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림(孔林)은 세계 최대이자 최고인 씨족묘지이다. 곽말약(郭沫若)은 "공림은 매우 훌륭한 자연 박물관이며, 공씨 가족의 편년사이다." 라고 하였다.
노나라 애공 16년(기원전 479년)에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이 곳에 장사를 지냈다. 10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에는 공자와 공자의 아들과 손자, 대대손손 수많은 후손들이 묻혔다. 공림에 있는 묘비만도 전부 7,000여 기라고 하며 비석이 세워지지 않은 무덤은 훨씬 더 많다. 전체 무덤은 10만 기를 넘는다고 한다. >역대 제왕들이 지원하여 묘원이 점차 늘어나 세계 최대의 씨족 묘지가 된 것. 이처럼 방대한 가족묘지는 공자 가문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곡부성 북문으로 나오면 교룡이 승천하는 듯 수백 년 묵은 측백나무가 늘어선 길, 공림으로 가는 신도(神道)가 시원스레 벋어 있다. 도로 가운데 우뚝 솟은 '만고장춘'이라는 패방(萬古長春坊)은 바로 공림으로 들어서는 정문 구실을 한다.
패방의 동서 양쪽에는 녹색 기와가 덮인 정자가 있고, 그 안에는 커다란 비석이 들어있다. 동쪽에는 1594년에 세운 '대성지성선사공자신도(大成至聖先師孔子神道)'라는 비석, 서쪽에는 다음해에 세운 '궐리중수임묘비(闕里重修林廟碑)'가 있다.
여러 층으로 된 지붕이 공림의 위엄을 보여 준다. 앞쪽에 있는 공간의 입구 양쪽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이 있고, 다음 공간에는 두 마리의 봉이 조각되어 있으며, 맨 마지막 공간에도 용이 조각되어 있다.
돌기둥은 사각형인데 가운데 2개의 기둥에는 운룡(雲龍)을 돋을새김했다. 기둥 앞뒤로 포고석(抱鼓石:기둥을 지지하는 북모양의 돌)이 있고 그 위에는 여러 모습의 사자상이 놓였다. 명나라 때인 1594년에 짓고 청 옹정제 때 중수했다.
신도(神道)를 따라 1km 정도 걸으면 '지성림(至聖林)'이라는 현판이 걸린 공림의 대문이 나오는데 대림문(大林門)이라 한다. 여기서부터 공림이 시작되는데, 공림이라는 이름은 수많은 묘비의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 앞에는 두 개의 겹처마로 된 목제 패방(牌坊), 지성림방(至聖林坊)이 있다. 이 패방은 명 영락제 때인 1424년에 처음 지었고 청대에 중수를 거쳤다. 정중앙에는 '至聖林'이라는 금빛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공림의 넓이는 곡부 전체의 5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넒어 다 둘러보기가 어려운데, 자유여행이라면 자전거를 빌리거나 아래와 같은 관람차를 타고 돌아보면 편할 것 같다.
공림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약 400m 정도의 길이 나오고 그 양쪽으로는 붉은 담장이 있다. 정면으로 공문(拱門: 아치형의 문)이 보이고 위에는 전서체로 '지성림(至聖林)’'이라 새긴 글씨가 보인다.
문 앞 양쪽에 살아있는 듯한 돌사자가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으로 펼쳐진 주홍대문 위에는 81개의 꽃무늬를 아로새긴 철문정(鐵門釘)이 박혀 있다. 뒤쪽에 있는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이 문은 원래 고대 노나라 성(魯城)의 북문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부터 이림문(二林門)까지 떡갈나무 숲이 길게 이어진다. 다시 이림문에서 왼쪽으로 가면 수수교(洙水橋)가 있고 이 다리의 북쪽, 숲 가운데로 들어가면 공자 축제시에 향단을 설치하는 곳인 향전(享殿)이 있다.
공림의 묘지는 동서로 긴 장방형이다. 공자의 묘는 가운데에서 남쪽으로 치우쳐있으며, 그의 후예들은 차례로 뒤쪽에 묻혀있다. 전국시대에 형성된 묘지는 대부분 공자묘의 주변에 있으며, 한대의 묘지는 공자묘의 서북쪽과 동북쪽에 있다.
※ 공림 안내도
성림문(聖林門)을 지나 200m쯤 걸어가면 묘역으로 들어서는 다리, 수수교(洙水橋)가 나온다. 다리 앞에 설치한 웅장한 석패방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돌난간을 설치한 아치형의 다리도 운치가 있는데 정작 그 아래를 흐르는 물은 평범하다.
다리 아래를 흐르는 수수하(洙水河)는 주나라 때 곡부성에서 나오는 물을 배출하기 위해 만든 인공 하천이다. 성인의 묘지 앞으로 흐르면서 공묘를 명당으로 만드는 성맥(聖脈)이 되었고 후대에 '永遠無窮 宜與天地共長久(영원무궁하고 천지와 더불어 장구함)'라는 기림을 받게 되었다.
이 돌다리 위에서 돌아서서 바라보면 숲이 우거진 사이로 노나라의 고성이 보인다. 다리 동북쪽에는 '사당(思堂)'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공자에게 제사를 올릴 때 옷을 갈아입는 곳이다.
수수교를 건너 향전으로 가는 길 옆에는 많은 비석들이 서 있는데, 문화대혁명 때 파손된 흔적들이 보인다. 그리고 송, 청 시대에 만든 망주석인 화표(華表), 표범을 닮은 석수인 문표(文豹), 외뿔이 난 괴수 녹단(甪端), 석인상인 옹중(翁仲) 등 4개의 거대한 석조물들이 있다.
그리고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는 향전(享殿)이 나타난다. 향전 앞에는 옹중이라는 문인석과 무인석이 시립하고 있는 가운데 돌로 만든 거대한 향로가 눈길을 끈다. 이 전각은 명대에 처음 지었다. 내부에는 청 건륭제(弘歷)가 공자를 기려 쓴 '알공림작주비(謁孔林酹酒碑)'가 있다고 한다.
이곳은 또 해방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의 군사 지도자였던 주덕(朱德) 총사령관이 중요한 군사회의를 연 곳이기도 하다.
옹중(翁仲)은 석인상(石人像)이다. 홀(笏)을 들고 있는 문옹중과 칼을 품고 있는 무옹중이 한 쌍을 이루고 향전의 좌우에 시립하고 있다. 원래 옹중은 진시황의 부하였던 무장인데, 성은 완(阮)이고 신장이 1장 3척의 거구로 흉노를 정벌할 때 용맹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에 진시황은 함양궁의 문밖에 동상을 세워주었는데 그 후부터 옹중(翁仲)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청옹제 때 보수공사를 하면서, 이곳의 옹중이 너무 작아서 도로 옆에 있는 화표, 문표, 녹단 등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새로 크게 만들어서 세운 것이다. 원래 있던 것은 공급(자사)의 묘 앞으로 옮겼다.
공자의 무덤은 향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향전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규모가 크지도 않은데 풀과 잡목이 자연 그대로 우거지고 하늘을 찌를 듯한 커다란 나무들이 무덤가에 자라고 있다. 다소 음산한 느낌조차 드는 분위기다. 사람의 보살핌이 별로 느껴지지 않은 것이 의아스러운데, 초목이 자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관습 때문이라고도 하고 대사상가의 무덤에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관념이 작용한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공자가 사망한 뒤 노나라 성 북쪽의 사상(泗上)에 매장될 당시에는 매장한 뒤 봉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묘 앞에 있는 석대는 한대(漢代)에 처음 만들었으나, 당대(唐代)에 태산에서 가져온 봉선석(封禪石)을 깎아서 다시 수축했으며, 청의 건륭시대에 확장공사를 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비석이 파괴되었는데, 이때 홍위병은 공자의 능묘도 침입했지만 내부에 인골 등의 흔적은 없었다고 한다.
공자는 스스로를 태산에 비유하곤 했는데(대단한 자부심이다!), 73세에 자신의 천명이 다할 것을 예견하고 한탄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泰山壞乎 梁柱摧乎 哲人萎乎
태산이무너지는구나, 들보와 기둥이 넘어지는구나, 철인이 사라지는구나!
공자의 묘를 돌아본 건륭제는 공자의 한탄을 위로하듯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敎澤垂千古 가르침의 은택이 천고에 드리웠으니
泰山終未頹 태산은 결국 무너지지 않았구나.
참 절묘하게 받은 이 시는 향전 내에 '알공림작주비(謁孔林酹酒碑)'라는 이름의 비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공자의 무덤 앞에는 비석이 둘 있다. 앞에 있는 거대한 비석에는 전서체로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443년에 명의 서예가 황양정(黃養正)이 썼다고 한다. 뒤의 비석은 1244년에 공자의 50대 자손인 공원(孔元)이 세웠다.
그런데 비석의 글자중 '王'자는 무덤 앞 상석에 가려 '干'자처럼 보이는데, 이는 공자를 찾는 황제들을 의식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王'자의 획에서 가운데 가로획이 위쪽으로 많이 치우쳐져 있는 것이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공자의 무덤에서 명나라 시인 이동양(李東陽)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고 한다. 공림의 분위기를 잘 나타낸 시다. (필자 번역)
墓古千年在(묘고천년재) 묘지는 천 년을 두고 변함이 없고
林深五月寒(임심오월한) 숲은 깊어서 오월에도 서늘하다네.
恩沾周雨露(은첨주우로) 은택은 단비나 이슬처럼 두루 젖어들어
儀識漢衣冠(의식한의관) 한족이 의관을 바로 할 수가 있었다네.
駐蹕亭猶峙(주필정유치) 붐비는 사람들로 정자가 고개를 이루니
巢枝鳥未安(소지조미안) 둥지와 가지에 앉은 새들이 편할 틈 없네.
斷碑深樹裏(단비심수리) 깎아지른 비석과 우거진 숲 속에
無路可尋看(무로가심간) 길은 없어도 찾아 볼 수는 있다오
공자의 묘 왼쪽에는 '자공여묘처(子工廬墓處)'란 표석이 있는 작은 집이 자리잡고 있다. 자공(子貢)이 시묘살이를 했던 곳이다.
자공은 장사를 잘해 공자에게 경비를 제공했던 인물로 남방에서 장사하다가 선생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제자들이 3년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난 뒤에도 3년을 더하여 모두 6년간 공자묘를 지켰다 한다. 공자묘의 비석에 그의 눈물자국이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공자묘 오른쪽에는 그의 아들 공리(孔鯉)의 무덤이 있으며, 앞쪽에는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여 <중용>을 쓴 손자 공급(孔伋), 즉 자사(子思)의 무덤이 있다. 이처럼 '‘品'자와 같은 묘의 배치는 자식을 데리고 손자를 품에 안은 행태를 나타낸 것이다. '휴자포손(携子抱孫)'이라고 하는 묘의 배치로 대대로 큰 공적을 쌓는 사람이 나오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공리는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특별히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성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송 희종은 '사수후(泗水侯)'로 봉했다. 공자의 후손들은 그를 2세조라 부른다. 공급, 즉 자사는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여 발전을 시켰기 때문에, 원대인 1330년에 '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으로 봉해졌고, 후손들은 그를 3세조라 부른다.
묘의 동쪽으로는 3개의 작은 정자가 보이는데 송 진종, 청 강희제와 건륭제가 공자묘를 참배할 때 쉬던 곳이라 한다. 그리고 공림에는 청대의 고전극의 작자인 공상임(孔尙任)과 공씨가문으로 시집을 온 건륭제의 딸 우씨의 묘 등이 있다.
공자의 묘와 그 자손들의 무덤을 돌아본 다음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온다. 2천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계속 확장되며 10만이 넘는 무수한 묘들이 숲속에 자연의 일부로 들어 앉은 모습은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후손이라면 한국인을 포함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누구든 묻힐 수 있다고 한다.
다시 공림을 벗어나면서 '지성림' 패방을 돌아본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패방 앞 광장은 흠뻑 젖는다.
폭우가 쏟아지자 지성림 앞 광장의 상가들이 비닐천막을 펼치고, 그 자락 아래로 들어서서 비를 긋는다.
여우비인지 비는 금시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친다.
↓ 길거리 상가, 이곳 특유의 전병을 굽는 모습
그런데 만고장춘방을 지나 돌아오는 길에 보니, 도로에는 빗방울이 떨어진 흔적조차 없다. 1k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이 무슨 조화인가. '오뉴월 비는 소 잔등을 다툰다'는 우리 속담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취푸의 성벽은 명나라 때 건설하여 청나라때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벽돌로 쌓은 성벽이 차분한 느낌을 준다.
성내의 어느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 행단호텔(杏壇賓館)로 들어와 숙소를 정한다.
작은 호텔이지만 호텔 이름처럼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장소인 '행단(杏壇'의 의미를 잘 살린 로비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일류호텔 못지 않게 로비는 널직하고 시원스럽게 트였다.
그런데 로비와는 달리 방은 시골 여관처럼 후줄그레한데 냉장고도 없어 불편하다. 3성급 호텔...답다.
각자 방으로 가서 씻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뒤에 가이드에게 물어 양꼬치구이집으로 가기로 한다.
5위안을 내고 탄 택시로 도착한 양꼬치구이집.
맥주를 시켰는데 2.5도짜리 밖에 없다. 그나마도 냉장고가 없으니 미지근한 맛이 영 아니다. 주변 다 찾아다녔지만 마찬가지... 공자의 고향이라 맥주까지 엄격한가 싶은데, 공자가문의 술이라는 '공부가주(孔府家酒)'를 한 병 시켰는데 39도짜리다.
곡주 치고는 부드러운 편이지만 특유의 향이 우리 술과는 비슷하여 입맛에 잘 맞다. 그러나 마시겠다는 사람이 없어 혼자서 홀짝이며 병을 비운다. 중국에서 제삿술로 많이 쓰이고 값이 싸 우리나라 소주처럼 서민들에게 친근한 술, 중국시장 점유율 1위의 술이라고 하는데...
결국 입에 맞는 맥주를 구하지 못하여 다소 짜지만 맛이 괜찮은 양꼬치구이만 먹고선 다시 택시를 타고 호텔로 들어온다.
호텔로 돌아와 맥주를 구하러 주변을 사방팔방으로 다니며 찾았으나 모두 2.5도짜리 맥주밖에 없고 냉장된 맥주도 구하지 못한다. 결국 호텔 매대에서 맥주를 구하여 가지고 온 소주를 타서 마시며 여행 3일째의 밤은 깊어간다.
이튿날 아침 식사 가는 길에 만난 매대의 아가씨가 반색을 하며 고개 숙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우리처럼 맥주를 많이 팔아주는 손님이 없었던 모양이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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