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섬 여행

무의도(4) 냉전시대 북파공작원의 한이 서린 실미도, 실미해수욕장

모산재 2010. 8. 7. 14:25

 

 

포도밭을 지나 울창한 해변 솔숲 언덕 바로 앞에 매표소가 있어 입장료를 받는다. 하나개해수욕장이 그러하더니, 작은 섬 무의도에서 이렇게 곳곳에서 유료 입장을 해야하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마을에서 실미도로 들어오는 길이 좁은데도 관광버스가 줄을 잇고, 주차장도 운동장처럼 넓게 자리잡고 있다. 바닷가 구릉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 소나무 숲 곳곳에는 음식점이 자리잡고 가요 소리가 시끄럽게 흘러 나오니 그야말로 유원지 분위기이다.

 

 

실미해수욕장의 북쪽 해안으로 들어선다.

 

빤히 건너다 보이는 맞은편 실미도 해안에는 백사장이 별로 발달되어 있지 않다. 당연히 실미도에 있을 줄 알았던 실미해수욕장은 실미도를 바라보고 있는 무의도 북서 해안 백사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실미도로 이어진다는 뜻으로 실미해수욕장이라 이름 붙인 모양이다.

 

 

 

 

 

↓ 실미해수욕장 북쪽 끝 

 

 

 

 

 

마침 바닷물이 빠져 있다. 서해섬 곳곳이 그러하듯 실미도와 무의도 사이에도 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만 건너 다닐 수 있는 섬은 오랜 세월 무인도로 내버려졌던 곳이다. 섬 대부분이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삭막한 땅이다.

 

 

 

 

 

건너가는 데 5분이면 충분할 듯한 거리인데, 예전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이 섬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날 정도로 실미도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던 섬이었다.

 

그러나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1천만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실미도는 사계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관광명소가 되었지만 무허가 건물이라는 이유로 '실미도' 세트장은 강제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고 하니 아쉬운 일이다.

 

 

 

 

 

지금은 빠졌던 물이 조금씩 밀려 들어오는 시간이다. 실미도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바지락, 가무락조개(모시조개), 소라 등을 캐고 줍는다. 

 

 

 

 

 

실미도는 40여 년 전 박정희 군사정권의 냉혹한 광기가 서려 있는 암울한 역사의 현장이다.

 

실미해수욕장과 마주보는 동쪽 해안은 백사장이 곱게 깔려 있지만, 그 너머 서쪽 해안은 기암괴석이 많은 거친 지형이라고 한다. 바로 그 서쪽 해안이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기 위해 북파공작원들이 지옥의 훈련을 받으며 죽어갔던 비극의 현장이라고 한다.

 

 

↓ 실미도 북쪽 해안

 

 

 

 

 

↓ 실미도 남쪽 해안

 

 

 

 

 

1968년 김신조 등 북한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중앙정보부는 비밀리에 실미도에 부대원 31명의 북파부대를 창설하고 3년 4개월 동안 지옥훈련을 시키며 이 과정에서 7명이 희생된다.

 

그러나 1971년 8월 23일 이 섬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은 국제환경과 남북관계의 변화에 따라 쓸모가 없어진 자신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인천에서 버스를 탈취한 뒤,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한다.

 

 

 

 

 

 

※ 실미도 사건이란?

 

북파부대는 1968년 4월 창설되었고, 일명 '684부대'로 불린다. 같은 해 1월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군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해 많은 인명피해를 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창설 목적은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金日成)을 죽이는 것이다.  

창설 이후 이들은 실전과 똑같은 훈련과 철저한 인민군식 훈련을 받으며 단 3개월 만에 북파가 가능한 인간병기로 탈바꿈하였다. 그 뒤 3년 4개월 동안 출동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1970년대 초 국제적인 긴장완화와 남북화해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이들의 존재가 불필요해지자 정부는 기간병들에게 이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인간병기로 길들여진 훈련병들 앞에서 기간병들은 손 쓸 틈도 없이 전체 24명 가운데 18명이 희생당하고 6명만이 살아 남았다. 이것이 1971년 8월 23일 6시경의 일이다. 기간병들을 살해한 북파부대원 24명(나머지 7명은 훈련 기간 중 사망)은 12시 20분경 인천 독배부리 해안에 상륙한 뒤, 버스를 빼앗아 서울로 향하였다. 이어 인천에서 육군과 총격전을 벌인 뒤, 두 번째 버스를 탈취해 14시 15분경 영등포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부대원 대부분이 죽고, 4명만이 살아 남았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3월 10일 모두 사형당하였다.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였는데, 이후 이 사건의 진상은 갖가지 의문점을 간직한 채 30여 년 간 베일에 싸여 있었다. 684부대의 훈련병들이 겪은 3년 4개월 동안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1999)와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강우석(康祐碩) 감독의 동명영화(2003년 12월 개봉)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2004년 초에는 1968년 3월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마을에서 실종된 7명의 청년이 684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국방부에 의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684부대의 구성원들이 범죄자들이었는지, 아니면 민간인들이었는지를 비롯해 많은 점들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다. <두산백과사전>

 

 

 

 

냉전시대에 박정희 정권에 의해 야비하게 짓밟힌 이들 북파공작원들의 비극은 정권에 의해 진상이 철저히 은폐된다. 1930년대 민주화 이후 조금씩 알려지던 이야기가 1999년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2003년 강우석 감독이 영화화하여 영화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끌어들이면서 실미도의 비극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직도 북파부대원들이 최종 목표로 삼았던 김일성 주석궁과 평양 시가지의 축도 등 당시의 훈련장 흔적을 엿볼 수 있다고 하는데, 이미 물이 들어오고 있어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듯하여 포기하고 만다.

 

 

↓ 실미해수욕장 남쪽 끝에서 바라본 실미 모세의 길

 

 

 

 

 

해안 소나무 숲에는 오토캠핑을 온 차량들과 텐트들이 늘어서 있다.

 

 

 

장구밥나무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실미해수욕장을 둘러본 뒤 다시 고갯길을 향하여 돌아오다 습지식물 자생지 안내판을 보고 혹시나 싶어 국사봉 산발치로 난 길을 따라 산책을 하기로 한다.

 

이삭귀개와 땅귀개, 통발 등이 자생한다는데 자생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만나는 게 가능할지...

 

 

↓ 국사봉 산발치 길에서 내려다본 실미해수욕장 주차장과 실미도

 

 

 

 

 

어제도 실컷 보았던 마귀광대버섯을 또 만난다.

 

 

 

 

 

길 곳곳에는 국사봉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계곡을 이루면 형성된 크고 작은 습지가 발달되어 있지만, 아쉽게도 눈에 띄는 별다른 푿들을 만나지 못한다.

 

 

중간에 만난 무덤의 풀밭엔 타래난초 분홍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그리고 그 옆의 숲에는 깃꼴겹잎으로 된 나무에 자잘한 흰꽃이 뭉쳐 피었다. 거리가 멀어 무슨 나무인지 확인하기 어려운데, 혹시 합다리나무일까...

 

 

 

 

 

 

길이 끝나 다시 바다로 접어드는 곳에 아늑한 작은 백사장이 있고 그 뒤편으로 넓은 습지가 보인다. 한 가족이 아름드리 소나무 숲그늘에 안아서 놀고 있다가 낯선 방문객에 시선을 돌린다.

 

 

백사장쪽에는 별스런 볼거리가 없고 억새를 닮은 풀이 대군락을 이루고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모새달로 보인다.

 

 

 

 

 

 

모새달 덤불 위로 큰닭의덩굴이 열매를 가득 달고 있다.

 

 

 

 

 

뒤편의 너른 습지는 배나무 과수원을 겸하고 있는 것이 재미 있다. 그곳으로 들어서서 습지 식물을 관찰하고 싶지만 들어서기가 쉽지 않아 포기한다. 대신 주변 개울을 따라 한 바퀴 휘휘 둘러보는데 역시 특별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늘에 핀 작살나무 꽃이 참 예쁘지 않느냐...

 

 

 

 

 

이것은 바늘골 종류이니 싶은데... 바늘골 중에서도 개체가 큰 참바늘골이라는 것도 있고...

 

물꼬챙이골이나 까락골 등도 비슷한 모양이라 늘 헷갈린다. 이론적으로는 줄기에 각이 거의 없고 원형인 물꼬챙이골, 각이 여럿 있는 까락골... 등으로 구별한다지만 실물을 보고 동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방울고랭이인지 도루박이인지... 윗 녀석을 보고 헷갈리는데, 작은 이삭이 2~3개 달린 아래 녀석을 보고서 방울고랭이임을 확인한다.

 

 

 

 

 

 

이것은 아마도 올챙이고랭이가 아닐까 싶다.

 

 

 

 

 

요건 왕비늘사초로 보면 되겠다.

 

 

 

 

 

뽀리뱅이인 듯한데 줄기도 여럿이거니와 잔가지가 많이 나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는 집터만 남아 있는 숲속 개활지엔는 무성한 풀밭인데, 두루미천남성이 군락을 이루며 살고 있다.

 

 

 

 

 

더 이상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점심 시감이 지난지도 오래, 햇살은 따갑고 땀은 흐르고 뱃속은 꼬르륵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지르고...

 

얼른 마을 식당을 찾아 시원한 냉면 한 그릇 먹었으면 원이 없겠다.

 

 

다시 고개를 넘어오다 오랜만에 창질경이를 만나 기념사진 찍는다.

 

 

 

 

 

고개를 넘어 큰무리마을에 들어서는데 정말로 냉면집이 있어 얼마나 반가운지...

 

냉면에 시원한 막걸리까지 주문하여 먹고 마시니 정신이 번쩍 드는 냉기에 온 몸이 기분 좋게 서늘해지고 세상이 다 내 것이다.

 

 

풀꽃나무에 대한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무의도를 떠나는 배에 몸을 싣는다. 홀가분하고 기분 좋다. 날아드는 새우깡족 갈매기들에 잠시 정신을 파는 사이 배는 잠진도 선착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안녕, 무의도. 내년 6월에 다시 만나기를...

 

 

 

 

 

잠진도선착장