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중국 산동 (6) 태산 대관봉의 석각비문, 옥황정과 공자묘

모산재 2010. 9. 8. 09:03

 

옥황상제의 딸이자 태산의 여신인 벽하신군을 모신 벽하사(碧霞祠)를 지나 언덕길로 정상 옥황정(玉皇頂)을 향해 오른다.

 

매캐한 연기가 골짜기를 타고 오르는데, 골짜기에서는 인부 두 사람이 낫을 들고 덤불을 헤치고 다니며 풀을 베고 있다. 자연공원이지만 곳곳엔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고 있다.

 

 

 

 

 

 

그리고 금방 넓은 마당이 열리며 나타나는 무수한 서각 바위 절벽. 

 

금빛찬란한 글씨로 새긴 '천하대관(天下大觀)'이라는 벽면에서 따온 것인지 이 바위 절벽의 이름을 대관봉(大观峰)이라 부른다고 한다. 

 

태산에는 글을 새긴 돌이 2,200여 개소나 있어 마애석각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인데, 태산 정상의 석각만 258곳에 이른다. 석각 대부분은 역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행할 때의 제문, 사묘(寺廟)의 창건과 중수기, 태산을 칭송하는 시문들이다. 이곳에는 태산을 올랐던 공자와 이백, 사마천과 곽말약 등의 글귀도 새겨져 있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석각비문은 '당마애(唐磨崖)'라는 것으로 726년 9월에 당현종이 새긴 <천하대관 기태산명(天下大觀 紀泰山銘)>이라는 석각벽이다. 글씨를 모두 금박으로 입힌 이 석각벽은 높이가 13m가 넘고 넓이가 5m를 넘는다. 문장은 모두 24행이며, 각 행마다 51개의 글자가 있다. 서언을 포함한 글자의 수는 모두 1,008자라는데, 자료들마다 수자는 다 다르다.

 

이 비석은 당현종이 태산에서 봉선제를 올린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선인들의 비문이 태산의 위엄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과 당 시대에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이전까지는 모두 비밀에 붙였지만 현종은 하늘에 고했던 옥첩을 공개했다. 문장이 수려하고, 예서로 쓴 글씨체는 당대의 웅혼한 골격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어서, 당사와 당대의 서예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1982년 중국정부는 이 글자를 탁본하여 도금을 하기도 했다. 이 마애비의 서쪽에 있는 땅바닥에는, 원래 당현종을 따라왔던 국내외 대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지만 훼손되고 말았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 이름을 마애비에 새겼는데 글씨가 전혀 달라서 오히려 마애비의 격을 떨어뜨렸다고 한다.

 

 

 

 

 

주변에는 역대 인물들이 각종 서체를 동원하여 새겨 놓은 글귀들이 늘어서 있어 마치 거대한 서예전시회를 관람하는 듯한 느낌인데 글귀의 뜻을 하나하나 새겨보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당마애비 모서리에는 '壁立萬仞'(벽립만인: 만길 암벽이 섰구나), '天地同攸'(천지동유: 하늘과 땅이 같은 곳에 있네)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 위쪽에는 '星辰可摘(성진가적: 하늘의 별을 딸 만하도다)는 글을 새겼다.

 

그리고 '置身霄漢(치신소한: 몸을 하늘의 은하수에 둔 듯하네)와 더불어 '巖巖(암암)'이란 서각도 있다. 이는 바위처럼 굳센 기질과 의연함을 나타내며 호연지기와 상통하며 맹자의 의기를 기려 새겼다고 한다. 시경에도 '태산 암암(泰山巖巖)'이란 구절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위로는 '五岳之宗 興國同安'(오악지종 흥국동안 : 오악의 으뜸 태산은 나라를 흥케하고 함께 평안하리라)을 새겨 놓았다.

 

당마애 서쪽에는 '雲峯'(운봉: 구름 덮인 봉우리)이라 크게 새겨 글씨가 눈에 띈다. 그 아래엔 청 강희제의 '무진 2월 그믐 밤에 대정(岱頂)에서 잤다.'라는 2편의 시와 '삼가 선대 황제가 새긴 운봉(雲峯)이라는 큰 글자를 풀이한다.'라는 1편의 시가 새겨져 있다.

 

대관봉을 돌아서니 바로 하늘과 맞닿은 능선이 나타나고,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아 마주보는 두 봉우리 옥황정(玉皇頂)과 일관봉(日觀峰)이 시야를 채운다. 두 봉우리 위에는 전각들이 솟아 있다.

 

 

↓ 일관봉

 

 

 

 

동쪽의 일관봉(日觀峰)은 태산 일출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길다란 거석이 비스듬히 북쪽 하늘로 뻗어 마치 날카로운 검이 북쪽 하늘을 찌르는 것과 같다고 해서 '공북석(拱北石)'이라고 부르며, 바위의 형상이 바다를 탐험하는 형상과 같다고 해서 '탐해석(探海石)'이라 부르기도 한다.

 

일관봉 너머쪽의 능선에는 남쪽으로 공자의 나라 노나라를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첨노대(瞻魯臺)가 있다.

 

 

 

 

 

왼쪽의 높은 봉우리가 바로 해발 1,545m의 태산의 최고봉, 옥황상제를 모신 옥황정(玉皇頂)이 자리잡고 있다. 옥황정은 지리산보다 훨씬 낮고 금강산이나 설악산보다도 낮은 봉우리지만 사방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듯한 험준한 봉우리들를 거느리고 우뚝 솟았다.

 

옥황정 오르는 길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태산은 오악의 으뜸으로서 중국에서 가장 영험한 산이다. 동악인 태산은 생명을 잉태하는 산을 상징하며, 태산을 오르면 수명이 10년 연장되고 죽어서도 영생을 누린다고 믿어 해마다 봄이면 많은 중국인들은 태산을 오른다고 한다.

 

이 같은 믿음은 중국 도교의 천지창조 신화 속 주인공 반고(盤古)와 관련된다. 세계가 아직 하늘과 땅이 구분되지 않고 혼돈이었을 때 최초의 인간인 반고는 2개의 뿔, 2개의 어금니, 많은 털을 가진 몸으로 알에서 태어났다. 반고의 키가 자라면서 머리는 하늘을 떠 받치고 다리는 땅을 지탱하였다. 반고의 키가 거대하게 자라면서 하늘과 땅은 점점 멀어져 1만 8천 년 후에 오늘날과 같은 천지가 생겼다고 한다. 하늘과 땅을 분리한 그는 해·달·별·행성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바다를 넷으로 나누었다.

 

반고가 죽자 반고의 거대한 시체에서 우주가 생성되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태산이 되었고 그의 눈은 해와 달이 되었으며, 피는 강을 이루고 털은 자라서 풀과 나무가 되었다. 그의 땀은 강물로 변했으며 살은 흙이 되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기는 바람과 구름이 되고 목소리는 천둥이 되고 뼈는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태산의 정상, 옥황정은 옥황상제를 모신 사당이다. 옥황정에는 역대 제왕이 봉선의식을 거행하던 고등봉대(古登封臺)가 있다. 역대 제왕들은 대묘(岱廟)에서 봉선의식을 지내고 다시 태산 정상 옥황정 올라 옥황상제에게 의식을 치렀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하늘에 황제 등극을 고하고 국태민안을 비는 제례행사인 봉선의식을 올리기 시작한 이후로 12명의 황제가 올랐는데, 진시황의 아들 호해(胡亥), 한무제와 광무제, 당고종과 현종, 송진종과 휘종, 원 쿠빌라이, 청 강희제와 건륭제 등이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지냈다. 그리고 황제의 명령으로 72명의 제후국 왕들이 올라 봉선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봉(封)이란 태산 정상에 흙을 쌓아 둥근 제단을 만들고, 옥으로 만든 판에 원문을 적어 돌로 만든 상자에 봉하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내 그 공덕에 보답하는 것을 말한다. 선(禪)은 태산의 앞에 있는 작은 산에서 흙을 쌓아 사각형의 제단을 만들고 지신에게 제사를 지내 그 공덕에 보답하는 것을 말한다.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해가 뜨는 동악인 태산이 생명을 탄생하는 산으로 믿어졌기 때문이다. 생명의 탄생은 바로 번영과 연결된다. 태산에 올라 봉선의식을 올림으로써 명실상부한 천자(天子)가 되는 것이다. 봉선은 외형상 천제에게 공을 보고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복을 기원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신권을 빌어 통치를 강화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눈을 돌려 지나쳐온 산 아래쪽을 내려다 바라보니 태산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벽하사(碧霞祠)의 화려한 전각들이 시야를 채운다. 옥항정에서 옥황상제는 자신의 딸이자 태산의 여신인 벽하신군이 거처하는 벽하사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이다.

 

 

 

 

 

능선에 올라서니 이런 저런 바위와 석각을 배경으로 기년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빈다. 아쉽게도 사방에서 안개가 자욱해 태산의 진면목을 바라볼 길이 없다. 우뚝 솟은 옥항정과 일관봉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행렬만 보일뿐...

 

웅치천동(雄峙天東), 발지통천(拔地通天), 준극우천(峻極于天)... 바위 곳곳엔 태산의 높음을 기리는 서각들이 어지러운데, 나는 높은 봉우리에 낮게 피어난 꽃들에 눈길을 주기로 한다.

 

능선 너머 북쪽,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리고 핀 돌마타리가 안개 속에 노란 꽃을 피웠다.

 

 

 

 

 

대나물 하얀 꽃도 피었다.

 

 

 

 

일관봉을 넘어 첨로대 쪽으로도 다녀오고 싶지만, 가이드 봉일씨가 시간에 쫓기는 모습을 보여 그냥 생략하고 옥황정으로 바로 오르기로 한다.

 

 

 

 

 

옥황정 바로 아래, 길 옆에는 다시 서각을 한 바위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서각들마다 기념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야단법석이다.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혀서 세상을 살펴본다'는 뜻의 '仰觀俯察'(앙관부찰, '높은 곳에 올라 천지를 장엄히 바라보다'는 뜻의 '登高壯觀天地間'(등고장관천지간), '하늘을 떠받들고 해를 섬긴다'는 뜻의 '擎天捧日'(경천봉일), 모두 태산의 높음을 표현한 것이다.

 

 

 

 

 

옥황정으로 오르는 계단 못 미쳐 '오악독존(五嶽獨尊)'이라고 새긴 바위 앞에는 더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5위안짜리 중국 지폐에 도안으로 들어가 있어 더욱 유명해진 바위이다. 연이어 바위를 끌어안고 포즈를 취하는 사람 때문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을 기회가 오지 않는다.

 

바로 옆에는 작은 글씨로 '앙두천외(昻頭天外)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머리를 들어 하늘 바깥을 우러러보라.'

 

 

 

 

 

옥황정(玉皇頂)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 옥황정 바로 앞에는 아무런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서 있다. 태산이 너무 아름다워 글로는 표현할 길이 없어 아무것도 새기지 않았다고 하는 비석이다.

 

무자비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진시황이 대륙을 통일하고 BC 220년 전후 태산 정상에 올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는 뜻에서 세웠다는 설과, 한 무제가 BC 100년 전후 자신의 업적을 후대인들이 평가하라고 아무 글도 남기지 않았다는 설이그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자비 곁에는 무자비가 된 사연을 구구히 새겨놓았으니 말 많은 무자비가 되어버린 셈이다.

 

 

 

 

 

마침내 옥황정 입구에 올라 섰다.

 

옥황묘 입구는 '칙수옥황정(勅修玉皇頂)'이라고 써 놓았다. '칙수(勅修)'라니 아마도 '황제의 명에 따라 닦은' 건물임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봉천선지(封天禪地)라고 일컫는 도교의 발상지, 진시황 이후 72 제왕이 무릎을 꿇고 봉선(封禪)의식을 행한 곳으로 들어선다.

 

 

 

 

 

옥황대제를 모신 옥황정은 명나라 때 세웠다고 한다. 가운데엔 옥황상제, 왼쪽엔 관세음보살, 오른쪽엔 재신(財神)을 모시고 있다. 옥황상제는 중국의 수많은 황제를 발아래로 굽어보며 오랜 세월을 지켜왔다.

 

 

마당 가운데에는 태산의 정상 표석이 서 있고 주위에는 자물쇠들이 산더미처럼 채워져 걸려 있다. 무슨 간절함이 그리 많은 것인지... 아궁이에 불 넣듯 향을 사르니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어지러운 냄새가 역하다. 저러다 옥황상제께서 연기에 질식하시겠다 싶을 정도로...

 

청정해야 할 듯한 사당은 복을 구하려는 세속의 욕망들이 모여 시장바닥이 되었다. 50위안인가를 내면서 향을 사르고 100위안을 내고 옥황상제상 앞에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마당 오른쪽 전각엔 재신(財神)을 모셨다. 우리 나라에서 보지 못한, 극히 중국적인 신이다.

 

 

 

 

 

정면 건물에 모신 옥황대제상을 향해 셔터를 누르니 찍으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른다. 

  

 

 

 

 

옥황정까지 둘러보았으니 태산 구경은 다 한 것인가.

 

밖으로 나와 잠시 마주한 일관봉을 바라본다. 안개가 쉼없이 올라와 풍경을 지웠다 살렸다 하기를 되풀이한다. 밀려들고 물러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내려가는 길을 어디로 잡을까 고민한다. 왔던 길로 그냥 가자니 왠지 아쉽다.

 

 

 

 

 

내려오며 샛길로 들었더니 청제궁(靑帝宮)이다.

 

들러지는 않고 스쳐 지나온다. 청제는 동방을 다스리는 신이겠지만 이곳에는 옥황정의 남쪽에 자라잡고 있다. 청제궁은 중국 삼황오제 중 최고의 제왕이자 문명의 시조인 복희(伏羲) 상제를 모신 궁이다.

 

 

 

 

 

복희는 태호(太昊)로도 불리며 성씨는 풍(風)으로 전해진다. 진(陳)에 도읍을 정하고 150년 동안 제왕의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여러 문헌에 동이족으로 나오는 복희는 뱀의 몸에 사람의 머리를 하였다. 팔괘(八卦)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발명하여 어획·수렵(狩獵)의 방법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동이족 복희라는 이름은 박혁거세처럼 우리말 '밝'의 음차와 연관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복희의 딴이름이 '크게 밝다'는 뜻의'태호(太昊)'로 부르기도 하니 말이다.

 

청제궁 아래쪽으로 공자묘가 자리잡고 있다. 도교의 성지일 뿐 아니라 유교까지 아우르며 태산은 중국인들의 신앙의 중심의 되고 있다. 어쩐지 공자묘는 둘러봐야 할 것 같아 안으로 들어선다. 

 

 

 

 

 

사당 안의 풍경은 도교 사원이나 다를 것이 없다. 향불 피우는 연기가 자욱하고...

 

 

 

 

 

'만세사표(萬歲師表)'라는 커다란 청색 현판이 공자사당임을 일깨운다.

 

 

 

 

 

공자상 위에는 '인고유대(因高喩大)'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직역하면 "높은 곳으로 인하여 큰 것을 깨우친다."는 것이니 아마도 '등동산이소로(登東山而小魯)하고 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小天下)"라고 했던 공자의 호연지기 사상을 표현한 성어인 듯하다.

 

 

 

 

 

공자묘 오르는 길

 

 

 

 

 

공자묘 입구 패방

 

 

 

 

 

 

공자묘를 마지막으로 다시 하늘길을 되돌아 나간다. 하늘길은 여전히 세속의 욕망을 기원하는 인간의 행렬로 출렁인다.

 

태산의 안개와 구름이 걷히길 기대했건만 여전히 태산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기를 거부한다. 태산에 오르면 천하가 작다 했건만, 구름과 안개 속에 갇힌 세속의 풍경들만 보았을 뿐 태산의 진면목을 보지도 못하고 하산을 한다.

 

11시가 넘어 케이블카를 타고 도화곡으로 내려선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