 지어졌다.

 

 

 

↓ 후원 2층 내부 모습 

 

 

 

 

표호전관을 나와 다시 은자시장거리의 남쪽을 향해 걷는다.

 

 

길거리 화단에서 만난 포인세티아 닮은 꽃...

 

 

 

 

대덕표호에서 남쪽으로 비스듬히 건너다 보이는 곳에 '대염방(따란팡=大染坊)'이 자리잡고 있다. '염방'은 염색공장이라 할 수 있다.

 

 

 

입구를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이 펼쳐진다. 진(陳)씨 집안의 가업이라는 듯 큰 글씨로 '陳"이라고 쓴 등롱이 통로를 따라 도열하여 걸렸다.

 

 

 

대염방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색색으로 물들인 천들이 정원에 걸려 있다.

 

정면 건물 벽에는 '노상지원-주촌(魯商之源-周村)'이라 써 놓았는데 주촌이 노나라 지역의 상업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왼쪽 벽에는 '진걸기념관(陳杰紀念館)'이라고 새겨 놓았는대, '진걸(陳杰)'은 이 대염방의 주인이었던 사람인이다. 맨 아래에 한글로 '진걸기념관'이라 써 놓아 눈길을 끈다. 한국인 관광객들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 하지만 이뿐이다.

 

 

 

'염방차간실물전 (染坊車間實物展)'이라 적힌 통로를 지나면 후원 마당으로 이어진다. 그 곳에 염색시설과 직물을 짜는 시설들, 대염방의 공장이 있다.

 

 

 

실과 천을 염색하는 건물은 이층 치마로 된 목조건물로 되어 있다. 마당에 물을 퍼 올리는 도르래와 두레박이 있지만 그런 기능을 해본 지는 오래된 듯하다.

 

염색한 천들이 널려 있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전시관의 기능을 할 뿐... 운남을 여행할 때 따리의 나시족 마을 주성(周城) 나염공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염색작업에 몰두하는 사람들, 그리고 들어서는 관광객들에게 한 점 팔기 위해서 온 정성을 다해 설명하는 사람들...

 

 

 

↓ 건물 안 염색 시설 풍경

 

 

 

이것은 아마도 천을 날랐던 수레이겠지...

 

 

 

실내엔 베틀이 보관되어 있다.

 

 

 

물레도 수레도 베틀도 모두 쉬고 있는 모습이어서 옛 흔적만 느낄 수 있을 뿐, 치열한 생업의 현장을 보는 즐거움이 없어 좀 아쉽다.

 

 

그리고 후원의 북쪽 뜰에는 주거 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주렴이 쳐진 원형의 문 안쪽은 침실이다.

 

 

 

무려 24회나 이어지는 텔레비전 드라마(电视剧) '대염방(大染坊)'이 이곳을 배경으로 촬영되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감독한 왕문걸(王文杰)은 중국 10대 연예감독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염방'이란 드라마가 한국에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니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진걸(陳杰)'이란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도 찾을 길이 없다. 이 드라마에는 '진걸(陳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감독 왕원지에라는 이름 다음에 '편극(编剧) : 천지에(陈杰)'라고 적혀 있지만 동일 인물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극중 주인공이 진(陳)씨인 것으로 봐서 연관이 있는 듯하다.

 

 

대염방을 끝으로 주촌 옛거리 여행은 모두 끝났다. 

 

 

따지에(大街)로 되돌아오는 길에 만난 앵무새.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서 기르고 있다.

 

 

 

 

연예광장이 보이는 따지에, 한마터우 식당(旱碼頭食府)에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주촌거리를 돌아보느라 점심식사가 많이 늦추어졌다. 주촌을 위해 건륭제가 어제를 내렸다는 '천하제일촌' '일촌방'이란 깃발이 걸렸다.

 

 

 

↓ 한마터우식부 입구

 

 

 

식단은 채소를 기름에 볶은 것이 많고 고기 접시가 곁들여졌는데 맛있다. 중국 음식에 적응한 탓인지 김치 생각은 전혀 나지 않는다.

 

 

 

↓ 연초공사 앞을 지나오다 난 가마와 가마꾼

 

 

 

↓ 따지에 거리에서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노인

 

 

 

 

주촌 여행을 마치면서...

 

주촌에 대한 정보를 전해 주는 우리말 매체는 거의 전무하다 할 정도로 찾기가 어렵다. 국내 여행사에서는 여행 코스로 잡아 놓고 가이드에게 맡겨 놓을 뿐 변변한 안내 자료가 없는 무신경을 보인다. 가이드만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거니와 가이드도 설렁설렁 넘기는지라 거리를 다니면서도 주마간산 격의 여행이 된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검색을 해 보아도 답을 찾기가 어렵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포스팅한 글들도 사진 자료만 있을 뿐 이해를 뒷받침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으니 수박 겉 핱기... 아쉬움이 크다.

 

 

 

주촌을 돌아본 다음 바쁘게 쯔보(치박)시를 지나 제나라의 고도 린쯔(임치)를 향해 달린다. 제나라의 시조 강태공 사당과 고차박물관을 보아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