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섬 여행

청산도 슬로길 (1) 도청항에서 도락리까지

모산재 2010. 8. 16. 22:47

 

대청도와 소청도 여행을 하기로 하고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인천행 급행전철 속에서 풍랑으로 배가 뜨지 않는다는 갑작스런 연락을 받는다.

 

어찌하나 막막해 하다가 청산도로 가자고 마음 먹는다. 겨울섬만 보았지 여름 청산도는 본 적이 없지 않느냐. 걷기에 참 좋은 섬인데 한번 느긋하게 걸어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용산으로 되돌아가서 KTX 타고 광주로, 광주에서 완도로... 그렇게 해서 완도항에 도착하니 오후 네 시가 넘었다. 배가 뜰까 걱정스러웠는데 다행스럽게 물결은 잔잔한 편이다. 인터넷으로 배편을 검색할 때는 5시 20분이었던 마지막 배가 6시 20분으로 바뀌어 있다. 무료한 시간 청산도 안내 팸플릿을 구해 여행 코스를 구상해본다.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로 걷기 열풍이 있더니, 청산도에도 슬로길이라는 게 생겼다. 두 해 전 겨울에 찾았을 때는 알려지지 않았던 길인데, 섬의 남쪽으로 모두 세 코스로 나누어 놓았다.

 

 

완도항을 출발, 천연기념물인 주도상록수림과 멀어지고 있다.

 

 

 

 

 

구름에 덮인 완도

 

 

 

 

 

가까워지는 청산도. 초열흘의 낮달이 떴다.

 

 

 

 

 

 

장도(진섬)를 지나니, 해식 절벽이 아름답다운 지초도가 나타난다.

 

 

 

 

 

 

완도항을 출발한 지 40여 분이 지나 청산도의 관문 도청항으로 들어선다.

 

 

 

 

 

도청항에서 내려 먼저 숙소를 정한다. 선착장 부근, 이름만 모텔인 허름한 숙소... 아직은 본격적인 휴가철이 아니어서 숙박비는 싸다.(3만 원)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근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한 뒤 배낭을 메고 슬로길 걷기에 나선다. 먼저 지도를 확인해 본다.

 

이곳 선착장에 비치된 팜플릿은 완도 선착장의 팜플릿의 3코스와는 달리 6코스로 세분해 놓았다. 그 중 3코스는 원래 최고봉 매봉산능선을 타고 상서리로 가던 길이었던 것을 청계리를 지나 신흥리로 가는 길로 아예 바꾸어 놓았다.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정보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제주 올레길에 자극받아 바쁘게 마련한 탓에 이랬다 저랬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곳 도청항에서부터 동쪽 끝 항도(목섬)까지 다 걸었으면 좋겠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 걷기로 한다.

 

 

↓ 6코스로 세분화한 슬로길. 북쪽의 슬로길 2구간은 아직 미개통이다.

 

 

 

 

 

아시아 최초로 2008년 슬로 시티(Slow city)에 가입한 청산도는 지난 4월 23일 간의 슬로우 걷기 축제를 벌였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섬을 찾앗다고 한다. 이 때 배가 닿는 도청항에서 시작해 당리-권덕리-범바위-장게미해안-매봉산-상서리를 거쳐 항도(목섬)까지 이어지는 약 20km의 둘레길 코스가 공개되었다고 한다.

 

 

 

도청항의 아침은 쾌청하다. 파란 하늘에 살짝 두터운 구름이 부분적으로 떠 있으니 걷기에 참 좋은 날씨다. 작은배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는 호수 같은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다. 

 

 

 

 

 

어째서 도청항일까.

 

원래 이곳은 불목리라 불렸으나, 세미를 징수하기 위한 국세미 도봉청(國稅米都奉廳)이 설치되었고 조선 말기 도봉청이 폐지되면서 도청리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청산도 처녀 흰쌀 서 말 못 먹고 시집간다."고 할 정도로 쌀이 귀한 섬에서 웬 국세미를 챙기는 겼을까. 아니나 다를까, 고을 수령들이 세미를 빌미로 수탈이 몹시 심했다고 한다.

 

 

 

슬로길의 시작은 섬의 중앙으로 관통하는 차도를 두고 선착장 안 호수 같은 바다를 끼고 도락리로 향하는 길이다. 멀리 능선의 만곡부에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선명하게 보인다.

 

 

 

 

 

도청항 출발점에는 '느림의 종'을 걸어 놓았다. 슬로길을 출발한다는 뜻에서 종을 울렸으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종을 울릴 손잡이줄이 없다.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종소리를 들으면 출발한다면 참 유쾌한 추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왼쪽으로 직진하는 차도를 두고 오른쪽 해안길을 따라 도락리로 길은 이어진다.

 

 

 

 

 

길바닥에는 슬로길로 이끄는 청색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슬로길 내내 화살표를 확인할 수 있다.

 

 

잔잔한 바다를 끼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노라면 금세 도락리 마을에 도착한다.

 

원래 도락리는 언덕 위에 있는 당리와 같은 마을로 함께 당락리로 불렸다고 하는데 마을이 커지면서 분리되었고 이름을 도락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여야 한다는 유교 사상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라 하니 이 외딴 섬에도 유교사상이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이곳 마을은 청산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형성된 탓에 상서리나 동촌리 등 다른 마을들처럼 돌담이 별로 보이지 않고 시멘트 담이 시야를 채운다. 그래도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예스런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숨바꼭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하는 동심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슬로길의 일부인 도락리 골목길 골목 담벼락에는 섬사람들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어 발길을 붙든다.

 

 

 

 

 

한복을 입은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든 가운데 열리는 초등학교 운동회 모습을 담은 사진도 걸렸고, 선한 눈매에의 단발머리 소녀들이 졸업을 앞두고 찍은 기념 사진도 내걸렸다. 잠시만이라도 사라져 버린 시간들을 거슬러 옛 추억에 잠길 만하다.

 

 

 

 

 

 

골목길 옆 외양간에 소가 보여 들려다보고 있는데, 골목에서 주인 할아버지가 나타나 인사를 나눈다.

 

마당 전체를 외양간으로 만들어 이렇게 많은 소를 키우고 있다. 귀에 인식표를 단 모습이 슬로시티와는 맞지 않는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순한 송아지의 눈매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산에 소를 풀어 놓고 먹이던 어린 시절 추억의 풍경이 자꾸 떠오른다.

 

 

 

 

 

 

 

마을을 지나 해변 솔숲이 보이는 들가에는 '동구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그런데 예스런 우물의 모습을 기대했는데 둥글게 다듬은 돌확을 설치해 놓은 현대적인 모습이어서 실망스럽다. 바로 이 우물의 이름을 따서 이곳 도락리를 지나는 길을 '동구정길'이라고 이름 붙여 놓았는데, 그래서 별로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해변 솔숲과 항아리처럼 만을 이룬 해안선이 아름답다. 해안에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우뚝 솟은 능선 위에 영화 '서편제' 촬영지와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이 하늘을 이고 서 있는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다.

 

 

 

 

 

 

솔숲 그늘의 풀밭에는 가는보리풀(호밀풀)인지 쥐보리인지 구별이 어려운 풀들이 군락을 이루고 꽃을 피우고 있고

 

 

 

 

 

이곳 남부 해안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마편초도 곳곳에서 희미한 꽃을 피우고 있다. 

 

 

 

 

 

방가지똥은 어째서 노란 꽃이 아닌 흰 꽃을 피웠을까.

 

 

 

 

 

 

솔숲을 벗어나 당리로 가는 농로로 들어선다.

 

이곳에서는 제초제나 살충제 등의 농약을 치지 않는지 논에는 논고동(우렁이)들이 바글바글하다.

 

 

 

 

 

벼를 심지 않은 무논엔 파란 물달개비꽃이 피었고 그곳도 우렁이들 세상이다. 물풀들엔 우렁이 붉은 알이 꽃처럼 달렸다.

 

 

 

 

 

 

논언덕엔 '땅찔레'라고 불렀던 돌가시나무 하얀 꽃이 피었다.

 

 

 

 

 

이렇게 자연 관찰을 즐기며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마을 아저씨 한 분이 어느 결에 다가와서 좋은 사진 많이 찍었느냐고 말을 건넨다. 그리곤 청산도 자랑을 한다. 관광지가 된 마을에 자부심을 느끼는 모양이니 예전 청산도 사람의 모습은 아니다. 구릿빛 얼굴이지만 시골 사람답지 않게 팽팽하고 윤택한 피부를 가졌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동이를 든 아주머니와 리어카를 끄는 아저씨가 차례로 와서 만나 함께 마을로 사라진다.

 

 

 

 

 

 

당리 '서편제' 촬영지와 '봄의 왈츠' 세트장이 있는 언덕으로 향하는 이 길은 청산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의 하나이다.

 

단조로운 녹색으로만 가득한 들판길, 지지난해 겨울에도 걸었던 이 길을 걸으며 잠시 아쉬운 마음이 된다. 봄이나 가을에 왔으면 또 얼마나 좋았을까. 청보리나 유채꽃이 넘실거리는 풍경 속에 잠겨 걷는다면...? 그도 아니면 황금 이삭 물결치고 메뚜기 뛰는 속을 걷는다면 얼마나 행복하리...

 

 

 

 

 

 

쇠비름이 이토록 예쁜 꽃들을 피웠다. 사촌인 원예종 채송화보다 나는 이 쇠비름 꽃이 더 예쁘다고 생각한다.

 

 

 

 

 

 

언덕을 올라설 무렵 뒤돌아 서서 도락리 해변을 바라본다. 황토밭과 푸른 들판과 항아리 모양의 하늘빛 잔잔한 바다. 몇 번을 바라보아도 지겨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