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만 여행

중국 산동 (7) 취푸(곡부) 공묘(孔廟), 13비정과 대성전

모산재 2010. 9. 11. 16:35

 

태산을 내려와 점심을 먹고 버스는 곡부를 향해 출발한다. 피로를 느끼며 졸음에 빠졌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버스는 낮은 건물들만 편안하게 늘어선 도시의 거리로 들어서서 달리고 있다. 오른쪽으로 검은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려 만든 성이 보인다.

 

 

2시 25분, 공자의 고향이자 8백 년 노나라의 수도였던 취푸(曲阜)에 도착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숨이 막힐 정도로 햇살이 뜨겁고 습도가 높다.

 

 

 

성곽의 남쪽 유객복무중심과 행단극장이 있는 거리에서 성을 지나 공자의 사당인 공묘(孔廟)로 향한다. 공묘는 공자 가문의 저택 공부(孔府), 공자 가문의 묘지 공림(孔林과 함께 1994년 유네스코 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공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취푸의 이 세 유적을 '삼공(三孔)'이라고 하는데, 모두 걸어서 다닐 만한 가까운 거리에 있다. 특히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공묘와 공부에 가기 위해서는 궐리(闕里)로 들어서야 한다. 공자님이 살던 곳을 궁궐과 동일시하여 '궁궐 마을'이라는 뜻의 궐리(闕里)로 불린다.

 

 

 

곡부(曲阜) 안내도

 

 

 

 

취푸 일대에 노나라가 세워진 것은 주나라 때이다.

강태공의 보필로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 무왕은 재위 6년 만에 승하하고 그의 맏아들 성왕이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이 나이 어린 성왕을 도와 7년 동안 섭정하면서 낙양을 건설하고, 넓은 땅에 71개의 제후국을 봉하고, 친척들에게 53개를 분봉한 봉건제도를 시행했다.(이 시기를 서주(西周) 역사상 황금시대인 성강지치(成康之治)라 한다.)

그 가운데 주공의 장자인 백금(伯禽)은 지금의 산동성 취푸(곡부) 일대를 분봉 받아 노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나중 이 노나라가 바로 공자의 고향이 된다.

 

 

 

공묘로 들어서는 거리는 관광객을 맞이하기 위한 상가가 길게 늘어서 있다.

 

공자님 마을 답게 논어의 여러 구절을 인용한 기념품들을 많이 늘어 놓고 있다. 찌는 듯 후텁지근한 날씨에 등줄기를 따라 땀이 흘러내리는데, 사람들은 공자님 말씀을 적은 부채들을 사서 열을 식힌다.

 

 

 

 

 

 

궐리를 지나 모퉁이를 돌자 오른쪽으로 공묘 입구가 나타난다. 붉은 글씨로 '금성옥진(金聲玉振)'이라고 쓴 석조 문, 패방(牌坊)이 보인다. 패방은 망대가 있고 문짝이 없는 대문 모양의 중국 특유의 건축물로 지붕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

 

 

패방 바깥쪽에는 공묘의 정문으로 성곽문인 앙성문(仰聖門)이 있지만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여 담지 못했다.

 

 

패방 옆에는 '곡부 명고성 3공 여유구(曲阜明古城 三孔旅遊區)'라는 여행지 이름을 새긴 비석이 있고 국가급 관광지 등급이 5개의 A로 표시되어 있다. 공자의 고향 취푸는 40위권의 관광지일 만큼 비중이 높다고 한다.

 

 

 

 

 

공묘의 가장 바깥문인 패방 금성옥진(金聲玉振)은 명대(1538) 건축물이라 한다. 기둥 위에 올려 놓은 석수 두 마리가 특이하여 눈길을 끈다. '조천후(朝天吼)'라는 전설적인 동물로 간밤에 일어났던 일이나 억울한 사연을 매일 아침 하늘에 고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길에는 영성문(楹星門), 성시문(聖時門), 홍도문(弘道門), 대중문(大中門), 동교문(同交門) 등 여러 개의 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금성옥진(金聲玉振)'이란 무엇일까...?

 

 

 

 

'금성옥진(金聲玉振)'은 원래 중국 전통음악에서 '팔음(八音)'을 합주할 때 먼저 편종 소리를 내고 편경을 울려 마무리하는 것을 일컬었던 말인데, 보통은 '시가(詩歌)나 음악의 아름다운 가락'을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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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음(八音)이란 악기를 재료에 따라 쇠(金部)··돌(石部)··명주실(絲部)··대나무(竹部)··바가지(匏部)·흙(土部)·가죽(革部)·나무(木部) 등으로 나눈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금부에는 편종·, 석부에는 편경·, 사부에는·비파 , 죽부에는 피리·, 포부에는 생황, 토부에는 훈·, 혁부에는 장구, 목부에는 박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말은 공자의 사상을 일컫는 말로 유래가 있다. 일찍이 맹자는 스승 공자에 대해 "공자를 일컬어 집대성한 인물이라고 얘기하는데, 집대성이라는 것은 바로 편종 소리를 내고 편경이 울린다(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者 金聲而玉振之也)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후 금성옥진은 '조화와 융합'의 의미로, 또는 지덕의 합일이라는 공자의 사상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어 나타나 영성문(楹星門)은 공묘의 제1문이다. '영성(楹星)'은 직역하면 '기둥별'이니 공자의 사상을 표현한 말인 듯 싶다. 편액은 건륭제의 글씨라고 한다. 명나라의 영락제가 세웠을 때(1415)는 목조문이었으나, 건륭제 때에 석조 기둥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표석(망주석) 모양의 기둥 위에 석수(石獸)가 아니라 인물상이 올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영성문을 지나면 패방 '태화원기(太和元氣)'가 나타난다. '태화원기'는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기운'이니 공자의 가르침이 이와 같다는 뜻일 것이다.

 

 

 

 

 

또 하나의 패방 지성묘(至星廟). '성스러운 공자의 사당으로 들어선다'는 뜻이다.

 

뒤로는 공묘의 제2문 성시문(聖時門)이 보인다. 맹자(孟子)의 "孔子 聖之時者也."에서 이름을 딴 이 문은 1415년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세워졌고 청 옹제가 보수하였다 한다.

 

 

 

 

 

성시문을 지나면 공묘에서 가장 넓은 정원이 나타난다. 정원에는 수백 년 된 측백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공묘가 있는 자리는 원래 노나라의 제후 애공(哀公)의 집이었는데, 공자가 죽은 다음해(BC 476년)에 애공이 공자의 사당으로 개축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의하던 행단에 대성전을 세운 것으로 시작하여 역대 황제의 후원으로 규모가 커졌고, 청대(清代)에 이르러 옹정제의 명으로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을 하여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 3대 고건축물로 꼽히는 공묘는 황궁의 규모로 건설되었다. 남북을 축으로 세 개의 길로 분할하여 남북 630m 동서 140m의 넓이를 가지고 있다. 대성전과 규문각을 중심으로 앞뒤로 9개의 전각과 뜰이 있고, 건물이 전체 466칸에 이르며 문방(門坊) 54개 어비정(御碑亭) 13개로 건축 규모가 웅장하다.

 

 

 

공묘(孔庙)를 관람할 때는 중앙의 규문각(奎文阁), 13비정(十三碑亭), 행단(杏坛), 대성전(大成殿) 및 역대 비석을 소장한 방 등의 순서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

 

 

 

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걱는데 갑자기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소리. 부리가 긴 한 쌍의 새가 정원 풀밭으로 내려 앉으며 마주 보고 우짖는다.

 

 

 

 

 

정원을 지나자 벽수교(碧水橋)라는 다리가 나타난다. 푸른 물이 흐르는 개울을 지난다고 붙여진 다리이지만 개울은 그리 볼 게 없다.

 

다리는 지붕처럼 가운데가 높게 솟아 있어, 높은 마루를 넘어서며 뒤돌아서서 이전의 나를 돌아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벽수교를 건너면 공묘의 제3문인 홍도문(弘道門)이 나타난다.

 

 

 

 

홍도문은 명 홍무제 주원장 때(1377) 세워졌다. 문 이름 '홍도문'은 청 옹정제가 <논어> '위령공편'의 "인능홍도 비도홍인(人能弘道 非道弘人)"이라는 구절에서 따서 붙인 것이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홍도문을 지나면 공묘 제4문으로 청 건륭제의 친필 현판이 걸린 대중문(大中門),  그리고 제5문으로 "오동문 행동륜(吾同文 行同倫)이라는 예기의 글에서 따왔다는 동문문(同文門)이 나타난다. 

 

동문문(同文門)은 공묘의 다섯번째 문이지만 독립된 건축이며 동서로 뻗은 성벽이 없다는 것이 다른 문과 다르다. 동문문을 들어서면 뜰에는 명의 홍무(洪武), 영락(永樂), 성화(成化), 홍치(弘治) 등 여러 황제가 건립한 돌비석이 있다. 

 

 

 

 

그 중 1468년 명(銘) 성화제(헌종)의 친필로 새겨 세운 성화비(成化碑)가 유명한데, 취푸에 있는 수많은 비석 중 문장과 글씨가 가장 빼어나다고 한다. 그럼에도 13비정(十三碑亭)과는 달리 비바람을 막아주는 정자가 없이 노출되어 있는데, 아마도 청과의 안 좋았던 역사적 관계를 반영한 듯하다.

 

 

빗돌 중앙에 문화대혁명이 남긴 커다란 상처가 보인다.

 

 

 

 

황제가 글씨를 쓴 돌비석은 오구(烏龜, 거북이의 한 종류)의 등위에 세워져 있다. 오구(烏龜)는 용의 자손이지만 힘이 세어서 비석을 지고 있다고 한다.

 

 

 

 

성화비 옆에는 명 홍무제 주원장이 세운 홍무비정(洪武碑亭)과 비석이 있다. 1371년에 처음 세웠으나 소실되고 1503년에 다시 세워졌는데, 현재의 건물은 근래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유주(乳株)가 저렇게 부뤂어 오른 걸까. 측백나무의 모습이 이채롭다.

 

 

 

 

그리고 뜰을 지나 3층 누각으로 지은 누각 규문각(奎文閣)이 나타난다. 공묘의 제6문으로 규문각(奎文閣)이란 현판 글씨는 청 건륭제의 친필이다. 

 

 

 

 

규문각은 역대 황제들이 내린 서적을 수장하는 건물로 송 진종 때(1018) 건립했다. 원래 장서루(藏書樓)라고 하였다가 금나라 때(1191) 중수하면서 규장각(奎章閣)이라 개칭하였다. 높이는 23m이고 폭은 30m이다.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지었는데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다고 한다. 대성전 침전과 함께 공묘 3대 건축물이며, 중국 고대 10대 명루(名樓)의 하나로 꼽힌다. 2층에 난간이 있으며, 원형 주춧돌 위에 석북을 놓고 팔각형 기둥을 세운 것이 이채롭다.

 

아쉽게도 내부에 소장하고 있던 귀중한 자료들은 문화대혁명 때 다 불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건물이 온전히 남았으니 다행스럽다.

 

 

 

 

 

규문각 옆 작은 문을 통과하면 황금색 지붕을 인 13개의 정자가 있는 뜰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곳을 '13비정(十三碑亭)'이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당, 금, 원, 명, 청대에 걸쳐 수백 기의 비석이 있으며 비석의 내용은 대부분 황제의 시호, 가봉(加封) 기록 및 공자를 제축한 것과 공묘의 중수 기록을 담고 있다.

 

 

 

공묘에서 독특한 인상을 주는 것은 사방이 수백 년 된 측백나무 숲이라는 점과 비석이 즐비하다는 점이다.

 

공묘 안에는 13채의 비정(碑亭)이 있고, 53개의 거대한 비석을 포함한 총 800여 개에 달하는 비석이 있다. 그래서 '비림(碑林)'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시안의 비림(西安碑林)보다 더 많은 비석이 있어 중국 최다라고 한다.

 

이 많은 비석 중에 황제가 세운 것만 13개로 여기에는 정자를 세워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였다. 그래서 이들을 13비정이라 부른다. 가장 오래된 비석은 688년 당고종에 세운 것이고,가장 큰 비석은 청 강희제가 베이징 시산(서산)에서 운반해온 것으로 무게가 65톤에 이른다고 한다.

 

 

뜰에 있는 측백나무가 눈길을 끈다.

 

 

 

 

황제를 상징하는 색, 비정의 찬란한 황금색 지붕이 아름답다.

 

 

 

 

그리고 13비정의 가장 큰 비석.

 

 

 

 

청 강희제가 베이징 시산(西山)에서 옮겨온 것이라는 데 무게가 65톤에 이른다고 한다. 취푸(曲阜)까지 650km에 달하는 거리를 어떻게 운반할 수 있었는지가 수수께끼인데, 겨울에 물을 뿌리고 얼음판을 만들어 운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공묘의 제7문으로 마지막 문이자 가장 큰 문인 대성문을 지나면 본전 대성전이 있는 뜰로 들어서게 된다.

 

 

대성전 앞에 '행단(杏壇)'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는 공자가 노년에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다. 1018년 이전에는 대성전이 바로 이 행단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행단 편액은 건륭제의 글씨라고 한다.

 

 

 

 

커다란 살구나무가 있어 행단이라고 불렸을 터인데, 옛 모습을 떠올릴 만한 살구나무는 없고 행단 앞마당에 양쪽으로 두 그루의 작은 살구나무를 심어 놓은 것이 있어 눈길을 끈다.

 

행단(杏坛) 옆에는 전나무 고목이 서 있는데,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라고 쓰인 비석이 그 곁에 있다. '공자가 직접 심은 전나무'라는 뜻으로, 청나라 때 타 버렸으나 옹정제 연간 그루터기에서 다시 자라난 줄기가 지금의 모습으로 컸다고 한다.

 

이 나무에는 공자 가문과 왕조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행단을 지나면 웅장한 건물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나타난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이다.

 

높다란 기단 위에 금빛 찬란한 지붕의 대성전은 황제의 궁전인 자금성을 떠올리게 한다. 대성전은 중국에서 자금성 외에 유일하게 황금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규문각이 세워졌던 1018년 '선성전(宣聖殿)'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으며, 남송 휘종이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친필 편액을 내리면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의 대성전은 청 옹정(雍正) 2년인 1724년에 건립한 것이며 전면의 대성전 편액은 옹정제(雍正皇帝)의 친필이다.

 

 

 

 

 

공묘의 본전인 대성전(大成殿)은 북경 고궁의 태화전에 이은 제 2의 대건축으로 높이 24.8m, 폭 45.7m, 길이가 24.9m이다. 대성전이란 전각 이름은 '금성옥진(金聲玉振)'으로 비유하며 맹자가 말한 '공자지위 집대성야(孔子之謂集大成也)' 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대성전의 28개의 돌기둥 가운데 앞쪽의 10개 기둥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가지고 구름과 파도 속에 비상하는 문양을 도드라지게 조각했고, 양쪽과 뒤쪽의 18개의 팔각기둥에는 매 기둥마다 72마리의 용을 음각하였다. 기둥 1개에 있는 72마리의 용은 공자가 72세에 서거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총 1,296필의 용은 중국의 전설속에 나오는 용의 총 수로서 모든 용이 공부자님을 보호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기둥은 황궁에도 없으므로 청 건륭제가 왔을 때는 붉은 천으로 기둥을 가렸다고 한다.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황궁에만 새길 수 있는 것, 공자의 지위가 황제와 같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대성전 안 중앙에는 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강희제가 쓴 '만세사표(萬世師表)', 광서제가 쓴 '사문재자(斯文在玆)'라는 청색 현판 아래 금빛 찬란한 닷집이 있고, 그 속에 12류의 면류관에 12장복을 입고 까만 진규(鎭圭)를 들어 제왕의격식을 갖추었다. 앞에는 '지성선사공자신위(至聖先師孔子神位)'라는 위패가 있다.

 

공자상은 한나라 때 처음 봉안하였으며, 당 현종 때 문선왕으로 봉하며 소상에 곤룡포가 입혀졌다. 1960년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으나 1982년에 복원하였다고 한다.

 

동서 양편으로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네 위의 상을 배향했는데 모두 9류의 면류관을 썼다. 

 

 

 

 

↓ 대성전의 지붕과 잡상. 궁궐에 준하는 모습이다. 

 

 

 

 

대성전 뒤에는 공자의 부인인 올관씨(兀官氏)를 모신 사당인 침전(寢殿)이 있다. 대성문과 닮은 꼴의 이 건물은 북송 때 창건하여 청대에 개축하였다 한다.

 

 

침전 뒤에는 성적전(聖迹殿)이 있는데, 이 곳에는 공자의 일생을 새긴 석각화 120장과 공자 화상이 모여 있다. 그 중의 하나인 '공자행교상'은 진대의 화가인 고개자(顧愾子)의 작품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동로에는 '고택정(古宅井)'이라고 하는 우물이 있고 공자가 아들 공리(孔鯉)를 교육시켰다는 시례당(詩禮堂)이 있다. 고택정의 동편에는 노벽(魯壁)이 있다. 진시황 9년(기원전 213년) 분서갱유 때에 벽을 2중으로 쌓고 상서(尙書), 예기(禮記), 논어(論語), 효경(孝經) 등의 책을 숨겨 놓았다가 한나라 경제(景帝) 때에 발견된다.

 

 

이렇게 공묘를 돌아본 다음, 공자 가문의 장원  공부로 향한다. 공부는 공묘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