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중국 산동 (13) 쯔보(치박) / 린쯔(임치) 강태공 사당과 의관총

모산재 2010. 9. 24. 19:16

 

주촌 옛거리, '주촌고상성(周村古商城)'을 돌아본 다음 동으로 한 시간쯤 달려서 임치(린쯔, 临淄)에 도착한다. 주촌과 임치는 둘 다 치박(쯔보, 淄博)에 속하는 작은 도시인데, 주촌은 치박의 서쪽에 임치는 치박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치박의 한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임치는 2천여 년 전까지만 해도 8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제나라의 도읍으로서 동방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기원전 11세기에 강태공이 제나라를 세워 도읍으로 정한 곳이 임치 북부의 영구(營丘)였고, 춘추시기에 제환공이 관중을 등용하여 '5패의 으뜸'으로서 이른바 '만승지국(萬乘之國)'의 터를 닦은 곳이 바로 임치였다.

 

 

 

제나라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이곳 임치에서 강태공 사당과 고차박물관을 돌아보기로 한다.

 

 

먼저 찾은 곳은 강태공 사당.

 

 

강태공이 누구인가? 낚시꾼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우는역성혁명에 앞장섰으며 그 공으로 제후로 봉하여져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 쯔보(淄博), 주촌, 임치 주변 안내 지도

 

 

 

 

 

 

버스는 강태공사당의 입구, 화려한 목패방의 안쪽에서 섰다.

 

 

이곳은 강태공의 옷과 관을 묻은 의관총이 있던 곳인데, 사당이 생긴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1993년에 의관총 북쪽에 중국 전통 양식으로 강태공의 사당을 세운 것이다. 사당 경내는 강태공 의관총(衣冠塚), 강태공 사당(姜太公祠), 강태공의 아들로 구씨의 시조가 된 구목공 사당(丘穆公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의 석패방 녹색 글씨가 당연히 '강태공사(姜太公祠)'일 거라고 생각하고 무심코 사진에 담았는데, 뜻밖에도 이것은 '구목공사(丘穆公祠)'를 전서체로 쓴 것이다. 그렇다면 '천제지존(天齊至尊)'이라는 하늘색 현판 글씨가 씌어진 바깥쪽 목패방은 강태공 사당을 나타내고, 이 석패방은 구목공 사당을 나타내는 것인 듯하다.

 

 

 

 

 

석패방의 네모진 돌기둥에는 '조유위수원류원 종시영구세택장(祖由渭水源流遠 宗始營丘世澤長)'이라 새겨 놓았다. 조종의 원류가 멀리 위수에서 비롯되어 영구(제나라의 옛도읍지)에서 시작되어 조상의 은택이 길이 이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조(祖)'는 강태공을, '종(宗)'은 구목공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까...? 

 

 

 

 

 

낚시꾼의 대명사 강태공(姜太公)은 기원전 11세기 무렵, 문왕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기원전 1,122~기원전 256)를 세우는 역성혁명(殷周易姓革命)의 중심이 되었고, 그 공으로 제후가 되어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던 던 인물이다.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이다.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1211년에 태어나 1072년 139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해상(東海上)' 사람으로 동이(東夷)의 선비라고 알려져 있는데, 동해상은 오늘날 산동반도 지역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렸다. 태공망(太公望)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서백(나중 주나라 문왕으로 칭해짐)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을 만나 조부인 태공(太公)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오랫동안 기다리던(望) 인물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여상의 본래 성이 강씨이고 서백이 그를 태공이라고 불렀기에 그 후부터 여상은 ‘강태공’이라는 이름으로 천하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그는 가세가 기운 집안에서 자라나 데릴사위로 갔다가 구박을 받고 쫓겨나 백정이 되기도 한다. 재능이 뛰어났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제후를 만나지 못하고 방랑생활을 하다 위수(渭水)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며 때를 기다린다. 미늘도 없는 바늘에 미끼를 쓰지 않고 낚시를 하며 집안을 돌보지 않자 아내는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서백 창은 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을 인물을 찾고 있었다. 어느날 사냥을 가려고 거북점을 쳤는데 희한한 점괘가 나왔다. 잡히는 것이 용도 범도 아니고 그렇다고 곰도 아닌, 패왕(覇王)을 도울 인물이라는 점괘였다. 이러한 점괘를 얻은 뒤 사냥을 나간 주 문왕은 위수 강변에서 범상치 않은 70 노인, 여상을 만나고, 그의 조부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 하여 여상을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고 스승으로 삼는다.

주나라 왕의 보좌관이자 전쟁시 군사를 통솔하는 태사(太師)직을 맡은 강태공은 서백 창과 그의 아들 무왕 발을 보필했다. (무왕 발은 강태공의 사위였고 성왕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무왕은 지략가인 강태공의 보필로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의 형벌로 유명한 주왕(紂王)의 70만 대군을 ‘목야의 전투’에서 격퇴하여 은(殷)을 멸망시키고 주 왕조를 열었다.
중국 최초의 역성혁명을 주도한 공으로 강태공은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져 그 시조가 되었다. 고대 중국의 7가지 병법서 중 하나인 '육도삼략'은 강태공이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강태공사(姜太公祠) 출입문 양쪽에 신장상이 사당을 지키고 있다. 

 

 

 

 

 

<삼국지연의>의 관우가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듯이, 강태공도 중국인들에게 역사적 인물 이상의 존재로 여겨지는 듯하다.

 

<삼국지연의>와 쌍벽을 이루는 명대의 <봉신연의(封神演義)>는 주왕을 토벌하는 무왕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소설인데, 여기서 강태공은 무궁한 법력과 도술로 요귀를 물리치는 신(도사)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설날에 집집마다 강태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인 연화(年畵)를 붙였는데, 이는 강태공의 형상이 잡귀를 막고 복을 부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 강태공 사당 본전

 

 

 

 

강태공으로부터 제나라는 32대 800여 년을 이어졌지만, 기원전 481년 제간공 4년에 전성(田姓)이 정권을 쥐면서 강씨의 제나라는 몰락하고 전씨의 제나라가 된다. 그와 함께 천하의 주도권은 제나라에서 진나라로 넘어가고, 결국 제나라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에게 멸망당하고 중국은 통일된다.

 

제나라가 가장 강성한 시기는 제환공 시대이다. 기원전 685년 소백이 왕위에 오르며 왕위쟁탈전에서 반대편에 섰던 관중을 승상으로 받아들이고 각 방면의 개혁을 추진하며 춘추 시대 천하의 패자가 된다.

 

 

본전 안에는 강태공상이 모셔져 있다.

 

 

 

 

 

본전 가운데에는 강태공상을, 양쪽에는 제나라 2대왕 제정공(齊丁公)과 16대왕 제환공(齊桓公) 상을 모셨다. 일흔을 넘겨서 정치에 나선 강태공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 강태공의 아들이자 제나라의 2대왕 제정공 상

 

 

 

↓ 관중을 등용하여 제나라를 춘추시대의 패자로 만든 제환공 상

 

 

 

사당의 앞마당에는 5현전(五賢殿)과 오조전(五祖殿)이 있다. 서쪽의 5현전에는 제나라의 정치가와 병법가인 관중(管仲), 손무(孫武), 손빈(孫臏), 사마양저(司馬穰苴), 전단(田單) 등 5인을 모셨다. 동쪽의 5조전에는 동화제군(東華帝君), 여동빈(呂洞賓), 장천사(張天師), 왕중양(王重陽), 구장춘(邱長春) 등 도교의 신선을 모셨다.

 

강태공 사당은 정치가 및 병법가로서의 강태공과 신선으로 신비화한 강태공의 양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 된 듯하다.

 

 

↓ 5현전(五賢殿) 

 

 

 

↓ 관중(管仲) 상. 포숙의 천거로 제환공을 도와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으뜸으로 올려 놓은 인물이다.

 

 

 

↓ 흔히 손자로 일컬어지는 병법가 <손자병법>의 손무(孫武), 손무의 손자 손빈(孫臏)

 

 

 

↓ 전단(田單)과 전양저(田穰苴) 상.

전단은 전국시대 연나라에 잃은 땅을 모두 찾은 제나라의 장군.

전양저는 사마양저라고도 하며 군율을 엄히 세워 진과 연나라에 잃은 땅을 찾은 군사가.

 

 

 

사당 내부에는 강태공의 일생을 벽화로 그려 놓았다. 강태공의 가난한 생애(貧困生涯), 무예를 익히고 책을 씀(習武著書), 은 주왕과의 전투인 목야대전(牧野大戰), 제나라의 후로 봉해짐(封齊就國), 제나라를 다스림(太公治國) 등...

 

사당임에도 벽화 외에 서화를 전시하고 있어 특이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당 뒤쪽으로 나가면 강태공의 의관총(衣冠塚)이 나타난다.

 

비석 앞 패방에는 제나라 문화의 창시자에 대한 존경과 추모의 정을 담은 '주사제조(周師齊祖)'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주나라의 스승이요 제나라의 시조'라는 뜻이다.

 

 

 

 

 

전하는 바로는 강태공은 10년 동안 주 성왕을 도왔다. 그리고 제후의 지위를 아들 강급, 제정공(齊丁公)에게 물려 주었고, 제정공 35년인 1072년에 13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주나라의 의식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주 문왕의 묘지 옆에 매장하였는데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강태공의 덕을 잊지 못하던 제나라 사람들은 영구 남산의 북쪽에 그가 썼던 모자와 옷을 묻은 의관총을 만들었다고 한다.

 

의관총의 높이는 28미터이고 봉분의 지름은 약 50미터이다. 의관총에는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중국인들은 무덤에 나무가 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우리처럼 벌초를 하지 않는다. 이는 취푸의 공림에서도 보았던 것이다.

 

 

비석 머릿돌에는 '강(姜)'이라는 성씨가 새겨져 있고, 빗돌에는 예서체로 "무성왕강태공의관묘(武成王姜太公衣冠墓)'라고 적어 놓았다. 비석에는 강태공의 일생의 업적을 기록해 놓았다.

 

 

 

 

 

강태공이 '무성왕'으로 불리게 된 것은 당나라 숙종 때부터이다. 당 숙종은 강태공을 문성왕 공자와 비겨 무성왕(武成王)으로 봉하고 도성과 각 주에 태공묘(太公廟)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태공묘는 문선왕 공자의 문묘와 대칭되는 명칭으로 무묘(武廟)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강태공은 전국적인 신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의관총 주변에는 많은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진주강씨 종친회에서 세운 강태공 추모비. 강태공 탄생 3143주년 축전에 참석하여 기념으로 세운 비석이다. 뒷면에는 취지를 적은 우리말 비문이 있다.

 

 

 

 

 

그리고 2005년에 세운 구씨방조인종비와 2009년 중화고성종친회에서 세운 비석이 나란히 서 있다.

 

 

 

 

남쪽에서 본 강태공 의관총. 초목이 무성하게 자랐다.

 

 

 

 

 

강태공 사당의 동쪽에는 구목공(丘穆公) 사당이 있다. 1995년 구목공의 100대손인 대만의 구씨 종친회장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구목공은 강태공의 셋째아들로 제나라 수도인 영구(營丘)의 '구(丘)'자를 따서 성씨로 삼아 창씨를 했다고 한다.

 

 

 

 

↓ 구목공 사당의 정원

 

 

 

↓ 구조전(丘祖殿)

 

 

 

↓ 구조전과 구목공(丘穆公)

 

 

 

↓ 1997년 평해구씨 종친회에서 세운 세계 구씨 대시조 구목공 추모비

 

 

 

 

구목공 사당의 동쪽 전각에는 강(姜)씨 성의 기원과 족보를 전시해 놓았다. 강씨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시 중의 하나로, 강씨 성은 현재 103개의 성으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2000년 이곳을 방문한 노태우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강태공의 7대손 여적(呂赤)에게 증손 혜(傒)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산동의 노(盧)나라가 주어져 노(盧)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선조의 뜻을 받드리오다.'라는 어색한 문장에 서투르게 쓴 글씨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노씨라는 이유로 그의 조상이라는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중국 땅에서 수천 년 전의 조상 찾기 행렬을 벌이는 모습은 참 거시기하다.

 

 

 

 

 

어쨌든 강태공 사당은 춘추전국시대에 패자 노릇을 했던 제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의 중국 역사를 대하면서, 거의 공백으로 남아 있는 당시 한반도의 역사가 떠오르며 부럽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달기라는 요녀에 빠져 주지육림의 방탕으로 주왕과 은나라가 망했다는 야사와는 달리, 주왕이 고조선과의 전쟁에 국력을 탕진함으로써 멸망에 이르렀다는 것이 중국사의 정설이라는데, 우리에게 고조선은 아직도 역사가 아닌 신화로만 남아 기술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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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쯔보(치박)시에 대하여

산동성 중부, 제남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쯔보(치박)은 산하에 장덴(장점), 보산(박산), 쯔촨(치천), 저우춘(주촌), 임치(린쯔) 5개 구와 환타이(환대), 이위안(기원), 가오칭(고청) 3개 현을 두고 있다. 

독특한 군락식 도시로 되어 있는 쯔보는 경내에 기차역이 13개나 되고 구역마다 상대적으로 독립된 도시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제각기 경제문화적 우세를 가지고 있다. 쯔보의 린쯔(임치)는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가장 번영한 국가였던 제나라의 638년간의 수도로 동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제나라의 통치자인 환공은 유명한 사상가이자 경제학자인 관중을 승상으로 임명하고 경제 개혁을 실시하고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20년 후에 제나라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고 '천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千乘之國)' 혹은 '5패의 으뜸'으로 불렸다. 

동부의 린쯔(임치)는 제나라의 도읍으로서 '지하박물관'으로 불릴 정도로 매장된 말과 수레 등 수많은 매장 문화재가 발굴되고 있다. 기원전 11세기에 주문왕은 강태공을 이 고장에 파견하여 제나라를 세우고 영구(지금의 림치 북부)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춘추시기에 제환공은 관중을 등용하여 나라를 강성케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강성지국>, <5패의 으뜸>으로 되었다.

쯔보 남부는 이위안(기원)으로 자연 풍광이 수려하며 종유 동굴의 수도 많고 그 분포도 광범위한데 이는 중국 북방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이다. "북방 제일"로 일컬어지는 동굴로는 초령전 종유 동굴과 기원 종유 동굴군 및 개원 종유 동굴 등이 있다.

쯔보 북부의 환타이(환대)현에는 마답호 및 왕어양 사당 등 경관이 있다. 마답호는 춘추시대 제후들의 병마가 사방에서 짓밟고 지나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호수의 면적은 100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며 호수 일대에는 갈대밭과 연꽃이 어우러져 있고 호수에는 사람 사는 집도 있는데 집마다 배를 소유하고 있어 외출하고 친구를 방문할 때에는 배 타는 것으로 걷기를 대신하니 그야말로 한 폭의 "북국 강남"의 경관을 이룬다.

쯔촨(치천)은 17세기 청나라 때 <요재지의>의 작자 포송령의 고향이기도 하다. 포송령이 전에 살던 요지원은 여우가 변신한 신선세계의 기묘함을 느끼게 한다.

보산(박산)은 송조 때 벌써 도자기를 굽기 시작하였고 5대 도자기 명산지로 되었다. 명청시기에 이 고장은 내화 주전자를 대표로 한 중국 미술유리의 주요 생산지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