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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대만 여행

중국 산동 (8) 취푸(곡부) 공부(孔府), 공자 가문의 천하제일 장원

by 모산재 2010. 9. 12.

 

공부(孔府)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오후 반나절을 지날 무렵의 땡볕이 몹시 뜨겁게 내리쬔다. 등줄기에서는 땀이 흘러내리고 숨은 턱에 닿을 듯하다. 땀을 잘 배출하던 등산복 바지가 자꾸만 다리에 감기는 듯한 느낌을 이곳에서 처음 느낀다.

 

 

 

길가 담 위의 기와에는 앵초 종류로 보이는 풀들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는데, 꽃이 진 지 오래인듯 씨방만 달려 있다.

 

 

 

 

공부(孔府)는 공묘 바로 뒤쪽에서 살짝 동쪽으로 비켜선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공묘의 옆문으로 나와 몇 분만 걸으면 갈 수 있다.

 

 

↓ 곡부 관광 안내도

 

 

 

 

공부는 공자 가문의 자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저택과 취푸(곡부) 지역을 다스리는 관청이 결합된 일종의 장원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유지되어온 봉건적 장원이며, 황궁 다음으로 큰 저택으로 명·청 시대 '천하 제일의 가옥'이라 불린다. 1038년에 세워져, 명과 청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흔히 취푸를 공자의 고향이라고 알고 있지만, 엄격히 말하면 공자의 고향은 곡부가 아니라 사수(泗水)현이다. 사수현은 취푸에서도 택시로 20분 이상 걸리는 곳인데 워낙 외진 곳이라 그곳 사람들도 공자의 고향임을 잘 모른다고 한다. 공자는 그곳의 굴, 부자동(夫子洞)이란 동굴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공자 어머니는 공자를 낳고 너무 못생겨서 공자를 버렸다고 전한다.

 

 

↓ 공부(孔府)의 정문인 대문(大門)

 

 

 

 

역대 황제들은 모두 공자를 존경하여 공자의 자손을 제후와 동등한 지위로 존중하였다. 공부의 역사는 송나라 인종이 공자의 46대손인 공종원(孔宗願)에게 세습 벼슬인 '연성공(衍聖公)'에 봉하고 곡부 지역을 다스리게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1038년에 공부(孔府)가 지어졌고, 명(明)대에도 황제의 명에 의해 연성공부(衍聖公府)로 봉해지고 증축이 계속되었다. 그 후 청대를 거치면서 현재와 같이 공무를 집행하는 곳, 가족들이 거주하는 집, 후원과 책을 읽고 공부하는 곳, 손님을 접견하는 곳 등 모두 463칸의 공부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마지막 연성공인 77대손 공덕성이 문화혁명 당시 대만으로 피신한 뒤로 반세기 넘게 주인 없는 집이 됐다.

 

 

↓ 공부의 두번째 문, 이문(二門)

 

 

 

 

공부의 건물은 앞쪽에는 관청, 뒤쪽으로는 주택과 화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광문(重光門)에서부터 앞쪽에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관아가 자리잡고 있고, 내택문(內宅門)을 지나 뒤쪽으로는 살림집인 안채가 자리잡고 있다.

 

 

↓ 공부 건물 배치도

 

 

 

 

정문을 지나 뜰을 지나면 세번째 문인 중광문(重光門)이 나온다.

 

1503년에 세워진 이 문은 기둥을 지지한 포고석이 북처럼 크고 비석에 지붕을 씌운 듯한 모습이 특이하다. 명 세종(朱厚憁)이 '은사중광(恩賜重光)'이란 편액을 내려 중광문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영문으로는 'Gate of Double Glory'로 번역해 놓았다.

 

 

↓'은사중광(恩賜重光)이라고 새긴 중광문 현판

 

 

 

 

칙사를 맞이한다든가 공자를 기리는 중요한 의식 때에만 열리고 작위가 있는 제후만 통행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닫혀 있어 '색문(塞門)'이라고 불린다.

 

어찌된 일인지 중광문을 찍은 사진이 없다...

 

 

중광문을 지나면 공부의 관아(官衙)가 펼쳐진다. 관청은 연성공이 공무를 집행했던 대당(大堂)이 중심을 차지하고, 대당 앞 동서 양 옆으로 육부 관아가 늘어서 있다. 대당 뒤로도 이당(二堂)과 삼당(三堂)이라는 건물이 차례로 서 있는데, 모두 연성공의 공무를 보던 관저이다.

 

대당(大堂)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데 연성공이 중요한 의식을 행하거나 정부의 관리들을 맞던 곳이다. 이당(二堂)은 5개의 방으로 되어 있으며 공문을 받고 발송하거나 연성공을 거들던 관원의 집무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삼당(三堂)은 이당의 뒤에 있는데 가족 내부의 일들을 처리하던 곳으로 동쪽의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객실로 청대 말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 대당(大堂) 전경

 

 

 

↓ 단청 흔적이 남아 있는 대당(大堂) 천장

 

 

 

 

공씨 일가는 취푸에서 왕족 못지 않은 대접을 받았지만 8살이 될 때까지 후원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하며 공자의 후예에 걸맞는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삼당(三堂)은 문중 내부의 규율을 세우고 처벌을 하는 기능을 하였다고 하는데, 동쪽에는 다음 사진처럼 처벌을 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원기 형이 깊게 골이 패어진 석상에 꿇어 앉아 벌을 받는 시늉을 한다. 실제로 앉아보면 정강이뼈가 몹시 아프다.

 

 

 

 

마지막 공적 기관인 삼당(三堂)의 뒤쪽 좁은 통로를 지나가면 안채인 전상방(前上房) 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는 특이한 벽화가 그려져 있어 눈길을 끄는데, 이를 '영벽(影壁)'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화려한 채색으로 그려진 힘찬 동물. 후원 헛담에 그려진 이 동물을 '탐(貪)'이라고 한다. 

 

용의 머리에 개의 몸, 원숭이 꼬리, 기린의 피부, 뱀의 비늘을 가졌다는 탐의 발굽은 영락없는 소다. 포효하는 호랑이나 사자 같은 모습인데 뜨거운 태양을 집어삼킬 듯할 자세다. 지상의 모든것을 먹어치우고 자기자신마져 먹어버려서 세상은 '無'만이 남게 되었다고도 하고,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삼키려고 돌진하다가 동해에 빠져죽었다고 하는 과욕과 흉악 무도의 상징이다. 

 

공자 집안의 사람은 안채에서 나오려면 꼭 거쳐야 하는 이곳을 드날 때마다 "公爺過貪了(그대여,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마시오)"라고 외쳐야 했다고 한다. 과욕을 경계하고자 하는 가훈을 담은 걸개그림인 셈이다.

 

 

 

이 후원으로 들어서는 문을 '내택문(內宅門)'이라 하는데, 공부의 안채인 후원과 관아인 전원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내택문 내에는 가문의 연회 등을 집전하던 전상방(前上房), 가족의 윗어른 및 처녀들이 살던 전당루(前堂樓), 후당루(後堂樓), 내택의 뒤에 있으면서 '철산원(鐵山園)'이라고도 불리는 후화원(後花園)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곳 건물 안은 들어갈 수 없으며 다만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만 허용되어 있다. 제일 안쪽의 정원에는 공자 가문을 소개한 자료관이 마련되어 있다.

 

공부가 보관하고 있는 문화재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건륭제가 하사한 '상주십기(商周十器)'라고 하는데, 궁궐에서 관혼상제 등의 연회에서 사용한 청동기물이라 한다. 나중에야 안 내용이라 주목하지 못해 아쉽다.

 

생활공간인 후당루(後堂樓). 이곳은 77대 연성공 공덕성(孔德成)이 문화대혁명으로 대만으로 피신하기까지 살았던 곳이다.

 

 

 

↓ 후당루 내부 모습

 

 

 

 

공부의 맨 뒤쪽에 있는 건물은 후오간(後五間)으로 일꾼들이 거처하는 공간이다. 후화원(後花園)은 몇 가지 꽃나무들이 있을 뿐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정원이다.

 

 

 

무더위 속에 공자가문의 집들을 휭하니 둘러보고는 공자가문의 공동묘지인 공림(孔林)으로 향한다. 공부의 북쪽 담장을 끼고 동쪽으로 나 있는 넓은 길을 따라 걸으니 네거리가 나온다.

 

걷는 길이 왜 이렇게 편하게 느껴지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거리의 건물들은 모두 2층을 넘지 않는다. 도시라는 느낌보다 그냥 시골이라는 느낌이 절로 나는 풍경이다.

 

나중에야 공자를 존숭하는 취푸(곡부) 특유의 문화적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도시 내의 모든 건물의 높이를 공묘의 대성전과 공자 가문의 저택의 높이를 초과할 수 없도록 규정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묘(顔廟)와 주공묘(周公廟)가 이 네거리 가까이 있다는데(안묘는 아마도 저 사람들이 있는 담 너머쪽, 주공묘는 그 대각선 방향 어디쯤) 자유여행이 아닌지라 어떻게 찾아볼 엄두도 못내고 지나친다.

 

공자의 도시여서 주민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다니는 등 엄격할 줄 알았는데, 길모퉁이 나무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구애되는 모습은 아닌 듯하다. 중국의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남자들은 웃통을 벗어부친 모습이다.

 

 

 

 

네거리에서 북쪽 방향인 왼쪽으로 꺾어드니 바로 공림으로 가는 길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